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그 배구 국가대표 '3각 편대'...박철우·전광인·송명근(왼쪽부터)

월드리그 배구 국가대표 '3각 편대'...박철우·전광인·송명근(왼쪽부터) ⓒ 대한배구협회


"뭐지? 경기 스코어는 나오고 있는데 왜 TV 중계를 안 하죠?"

지난 1일 오후 10시, 배구팬들이 술렁거렸다.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 E조 조별예선 네덜란드-대한민국 2차전이 열리는 시각이었다.

이날 경기를 생중계한다고 예고했던 방송사(SBS 스포츠) 화면에는 "현지 사정으로 중계가 지연되고 있다"는 자막이 나왔다. 20분 뒤, "현지 방송사의 송출 장비 문제로 중계가 불가능하게 됐다"라는 내용의 자막이 흘러나왔다.

하필 그 순간. 대한민국 남자배구 대표팀은 지난 21년 동안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 한 네달란드를 상대로 초반부터 크게 앞서 나가고 있었다. 이변의 조짐이 엿보였다. 난데없는 방송사고에 당황한 배구팬들은 해외 중계 누리집을 찾느라 분주해졌다.

'생중계 불발' 방송사 "녹화중계라도 하겠다"

결국 대표팀은 네덜란드에 3-1(25-18, 25-23, 20-25, 25-22)로 승리를 거뒀다. 이날 승리로 한국은 무려 21년 만에 월드리그에서 네덜란드를 꺾는 새 역사를 썼다. 1993년 6월 11일 서울 홈에서 3-2로 승리한 이후 21년 만이다. 지금은 정상에서 밀려났지만, 네덜란드도 1996년 월드리그와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로 한때는 세계 최강팀이었다. 그동안 한국은 네덜란드와 월드리그 상대 전적에서 1승 18패로 일방적으로 밀렸다. 하지만 이날 16연패 끝에 두 번째 승리를 따낸 것. 그것도 네덜란드 원정 경기에서 거둔 쾌거였다.

역사적인 경기의 TV 생중계는 불발됐다. 중계를 맡은 SBS 스포츠 담당 PD는 2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현지 방송사에서 중계 화면을 국제신호로 전 세계에 보내주는데, 송출 장비에 문제가 생겨서 외국 방송사들이 모두 중계 화면을 받아볼 수가 없었다"라면서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데, 하필 역사적인 승리 경기를 생중계하지 못 해 우리도 매우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 현지 방송사는 생중계를 했기 때문에 녹화된 테이프를 받아서 다시 중계 편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SBS 스포츠는 오는 5일 오후 4시부터 네덜란드-대한민국 2차전 경기를 녹화 중계할 예정이다.

박철우, '폭격기 본능' 부활하나

1차전에서 네덜란드에 완패를 당한 한국은 이날 경기에선 1세트 초반부터 네덜란드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특히 전날 4득점에 그치며 부진했던 박철우가 라이트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송명근도 블로킹과 서브 득점으로 분위기를 살려나갔다. 결국 한국은 1세트에서 25-18로 네덜란드를 가볍게 제압했다.

2세트에서는 대역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초반 흐름은 1세트와 정반대였다. 전열을 정비한 네덜란드의 거센 반격에 대표팀은 12-18까지 크게 밀렸다. 그러나 한국은 포기하지 않았다.

박철우 대신 들어간 김정환의 공격과 최민호의 블로킹으로 분위기 반전을 이끌어낸 이후 '전광인 쇼타임'이 시작됐다. 전광인은 17-20으로 뒤진 상황에서 어렵게 수비돼 올라온 볼들을 세 번 연속 빠르고 강력한 스파이크로 네달란드 코트에 내리꽂았다. 왜 전광인이 에이스인지를 보여준 순간이었다. 22-22로 동점이 되자 한국의 기세에 당황한 네덜란드는 실수를 연발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2세트의 대역전 드라마는 이날 승리의 분수령이었다.

한국은 네덜란드의 반격에 고전하며 3세트를 내줬다. 이후 4세트에서 박철우가 '대폭발'했다. 전성기 시절의 폭격기를 연상케 하는 활약이었다. 때리는 족족 네덜란트 코트에 꽂히거나 블로킹에 맞고 튕겨 나갔다. 대표팀은 13-11로 앞서기 시작한 이후 점수 차를 계속 벌리면서 승기를 잡았다. 결국 전광인의 강력한 스파이크와 박철우의 끝내기 블로킹으로 4세트도 25-22로 따내며 대미를 장식했다.

주전 6명 풀가동 '토털 배구'... 승리 해법 찾다

한국은 그동안 국제대회 상대 전적에서 네덜란드에 6승 33패로 절대적 열세를 보였다. 한국이 네덜란드에 유독 약한 이유는 높이와 파워 면에서 상극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주전 선수 6명(리베로 제외) 중 5명이 신장 200cm가 넘고, 주전 평균 신장도 202cm가 넘는 세계 최장신 팀이다. 그에 비해 한국 대표팀은 평균 신장은 고사하고 주전 중에 200cm가 넘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주전 평균 신장도 195cm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날 승리는 더 값지다. 단신의 한국이 유럽 장신 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훌륭한 학습을 했기 때문이다. 박철우(26득점)-전광인(16득점)-송명근(13득점)으로 이어지는 공격 3각 편대가 고른 득점력으로 제 역할을 해주고, 중앙 센터진의 적절한 위치 선정과 득점력이 더해지는 '빠르고 정교한 토털 배구'만이 한국 배구가 국제 무대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줬다.

특히 박철우가 양 팀 선수 통틀어 최다인 26득점(공격성공률 69%)을 기록하며 라이트 공격수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사실 지난 5월 27일 진천선수촌을 방문했을 때 한국전력과의 연습경기에서 박철우는 공격 감각과 성공률이 가장 돋보였다. 몸 컨디션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그런 박철우가 1차전에서 상대 블로킹에 번번이 막히며 4득점에 그친 게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전광인과 송명근의 레프트 공격수로서 역할도 훌륭했다. 무릎과 허리에 잔부상이 있어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상태임에도 전광인은 이틀 연속 자기 몫을 충분히 해줬고, 이날도 2세트 대역전극의 주인공이었다. 송명근도 리시브에서 무너지지 않고 13득점으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냈다. 박상하-최민호의 센터진도 고비 때마다 상대 흐름을 차단시켰고, 이민규 세터의 토스도 전날보다 안정적이었다.

오는 5~6일 체코전, 한국 '조 1위' 분수령

물론 한 경기를 잘했다고 무조건 기뻐할 건 아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도 많고, 갈 길도 멀다. 그럼에도 네달란드 원정 1승은 한국 대표팀에게 5개월여의 국제대회 여정에 큰 자신감과 상승 기운을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포함된 월드리그 E조는 현재 4팀이 모두 1승 1패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어느 팀이 E조 1위로 결승라운드 진출 결정전(7월 11일~12일, 호주)에서 오를지 예측하기 어렵다. 한국에겐 오는 5~6일 체코전이 더욱 중요해졌다.

체코는 1승 1패를 주고받은 프로투갈 원정 경기에서 기존 주공격수인 Jan Stokr(32세·205cm)가 빠진 가운데, 레프트 Kamil Baranek(32세·198cm)와 Petr Michalek(26세·190cm), 라이트 Michal Krisko(27세·200cm)가 공격을 주도했다.

네덜란드 원정에서 기대했던 목표를 100% 달성한 한국 대표팀은 곧바로 체코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 오는 5일과 6일 오후 10시 50분(한국 시각) 체코와 월드리그 2연전을 치른다. SBS 스포츠는 이 경기를 위성 생중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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