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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영화 한 편이 한국을 휩쓸었다. <넘버3>라는 영화다. 송강호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기억되기 시작한 첫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에서 두목인 송강호가 부하들에게 '헝그리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면이 있었다. 요즘 애들은 다들 '절박함'이 없어서 실패한다고 주장하며 "현정화를 봐라. 라면만 끓여 먹어도 금메달 다 따고 그랬다!"라고 다그친다.

MZ세대에게는 매우 생소하겠지만, 현정화는 과거 최고의 탁구선수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올림픽을 포함해 금메달만 10개 이상 따낸 영웅이었지만, 사실 라면을 먹고 메달을 땄다는 일화는 육상선수 임춘애(1986년 아시안게임 3관왕)의 이야기였다. 송강호가 현정화와 라면을 연결시키자, 꿇어 앉은 부하 한 명은 눈치 없게 "임춘앱니다. 형님!" 하고 오류를 잡아낸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여관방, 송강호는 발언의 당사자에게 무차별로 린치를 가한다. 다시 꿇어 앉은 부하들에게, 송강호는 씩씩거리며 묵직하게 한마디로 경고한다. "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인 거야!", "이 계란이 원래는 누런색이지만, 내가 빨강색이라면 그냥 빨강인 거야!" 그저 크게 웃었던 장면으로만 기억하면 좋을 텐데, 20년이 흘러 이 장면이 새삼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MBC를 상대로 소송을 건 외교부 
 
지난해 9월 26일,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지난해 9월 26일,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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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가 최근 MBC를 상대로 정정보도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9월 대통령 순방 과정에서 발생한 '바이든-날리면' 보도 분쟁에 대해 MBC 박성제 대표이사를 상대로 정정보도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대통령은 출근길 문답을 멈췄고, 해당 언론사는 "헌법 수호 차원"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탈 수 없게 되었으며, 한 기자는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이런 난리가 조금씩 잊히던 시점에, 정부가 다시 이 사안을 법정으로 불러낸 것이다. 

정부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자세한 배경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법원이란 공적기관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고스란히 밝혀 역사에 기록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야만 MBC를 향했던 분노의 '명분'이 제대로 설 것이라 믿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일련의 상황이 후손 모두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도록 재판 과정을 똑똑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어떤 국민도 우리의 소중한 세금으로 이런 '이상한' 재판이 또다시 진행되는 걸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왜 이번 재판이 그토록 '이상한' 재판인지 몇 가지 쟁점을 짚어보려 한다. 

첫째, 이번 재판에서 다룰 사안의 진위 여부는, 사실 대통령의 진실된 말 한마디면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재판'을 통해 이를 밝혀내게 되었다. 대통령은 논란의 발언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지만, 자신의 발언이 영상으로까지 기록된 마당에 기억하지 못하는 건 쉽지 않다. 시간이 좀 지났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발언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면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딱 한 마디로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재판이라는 먼 길을 택하게 된 상황이다. 매우 이상하지 않은가. 

두 번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왈가왈부를 따져야 하는 상황이지만 정작 이 재판에 '진짜 당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소송의 주체(원고)는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 박진이며, 피고는 MBC 문화방송의 대표이사 박성제다. 재판의 진행 과정에서 '바이든-날리면' 발언의 주체인 대통령의 의견을 진술이든 서면이든 접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대통령실에 질의를 한다고 해도, "국정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며 개별 재판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외교부가 소송의 주체로서 자격을 보유했는지에 대해 따져야 한다는 법률가들도 존재한다. 실질적으로 대리 소송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외교부는 물론 "MBC의 사실과 다른 보도로 인해, 우리 외교에 대한 국내외 신뢰에 부정적 영향이 발생했음"을 이유로 들며 소송 자격이 충분하다는 입장을 이미 밝혔다. 당사자가 없는 상태에서, 제2자와 제3자들만 모여 치열하게 싸우는 이상한 재판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들으라는 대로 들어야 하는 국가
 
박진 외교부장관이 지난 2022년 9월 30일 오전 종로구 외교부청사 기자실을 찾아 ‘윤석열 대통령 해외순방에 대한 ‘외교참사’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전날 자신에 대한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에 대해서는 ‘착잡한 심정, 며칠 밤잠을 설쳤다’고 밝혔다.
 박진 외교부장관이 지난 2022년 9월 30일 오전 종로구 외교부청사 기자실을 찾아 ‘윤석열 대통령 해외순방에 대한 ‘외교참사’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전날 자신에 대한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에 대해서는 ‘착잡한 심정, 며칠 밤잠을 설쳤다’고 밝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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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날리면' 대신 '바이든'이라고 보도한 언론사가 수없이 많은데, 유독 한 군데만 콕 집어 소송을 제기했다는 점도 이상하다. 외교부는 "사실 관계를 바로 잡고, 우리 외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소송을 건다고 밝혔다. 그런 논리라면 '바이든'을 버젓이 내보낸 언론사 모두를 피고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외교부와 대통령실은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번 재판이 특정 언론사에 대한 선택적 분노와 공격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네 번째, 발언의 진위를 판단하는 시간보다 특정 결론이 만들 파장을 고려하는 시간이 더 들 것 같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녹화된 영상에서 주변의 소음을 제거하고 음성만 잡아내는 기술을 적용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과학의 시간'보다는 그 외의 것들을 판단하는 시간이 더욱 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진상 파악보다 결과 발표에 훨씬 많은 더 많은 시간이 걸릴까 걱정된다. 

마지막으로, 언론의 자유가 다뤄지는 중요한 재판이 시작되었지만 다수의 언론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 기자에게 들리는 대로, 데스크가 판단하는 대로 보도한 언론에 대해 '헌법 수호'를 이유로 취재상 불이익을 주는 것은 물론, 소송까지 걸고 나섰는데 정작 다른 언론은 매우 조용한 것 같다. 이 이상한 조용함이 유지되고 있다. 다시 한번 이 말을 곱씹어 본다. '들리는 대로 들어도 되는 나라와, 들으라는 대로 들어야 하는 국가, 어느 쪽이 정상인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유현재 시민기자는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커뮤니케이션학 박사입니다.


태그:#정치, #윤석열, #언론, #MBC, #바이든 날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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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수용자 중심 저널리즘과 미디어 활용에 대해 강의 중. 정치인들을 포함, 공적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대중과의 소통을 얼마나 원활하게 하고 있는지 ‘소통감수성 ’이란 개념을 통해 설명 및 비판하고 있음. 세바시에 출연, “소통 감수성이란 무엇인가?”“미디어 시대, 우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등을 주제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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