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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에 제사가 있었다. 부랴부랴 볼 일을 마치고 도착하여 현관문을 여니 전 부친 냄새가 밀려 나오고 어린 조카 둘이 인사를 한다. 올해 80이신 시어머니가 돌봐주시는 작은 시누이의 초등 자녀들이다. 하교 후 돌봄이던 것이 방학이 되고 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 돌봄이다. 보통은 차로 5분 거리인 시누네에서 돌보다가 귀가하시는데 제사같이 사정 있는 경우에는 어머님 댁에서 돌보시기도 한다.

어머니의 손주 돌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래전 내 사정이 급할 때 간혹 도와주셨음은 물론, 큰 시누네든 작은 시누네든 SOS를 치면 언제든 손주들을 맡아 기꺼이 도움을 주셨다. 작은 시누네가 부산에 살 때에는 부산까지 내려가 기거하며 돌봐주시기도 했다. 산후조리 때부터 거의 어머니 손에 자라다시피 한 큰 조카가 이제 17세이니 60대부터 시작한 어머니의 황혼 육아는 오래되었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건강하신 편이지만 무릎과 발목이 안 좋으셔서 힘들지 않냐고 여쭤보면 며느리가 흉이라도 볼까 그런지 '때 돼서 먹을 거나 챙기지, 나 하는 거 하나도 없다'며 정색을 하고 손사래를 치신다. 그러면서도 같이 운동하는 동네 친구분들이 '사람을 써야지, 그 나이에 무슨 손주냐'며 타박을 한다고 배시시 웃으신다. 손주에 묶여 친구들한테 연락이 와도 못 나가시는 게 답답하실 텐데 전에도 그래왔듯 그저 받아들이시는 듯하다.

시어머니의 황혼육아는 분명 육체적으로 버겁고 정신적으로 답답하신 면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힘들기만 하다면 이토록 오래 손주 돌봄을 지속해 오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어머니의 육아를 잠시 관찰하면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본 결과 황혼 육아가 꼭 못할 일만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건강이 허락하고 손주를 돌봐 줄 의향이 있다면 조부모에게나 손주에게나 상호 이로운 점들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준비해 간 구운 닭 두 마리와 딸기를 씻어 저녁 겸 간식으로 먹는데, 어머니는 역시 손주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손주들을 딱 옆에 끼고 앉아 닭살을 결결이 찢어 먹기 좋게 그릇에 놓아주시곤 오물거리는 손주들에게 흡족한 눈빛으로 맛있냐고 물어보신다. 손주 엉덩이를 토닥이며 더 먹으라 권하시는 그 자태 그대로 어머니는 누가 봐도 현역 '엄마'셨다. 평소보다 한결 생기 있어 보였다.
 
   손주와 스킨십을 나누는 어머니 표정에 달큰한 흐뭇함이 녹아있다
  손주와 스킨십을 나누는 어머니 표정에 달큰한 흐뭇함이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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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이를 못 알아볼 리 없는 손주들도 할머니를 무척 좋아한다. "할머니!" 부르며 달려와 품에 안겨 할머니의 쪼글쪼글 주름진 뺨에 자신의 볼을 부벼댄다. 손주들과 애정 어린 스킨십을 나누는 어머니 표정에 달큰한 흐뭇함이 녹아있다.

어린 손주와 순수한 친밀감으로 교감하는 그 순간들이야말로 어머니가 육아에서 느끼는 최고의 보람이 아닐지. 종종 큰소리도 친다 하시지만 손주들과 함께 웃고 먹고 놀아주시며 하루를 바쁘게 보내시는 덕분인지 한가할 때 종종 외롭다 하시던 말씀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으니 말이다.

손주들은 할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보는 할아버지와도 정이 깊다. 할아버지와 손으로 밀고 당기는 가벼운 몸싸움이나 오목을 두어 진검승부를 가르고, 집에 있는 노래방 기계로 번갈아 노래를 부른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팝 '댄스 몽키'를 영어로 부르다가도 할아버지가 십팔번 '진또배기'나 '용두산 엘러지'를 부를라치면 어느덧 함께 트로트를 구성지게 열창해 대는 모습은 자못 정겹다.

1940년대생 할아버지와 2010년대생 손주들이 70년의 세월을 넘나들며 노래로 같이 즐거워하고 서로 통하게 되는 참 귀한 장면이기도 하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보낸 이 시간들은 아마도 먼 훗날 손주들에게 지극한 사랑으로 생생히 간직될 귀한 선물임이 분명하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변에 물어보니 황혼육아하시는 분들이 꽤 많다. 60대 후반 지인내외분도 딸들의 어린 자녀들, 두 살, 세 살배기 손주들을 열심히 봐주신다고 한다. 한 70대 지인은 손녀가 태어날 때부터 초등학교 입학 후 학부모 역할까지 아예 전담해서 키우셨다.

한 조사에 따르면, 아이를 양육하는 맞벌이 가구 중 83.6%가 조부모에게 양육을 의지한다고 하니 조부모의 육아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다(2018년 보건복지부 보육실태조사).

아쉬운 부분은 조부모들의 그런 기여를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정책들이 미흡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나마 최근 서울시에서 양육지원책의 일환으로 조부모 돌봄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반갑다(서울시 보도자료, 23.1.17 참고). 경기도를 비롯한 타 지자체에서도 적극 도입,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돌보는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 지원 비용을 차등 지급하는 방안도 좋을 것 같다.

앞일은 모르지만, 훗날 나에게도 혹시 황혼 육아의 기회가 주어지고 여건이 된다면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손주 돌보다 골병든다는 말도 일리가 있겠으나 시부모님의 육아를 접하니 손주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일상이 따뜻하면서도 가치 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결혼이 선택이 되어버린 내 아이들이 과연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줄지 다분히 의문이지만.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황혼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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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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