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7 12:01최종 업데이트 21.02.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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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외손녀 캔디고씨 ⓒ 캔디고

 
1990년 전후의 세계적 탈냉전은 한국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 30년 이상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한국은 냉전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국제적 환경 때문이지만, 어느 정도는 국내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냉전 덕분에 돈을 벌고 지위를 유지하는 정치세력이 1990년대 초반에 무사히 살아남아 평화와 진보를 가로막을 수 있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1990년대 초반에 의미 있는 역할을 했지만, 강력한 인상에 비해 그 역할이 잘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1987년 직선제 개헌투쟁으로 타격을 입은 신군부 정권과 그 후예 정당들이 3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를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민정당) 정권은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을 거쳐 국민의힘으로 간판을 바꿔가며 오늘날까지 생존하고 있다. 시민혁명의 직격탄을 맞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야당 민주화세력과 이재오·김문수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세력 등을 흡수해 '모호한 정체성'을 만들어낸 사실에 있다.

신군부 생명 연장의 꿈에 중요한 역할

'이 인물'은 신군부 정당이 그런 모호함을 만들어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냉전세력이 6월항쟁과 세계적 탈냉전을 뚫고 생존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됐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 민정계 리더로서 민주계 리더 김영삼과 경쟁한 박태준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일본에서 금융공황 여파로 강경파인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출범하고 이 내각이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에 시동을 건 1927년 9월 29일이 박태준의 생일이다. 일제가 패망한 1945년에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기계공학을 공부하다가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6기로 입학한 그는 이곳에서 운명적 인물을 만난다. 육사 2기 출신의 중대장으로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공작원으로 암약 중인 박정희가 그곳에 있었다.

1948년에 소위로 임관한 박태준은 1961년 5·16 쿠데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5월 20일, 대령인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군사정권) 부의장 비서실장이 됐다. 실권자 박정희가 부의장이었기에, 의장 비서실장이 아닌 부의장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군사정권 하에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의 산파 역할을 했던 박태준은 육군 소장 때인 1963년 만 36세 나이로 군복을 벗었다. 그런 뒤 경영자로 탈바꿈했다. 이듬해에는 국영기업인 대한중석광업(현 대구텍) 사장이 되고 1968년에는 포항제철(포스코) 초대 사장이 됐다. 그 뒤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일에 올인했다. '철의 사나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왼쪽)이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포스코

 
그는 포항제철을 세계적 기업으로 올려놓았다. 동시에, 과오도 컸다. 1970년 10월 16일 자 <매일경제> 기사 '미쓰비시상사(에)서 수주'에 보도된 것처럼, 전범 기업 미쓰비시와의 협력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전범 기업이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또 1993년 6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 'TJ 돈줄, 어디로 뻗었나'에 "포철이 박정희 정권 이래 세무조사 한 번 받지 않고 독점적으로 성장"했다고 언급된 것처럼, 국민의 기업인 포항제철을 국민 앞에 투명한 기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경제 분야에서 박정희 정권을 떠받치던 그는 박정희가 사라진 뒤인 1980년에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경제1위원장이 되고, 1981년에 민정당 공천으로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정치로 전업한 것은 아니었다. 포항제철 경영에 주력하면서 한 발을 살짝 걸치는 수준이었다.

그의 두 발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인물은 육사 후배이자 대통령인 노태우다. 6월항쟁 기운을 타고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이 불타오르는 동시에 제5공화국(5공·전두환 정권) 청산 운동이 한창이던 1990년 1월 5일, 노태우가 63세인 그를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끌어들였다. 1992년 1월 23일 ROTC(학군사관) 1기생 모임인 서울클럽에서 발언한 바와 같이, 박태준은 1980년이 아닌 1990년을 자신의 정치입문 시점으로 생각했다.

당내 기반이 거의 없는 박태준을 총재 대리인으로 내세운 것은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의 정국 구상과 관련이 있었다. 백담사에 은둔 중인 전두환이 1989년 12월 31일 국회 5공·광주 특위 합동청문회에 출석했으니 5공 청산 요구가 잠잠해질 거라고 예상한 노태우는 6월항쟁과 제13대 총선 참패로 인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보수 대연합'에 시동을 걸었다. 이 구상을 가동하는 데에 박태준이 필요했다.

노태우는 야당들을 끌어들여 보수 대연합에 시동을 거는 시점에 박태준을 당의 간판으로 내세웠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새로운 이미지로 야당에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노태우는 포항제철 신화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5공 정권에서 별로 활약하지 않은 박태준의 '비교적 참신한 이미지'를 앞세워 3당 통합을 추진하려 했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당 총재를 청와대에 초청해 개별 회담을 갖고 정계개편을 포함한 정국운영 전반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여권의 당직을 개편해 민정당 대표위원에 박태준 의원, 사무총장에 박준병 의원, 원내총무에 정동성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6월항쟁 이후의 민정당은 2016년 촛불혁명 이후의 보수정당처럼 심각한 인물난에 시달렸다. 민정당은 김대중·김영삼에 맞설 지도자급 인물을 찾아내지 못했다. 시민혁명의 직격탄을 받은 정당이 국민의 신망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인물난은 계속 심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 노태우 정권이 헬멧 쓴 '철의 사나이'를 용광로에서 끄집어냈다.

노태우는 박태준이 얼굴마담이 되어 정치적 외풍을 차단해주고 이를 통해 보수정당이 위기를 타개해나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노태우가 그에게 기대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 점은 <노태우 회고록>에도 명확히 나타난다.

하지만 박태준은 그렇지 않았다. 민정당 대표위원이 된 지 17일 만인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 선언이 발표돼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박태준은 '한 지붕 세 가족' 체제에 그럭저럭 적응하면서 민정계를 이끌어나갔다.

대권을 꿈꾸다 
 

1990년 7월 당사에 출근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가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손을 맞잡은 모습. ⓒ 연합뉴스

 
이런 속에서 그는 대권을 꿈꾸게 됐다. 대선이 있는 1992년에 위의 ROTC 모임에 나가 '신(新)주도세력이 필요하다'는 주제로 국정철학을 역설한 것도 그가 얼굴마담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1992년 3월호 <한국논단>에 게재된 이 연설문에서, 그는 6월항쟁 이후의 민주화로부터 기존 체제를 지키려면 자신과 같은 '산업화 세력'이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6월항쟁 이후의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도 그는 산업화 세력과 함께 시대적 과제에 도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태준의 열정은 '육사 후배' 노태우에게 부담이 됐다. 노태우는 이종찬·이한동 같은 민정계 유력 주자들과 달리 박태준이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김영삼계(민주계)가 박태준을 무척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1992년 4월 17일 자 <동아일보> 1면 톱기사에 "김 대표(김영삼) 측은 그간 민정계 관리자인 박 최고위원이 출마한다면 대의원 분포상 우열 현상이 뚜렷한 만큼 불완전한 경선이 될 것이라며 그의 출마를 반대"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처럼 김영삼계는 박태준이 출마하면 민정계가 뭉칠 거라는 우려를 품고 있었다.

노태우는 그런 김영삼계를 붙들어두려면 박태준을 묶어둬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영삼계의 탈당을 막지 못하면 민자당은 민정당으로 회귀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신군부 이미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유권자에게 어필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는 그 점을 두려워했다.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영삼 대표의 입장에서도 이종찬 의원과 대결하는 것은 크게 두려울 것이 없으나 박 최고위원이 나서게 되면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박 최고위원이 출마하게 되면 어떤 돌출 행동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김영삼의 돌출 행동을 막는 길은 박태준을 포기시키는 것뿐이라고 노태우는 판단했다. 노태우는 '6공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노태우의 부인의 사촌동생)을 내세워 돈줄을 죄는 등의 방법으로 김영삼의 대권 행보를 견제했다. 김영삼의 청와대 입성을 도울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김영삼을 묶어두기는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김영삼이 당을 깨고 나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그래서 노태우는 박태준에 대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박태준은 노태우의 간접 화법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포철 회장으로서 쌓아 올린 박 선배의 명예가 어떤 경우든 손상돼서는 안 됩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박태준은 자기 나름대로 이해했다.

상대방이 자기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노태우는 김종필에게 부탁을 했다. 노태우와 달리 김종필은 직접 화법을 구사했다. 1997년 5월 12일 자 <경향신문> 기사 '비록(秘錄) - 문민권력 탄생 막후'에 따르면, 한 살 많은 김종필은 "(대통령은) 박형보다는 김 대표를 속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태준은 약간 당황해하면서도 도리어 면박을 줬다. "김 선배, 제가 알기에는 다릅니다"라며 "정치를 30년이나 했다는 분이 그 정도도 감을 잡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동안 정치를 헛하셨구만요"라고 그는 답했다.

결국 노태우는 안기부장을 동원했다. 제목이 '박태준 씨 불출마'인 위의 <동아일보> 톱기사에 따르면, 1992년 4월 16일 박태준은 이상연 안기부장으로부터 2시간이나 설득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결정타가 되지 못했다. 결정타를 날린 쪽은 안기부장 특보였다. 그날 밤 이대공 포항제철 부사장을 만난 손진곤 특보는 '출마하면 항명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의지임을 명확히 전달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박태준은 17일 오전에 정해창 대통령비서실장을 만나 대통령의 의중을 한번 더 확인한 뒤 불출마 방침을 확정했다.

그가 출마 강행했다면

박태준의 불출마는 김영삼을 민자당에 붙들어두는 데 기여했고, 이는 민자당이 신군부 정당의 본색을 가리고 보수 대연합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김영삼 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출범하기 4일 전인 1992년 10월 9일 박태준이 탈당계를 제출하기는 했지만, 이때는 김영삼이 민자당을 이미 장악한 뒤였다.

만약 박태준이 출마를 강행했다면, 김영삼은 '불공정 경선이 예상된다'며 당을 깨고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신군부 정치세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박태준은 '대통령 후배'의 내심을 뒤늦게 확인한 뒤 마음을 고쳐먹었고, 이에 힘입어 신군부 정당은 김영삼계를 끌어안고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이는 신군부 정당이 떠받치는 한반도 냉전 구도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당을 박차고 나간 박태준은 그 뒤 시련을 겪었다. 포항제철이 그해 11월에는 감사원 감사를 받고, 이듬해 2월에는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 본인도 비자금 문제로 수사를 받았다. 1995년 8월 11일 검찰이 공소를 취소하기 전까지 박태준은 살얼음을 걸어야 했다. 그 뒤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 입당해 총재가 되고 김대중 정권 때 국무총리가 된 그는 2011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지난 2011년 12월 14일 오전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빈소가 마련된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들어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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