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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윗쪽에 1915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간도로 이주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김헌식 영수 가족사진 사진 윗쪽에 1915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간도로 이주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김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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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배, 그는 누구인가?

김춘배 의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4월 국사편찬위 사료조사관인 이승철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서이다. '삼례의 근대교육과 종교'라는 주제였는데 전북 완주군 삼례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인 삼례제일교회와 삼례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영흥학교(후에 영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이 교회와 학교에 모두 관련 있는 사람이 김헌식 영수였다.

김헌식 영수는 맥커첸(마로덕)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영수는 한국 초대 장로교회의 평신도 직분 중의 하나로 선교사들의 보조 역할인 '조사'를 대행하는 직책이다. 김헌식은 5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인 김계홍은 삼례제일교회 초대 장로이고 둘째 김창언은 김춘배 의사의 아버지이다. 김창언은 삼례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삼례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김춘배 의사가 출옥한 직후의 가족 사진이다. 뒷줄 오른쪽이 김춘배의사이고 왼쪽이 장남 김성배 목사이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어린이가 김춘배 의사의 아들 김종수이다.
▲ 김창언 가족 사진 김춘배 의사가 출옥한 직후의 가족 사진이다. 뒷줄 오른쪽이 김춘배의사이고 왼쪽이 장남 김성배 목사이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어린이가 김춘배 의사의 아들 김종수이다.
ⓒ 김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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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배는 김창언의 둘째 아들로 1904년에 태어나 4학년까지 영신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중 1917년 할아버지 김헌식은 아들 5형제와 그 일가를 모두 거느리고 만주 용정으로 이주를 한다. 용정에서도 김창언은 포목장사를 하고 아들들은 모두 독립군 활동을 한다. 큰아들 김성배는 홍범도 장군 휘하에서, 김춘배는 정의부에서 군자금을 모금한다.

이 일로 김춘배는 간도총영사관 경찰에 잡혀서 6년 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청진형무소에서 복역 중 탈옥하여 형량이 추가되어 8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1934년 출옥하여 형이 있는 함경남도 신창으로 간다. 신창에서는 부인과 같이 양복점에서 일을 하였는데 감옥에 갈 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자라 8살이 되어 있었다.

함남 권총 의거

1934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 신문(2면1단)
 1934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 신문(2면1단)

김춘배는 출옥 6개월 만에 신창주재소 무기고에서 총기와 실탄을 탈취한다. 탈취한 무기를 이용하여 부호를 협박, 군자금을 모아 만주로 건너가서 부하를 모아 정의부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경찰은 19일 동안 2만여 명을 동원하여 수색 하였지만 그를 잡지 못하였다. 그는 도망 다니면서 심경의 변화로 삼례에서 자금을 모금하여 이상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신창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남하하다가 일경에 붙잡힌다.

김춘배는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된 후 출옥한다. 그러나 혼란한 해방공간에서 그는 오갈 데 없이 고통스럽게 살다 1년 만에 서울의 뒷골목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가족들은 모두 만주에 있고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낸 그에게 삶이 너무 버거웠는지 모른다. 그의 주검은 아마도 무연고 처리된 듯 가족들도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아버지를 찾아 서울에 온 아들 김종수는 38선이 막히는 바람에 아버지도 만나지 못하고 고향인 연길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혈혈단신 남한에서 삶을 살아야 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고향 삼례에서 그의 착실함을 눈여겨 본 장인어른 덕분에 결혼하여 전주에 정착할 수 있었다. 김종수는 아버지의 행적들을 찾아서 정리하여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는다.

김춘배는 삼례 출신인가

김경근 목사는 요즘 할아버지 김춘배 의사의 기록을 찾아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 김춘배 의사의 손자인 김경근 목사 김경근 목사는 요즘 할아버지 김춘배 의사의 기록을 찾아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 김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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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배 일가는 일제의 폭압을 피해 간도로 이주 하였고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실행하였다. 김춘배는 간도에서는 정의부 의용군으로 군자금을 모금 하였고 국내에서는 단독으로 권총의거를 실행 하였다. 이것은 1930년 대 일본에 대한 패배주의가 급속하게 퍼져가는 상황에서 일어난 군자금 모금운동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큰 사건이다.

그런데 보훈처 공훈 기록에는 함남권총의거의 주인공 김춘배는 함북 경흥 출신으로 되어있다. 김종수의 본적이 함북 경흥이고 아버지와의 기억은 단 6개월뿐이라 아마도 출신지를 경흥으로 적은 것 같다. 최근에 만난 김춘배의 손자 김경근 목사는 아버지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다. 삼례 출신이라 기록된 조선일보 신문기사와 할아버지들이 삼례에 사셨던 것을 증명할 제적 증명서를 찾았다. 자료가 있으니 공훈기록을 수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춘배 의사는 1990년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추서 받았다.
 김춘배 의사는 1990년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추서 받았다.

김춘배, 그는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져갈 때 이승철 국사편찬 위원회 사료조사관의 꾸준한 외침 덕분에 우리 곁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작년 12월엔 그를 연구한 석사학위 논문도 발표가 되었다. 내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삼례에는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들이 많이 있다. 이우성, 정병은, 박한영 등 잊힌 분들을 찾아 그분들의 희생에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수원대학교 사학과 '함남권총의거 김춘배' 석사 논문과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사, 보훈처 공훈 기록을 참고해 썼습니다.



태그:#함남권총의거, #김춘배, #김경근, #삼례출신,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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