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19 21:41최종 업데이트 22.10.2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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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광역철도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부산 동해선 노선이 확장된 직후라 열차 안은 몹시 붐볐다. 전에 못 보던 풍경이나 즐겨보자 하고 있는데, 차창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눈부신 햇살과 윤슬, 아기자기한 마을 분위기, 그리고 풍경에 어우러진 커다랗고 둥근 회색 건물 몇 점... 잠깐, 내가 뭘 본 거지?

제대로 확인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원자력발전소 단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가 '고리'인가? 저게 진짜 원전이라고? 우리 집에서 이렇게 가까웠어? 아니, 그보다 저렇게 마을에 딱 붙어 있다고? 집까지 철도로 30분 거리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년 4월 설계수명 40년이 만료되는 고리 2호기의 계속운전을 약속했다. 그런데 뉴스 속 그 고리 원전이 내 생활권과 이 정도로 가까울 거라곤 예상 못했다.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 지역"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2호기, 3호기, 4호기. 최근 태풍으로 고리원전 3, 4호기가 잇따라 셧다운됐다. ⓒ 김보성

 
타지 출신인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부산 토박이인 지인(47세)은 "부산 사람 중 근처에 원전이 생각보다 가깝게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고, 안다고 해도 신경 쓰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했다. 

고리 원전은 세계 최대 원전 밀집 단지다. 영구정지한 고리 1호기와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를 포함해 10기의 원전이 있다. 놀랍게도 원전 단지에서 차로 20분만 가면 롯데월드와 아웃렛 등이 밀집한 '오시리아 관광 단지'가 있고, 부산 도심부 10개 구가 방사선 비상계획구역인 반경 28~30km에 포함된다. 여기에 우리나라 인구의 7%인 380만여 명이 산다.

평가를 원하지 않는 평가서

진짜 문제는 주민들이 고리 원전에 대해 체감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노후 원전의 수명 연장이 안전에 위협으로 다가온 상황과, 수명 연장 여부 결정 과정에 자신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지난 7월 8일부터 두 달 간 부울경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내 16개 기초지자체(부산시 기장군·해운대구·금정구·동래구·연제구·수영구·남구·북구·동구·부산진구, 울산시 울주군·중구·남구·북구·동구, 양산시 등)를 대상으로 고리 2호기 계속운전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 공람을 시행했다.

한수원이 고리 2호기의 계속운전을 허가받으려면 주기적안전평가서(PSR)를 내고 운영변경 허가를 신청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방사선환경영향평가가 필요하다. 방사선 영향은 물론 원전사고 등을 예측하자는 것이다.

최근 개정한 원자력안전법은 평가서 완성 전 주민의견 수렴을 의무화했다. 60일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20일 이상 의견수렴 대상 지역 주민에게 초안을 공람해야 한다. 주민들은 한수원 홈페이지 또는 지역 시·군·구청에 비치된 책자와 안내서로 초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평가서 초안을 공람한 주민은 대상자 중 0.02%뿐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수원 자료에 따르면, 고리2호기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 공람자 수는 대상 주민 387만9507명 중 750명에 불과했다.(관련기사 : 고리2호기 수명연장 평가서 열람 0.02% 불과 http://omn.kr/213qg)

이를 두고 정부와 한수원 측이 답을 정해둔 채 과정은 겉치레로 진행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단 주민들에게 정보가 가 닿지 않는다. 구석구석 홍보하고 전문가 설명회 개최해 이해와 참여를 높여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위기다.
 

기장군에 걸린 추가 공람 관련 현수막 한수원 고리원자력본부는 10월 중 추가 주민공람을 실시할 예정이다. 고리본부에서 제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공람을 원하는 주민은 추가 공람 기간 중 지자체에서 지정한 공람 장소나 고리원자력본부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보완된 평가서 초안을 공람할 수 있다. ⓒ 김나라

 
저조한 공람률을 두고 논란이 일자 한수원은 지난 6일부터 추가 공람을 시작했지만 우려는 여전하다. 공람 정보를 접한다 해도 벽은 높아서다. 평가서가 주민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형태다. 분량만 해도 500쪽에 달하고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 의견서 제출이 가능할 만큼 상황 진단을 하기 어렵다. 특히 온라인 열람 시 문서를 내려받지 못하고 해당 사이트 안에서만 살펴볼 수 있어 번거롭다.

그럼 평가서를 쉬운 말로 바꾸고 저장 가능한 형식으로 만든다면,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환경운동연합은 2차 전문가 기자회견 및 간담회 자료를 통해 '중대사고'에 따른 위험성이 평가서에 누락됐다고 우려한 바 있다.

평가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중대사고 시에는 원자로건물이 격리되며, 분석대상 모든 시나리오에 대하여 원자로건물을 우회하는 방출경로는 없고", "사고 유형별로 계산된 주민총피폭선량은 자연방사능에 의한 주민총피폭선량보다 작은 값"이라는 것.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결론엔 기본적 근거나 추론 경위가 제시되지 않았다. 확률론적 안전성 평가 등 중요 결과값, 사고로 인한 초기사망 위험도, 암 사망 위험도, 노심 손상 빈도, 만일을 위한 투자나 개선 계획 등의 설명도 모두 빠져있다.

언론은 현 정부가 이후 고리 3호기(설계수명 만료 2024년)와 4호기(2025년), 한빛 1호기(2025년)의 수명 연장도 추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일 지금처럼 불친절하고 무성의한 방식으로 절차를 진행한다면 주민 의견이 제대로 반영될 수 없을 것이다.

원전 문제에는 '님비'가 없다

원전 재가동 승인 후 3개월 이내 원전이 정지된 사고는 국내 24개 원전에서 150건이나 발생했는데, 이 중 고리 2호기가 27건으로 가장 많다. 한수원은 사고 대부분이 2000년 이전에 발생했다고 설명하지만, 불과 넉 달 전인 6월 3일에도 재가동 사흘 만에 고리원전 내 전원 차단기가 불타 훼손되며 원자로가 자동정지했다. 
 

임랑해수욕장의 아이들 고리 원전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임랑해수욕장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김나라

 
부산 시민의 안전 의식이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수명을 두 번째 연장할 뻔했던 고리1호기를 폐쇄하게 된 것은 부울경 주민들의 '고리1호기폐쇄 범시민운동'의 결과였다.

(사)시민정책공방이 2014년 4월 부산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들은 환경세 등 정부의 탈원전정책에 1인당 월평균 7727원의 비용을 쓸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회가 열리면 해결을 위해 행동에 참여할 사람이 많다고 본다.

만일 모든 동네에 하나씩 원전을 갖는다면, 원전 안전성에 대한 경각심은 지금보다 훨씬 높지 않을까. 하지만 이 문제에서 우리 동네 너희 동네 나누는 건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일본이 계획대로 내년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할 경우 3600일 후엔 태평양 전역에 퍼진다는 칭화(淸華)대학 연구진의 시뮬레이션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상황을 점검하고 질문하고 감시해야 할 주체는 '우리'다.
 


* 해외의 경우 원전 수명 연장 시 중대사고의 방사선환경영향을 평가하고 저감대책과 설비개선 및 그 영향을 보고서에 기술한다. 

* 지난 4일 한수원은 2030년까지 고리 원전에 사용후핵연료 건식 저장시설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 많은 사람들이 '안전 기준치'라 생각하는 방사성 물질의 기준치는 나라에 따라 10배 이상 차이 나고 우리나라도 상황에 따라 4배 가까이 낮췄던 '관리 기준치'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의 보고서에 따르면, 암과 유전병은 역치 없이 피폭량에 따라 증가한다.

[참고 자료]
김익중, <한국 탈핵>, 한티재, 2013, 54-55쪽, 112-121쪽.
김해창, <탈핵으로 가는 길 Q&A 고리1호기 폐쇄가 시작이다!>, 해성, 2015, 154-159쪽.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 https://nsic.nssc.go.kr/
한국수력원자력 고리본부 홈페이지 https://www.khnp.co.kr/kori/index.do
환경운동연합 제공 자료집 (2011.08.11.) http://kfem.or.kr/?p=22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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