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다닥다닥 붙어살던 30년 전 자취방. 그 속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
 다닥다닥 붙어살던 30년 전 자취방. 그 속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30여 년 전, '서울 정릉'은 희비가 교차하는 동네로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잘 사는 집과 그렇지 못한 집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넓은 평수의 아파트 단지에 작은 평수의 아파트가 낀다고 하면 집값 내려간다며 팔을 저을 테지만 그 땐 그렇지 않았다. 좋은 주택이든 초라한 집이든 서로 어울리며 이웃으로 살아갔다.

보증금 20만 원에 월 3만 원... 우리는 그곳을 '섬'이라 불렀다

대학에 입학한 나는 지낼 곳이 만만치 않았다. 학교 기숙사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우면서 값싼 사글세를 찾다 보니 정릉까지 오게 됐다. 그때 월세 조건이 보증금 20만 원에 월 3만 원이었다. 세월의 흐름을 고려하더라도 초라한 집이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았던 사글세 집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 집은 정릉 호화주택 가운데 위치한 판잣집으로 유명했다. 판잣집을 둘러싼 고급 주택엔 대학교수, 법원 부장판사, 무역회사 사장, 약사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내가 살았던 판잣집은 한 집에 주인 할머니를 포함해 10여 세대가 살았다.

우리는 그 집을 '섬'이라고 불렀다. 호화 주택은 우리가 건너갈 수 없는 바다요, 우리가 사는 집은 그 가운데 갇힌 위태한 섬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내가 '10여' 세대라고 했는데, 사실 아홉 세대인지 아니면 열두 세대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긴 세월 탓도 있겠지만 수시로 이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세대의 사람들은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생일 선물이라며 건넨 지갑... 30년 넘게 간직

먼저 방 하나에 동생을 데리고 살았던 내 또래 이웃. 동생은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해 늘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쉬는 날 형 집에 와서 함께 자고 빨래 등을 해갔다. 그 형은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이곳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 친구가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가 내 또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 부부가 표나게 내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의 생일이라며 나를 그의 집(집이라기보다 방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없이 살아도 이런 게 바로 행복이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한 밥상이었다. 고학하면서 한 끼 식사를 늘 걱정하며 살던 나는 오랜만에 성찬을 먹었다.

이 친구는 그때 가죽 제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탓에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는 배움에 대한 콤플렉스가 대단했다. 그와 가끔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때면 그만의 피해의식을 느끼곤 했다. 생일 밥을 얻어먹을 땐 어떤 종류든 선물을 해야 했지만 그런 게 준비됐을 리 만무했다.

나는 그에게 나이도 같고 하니 오늘부터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했다. 그것이 생일 선물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궁여지책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그는 "정말이냐"고 몹시 기뻐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그와 가깝게 지내게 됐다. 대학생 친구를 두었다고 주위에 자랑한다는 말을 건너 들었다.

그 뒤 그 친구는 내게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나도 생일 밥을 얻어먹었으니 생일 때 그에게 식사라도 대접할 요량으로 날짜를 말해줬다. 어려우면서도 바쁜 생활을 할 때라 그 뒤 나는 까마득히 내 생일을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어색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선물을 내미는 것을 보고 내 생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0년간 간직했던 판잣집 '친구'의 생일 선물
 30년간 간직했던 판잣집 '친구'의 생일 선물
ⓒ 이명재

관련사진보기


고급 가죽 지갑이라고 했다. 가죽도 가죽이지만 직접 수작업으로 꼼꼼히 만든 지갑이니 오래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흔한 디자인이었지만, 질긴 실로 촘촘히 박은 것이 여느 것보다 튼실하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지갑을 재작년까지 들고 다녔다. 30년 넘게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기고 간직한 것이다.

막노동하는 노총각의 설움... 그의 허세가 슬펐다

또 떠오르는 한 사람은 오십이 다 된 노총각이다. 건설 현장 일용직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일을 나가는 날보다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술을 좋아해서 거의 매일 취중낙도(醉中樂道) 상태였다. 노가다를 하다 보면 술자리를 피할 수 없다며 자기 합리화했다. 홀로 사는 노총각의 누추함을 보고 나를 잡도리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런 것을 타산지석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한 번은 그의 방에 놀러 갔던 적이 있다. 어느 겨울, 아마 선거 개표 방송을 보러 가지 않았나 싶다. 그는 흑백 TV 한 대를 신줏단지 모시듯 대하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불을 넣지 않은 방에 이불이 펴져 있는데, 땟국물이 흐르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린내가 나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돼 방에서 베개를 세워두고 그것이 변기라고 소변을 내갈기기 일쑤라고 했다.

동네 시장통 선술집 근처를 지날 때였다. 그 노총각이 술잔을 비우며 호기를 부리고 있었다. 예쁜 부잣집 고명딸과 결혼을 했는데, 자신이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바람에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아이가 있냐고 누군가가 물으니 5년을 살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는 두지 않았다고 했다. 지나면서 그 말을 듣고 그에게서 한없는 슬픔을 느꼈다. 오죽했으면 저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희망 사항을 담아낼까.

늘 취해있던 막노동하던 노총각...그의 허세가 서글펐다.
 늘 취해있던 막노동하던 노총각...그의 허세가 서글펐다.
ⓒ wikipedia

관련사진보기


대학교수라고 뻐기던 그 사람... 정체는?

세 번째는 사글세를 사는 사람 중 형편이 제일 나은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때 40 중반의 나이로 그는 아이 둘과 아내, 이렇게 네 식구를 꾸리고 살았다. 그들은 방 두 칸 쓰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았다. 그의 부인은 수다쟁이로 목소리가 걸걸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아낙이었다. 형편이 좀 낫다는 것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해 같은 지붕 밑에 사는 사람들에겐 눈총을 많이 받았다. 깍쟁이 성격도 눈총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 부부의 방은 내 방과 판자 하나로 맞닿아 있었다. 가끔 심야에 그들 부부에게만 국한돼야 할 야릇한 소리가 벽을 뚫고 내게 전달됐다. 커다란 고역이었다.

네 번째 가족은 좀 특이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마당이 조금 딸린 방에 세를 내고 살았는데, 가내 공장을 경영한다고 했다. 염색 계통의 일이라고 했는데, 어떤 일인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다. 단지 고약한 냄새를 가끔 피워 다른 사람들이 싫어했는데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나는 그렇게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 집엔 나보다 몇 살 아래인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가내 공장 일을 돕다가 대학에 가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대학생인 것을 알고부터 대학 생활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 아는 대로 답해 줬다. 이 아들은 그 뒤 신학 대학에 진학했다며 자랑하고 다녔다. 교회에 다니지도 않은 사람이 신학 대학에 진학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는 어느 대학 교수라던 사람이다. 무슨 사연인지 그는 혼자 살고 있었고, 여동생이라는 인텔리 여성이 가끔 와서 살림을 돕고 있었다. 이들은 한집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별종인 것처럼 행동했다. 먼저 인사할 줄도 모르고 인사를 받아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받는 시늉이었다. 사람들이 "대학교수면 뭐해, 먼저 사람이 되야지"라며 뒤에서 수군댔다. 그에게 강의를 들었다는 한 학생에게 들은 정보로는 그가 전문대학 시간 강사, 그것도 학위와는 관계 없는 현장 실습 담당이라고 했다.

하루만 집세 밀려도 닦달하던 주인 할머니

지금까지 생각나는 대로 내가 대학 다닐 때 살던 사글세 집 풍경을 스케치했다. 끝으로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주인장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나이가 80 가까이 된 분인데 구두쇠 할머니로 널리 소문나 있었다. 아들이 있긴 한데 무슨 사연인지 어머니와 의절하고 지낸다고 했다. 할머니는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글세만 받아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죽는 시늉이었다. 사글세가 하루만 밀려도 할머니의 닦달에 배겨낼 수가 없었다.

이 할머니는 노안으로 눈이 어두워 무슨 편지가 날아오면 다른 사람 다 두고 내게 가져와 무슨 내용인지 글자 그대로 정확하게 읽어 달라고 했다. 나 말고도 한글을 줄줄 읽어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내게 와서 읽어달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학생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할머니는 늦게 서예를 배워 그의 방에 가면 붓글씨 연습한 것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서예라는 것은 넓은 마음의 산물이어서 할머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학교를 오가는 내가 연탄불을 끄지 않고 생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인 할머니와도 판자로 된 벽을 사이에 두고 지냈는데, 역시 그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움을 느끼며 지내야 했다. 가끔 내 방이 뜨거우면 할머니가 자기도 모르게 "아, 뜨거"라는 소리를 냈다. 연탄불을 꺼뜨려 냉방일 땐 "아, 추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별 의심을 하지 않고 우연의 일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들어 가장 춥다고 했던 어느 날, 며칠 방을 비웠다가 돌아오니 할머니가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늙은이 추워서 죽게 생겼다는 것이다. 학생이 연탄불을 꺼뜨려 자기가 얼어 죽게 됐다며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때야 할머니가 이실직고했다. 연탄을 아끼려고 할머니 방 보일러 파이프를 내 방에 연결해 놓았다는 것이다. 할머니 말로는 학생이 쓰는 방은 좁기 때문에 연탄 불이 남아돌 것 같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럼 미리 말이라도 하시든지...

연탄 값이 아까워 내 방의 파이프를 빼다가 방을 데웠던 구두쇠 주인 할머니
 연탄 값이 아까워 내 방의 파이프를 빼다가 방을 데웠던 구두쇠 주인 할머니
ⓒ wikipedia

관련사진보기


온갖 인생사 모인 판잣집...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곳을 거처로 삼아 어렵게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그 뒤 한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피해 다니느라 근 1년 사글셋방을 쓰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매달 내야 하는 사글세 3만 원을 내지 못했으니 구두쇠 할머니가 보증금에서 그것을 다 깠을 것이다.

오랜만에 내 방을 찾아간 날이었다. 세 사는 사람들이 모여 생각지도 않은 데모를 하고 있었다. "갈 데 없는 우리를 여기서 계속 살게 하라"는 페인트 글씨로 현수막을 만들어 벽에 걸어 두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열다섯 명 정도였는데, 적은 숫자의 사람 목소리치곤 그 울림이 컸다. 오랜만에 나타난 나를 반갑게 맞으며 합류하라고 했다.

염색 가공 가내 공업을 하던 신학생 아버지가 내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할머니와 의절하며 지내던 아들이 사업을 부도내 할머니 집까지 은행에 넘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사글세로 사는 세입자들에게 채권자인 은행 측에서 보증금만 받고 나가라고 하는데, 그것 가지고는 이사 갈 곳이 없으니 변두리 집이라도 얻을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는 주장이었다.

그들과 서너 시간을 함께 하다가 나는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그 뒤 나는 '섬'이라고 불렀던 그 집을 찾지 못했다. 전기와 수도 요금 계산할 때 자기는 얼마 쓰지 않는다며 쏙 빼고 계산한 그 구두쇠 주인 할머니, 연탄값을 아끼려고 고학하는 학생 방에 보일러 파이프를 연결해 쓰던 그 할머니는 지금쯤 이 땅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근 3년을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친구를 얻었고, 닮지 말아야 할 '다른 산의 돌'(타신지석)을 얻었다. 구두쇠 주인 할머니의 몰인정 속에서도 없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따뜻한 인정을 되새기기도 했다. 이렇게 젊었던 한때의 사글세 인생을 반추해 보는 나도 벌써 이순(60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지금 내가 넉넉지 않아도 나눔을 생각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마음속에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이런 과거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글입니다.



태그:#사글세, #구두쇠 할머니, #정릉, #세입자 데모
댓글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