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갑에 아버지는 여섯 살이었다고 하신다. 회갑 잔칫상을 받으신 할아버지께 술잔을 올릴 차례가 되자 누님 등에 업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아버지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고, 동생을 업은 누님과 어린 아들 대신 딸과 사위의 잔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도 울음을 터뜨리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보통학교 다니는 걸 보고 눈을 감았으면 여한이 없겠다던 할아버지는 다행히 정정하셨고, 그 후 6·25 전쟁이 나자 한 달만 피해있다 오라며 1950년 12월 동구 밖까지 나와 애써 눈물을 감추고 남쪽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해 주셨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 기르느라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아버지 가슴 속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얼마나 깊었을까. 내 나이 중년에 이른 지금도 그 크기와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데, 어려서는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고향 선후배들과 의형제를 잘 맺으셨던 기억이 난다. 약주를 한 잔 하시고는 두 분이 같이 오셔서 우리 삼남매를 나란히 앉혀놓고는 "이제부터는 ○○아저씨가 아니라, 큰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작은아버지라고 해봐라!" 하시며 차례로 소리 내어 불러보게 하셨다.

그 때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억지로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를 만들어 주시는 것이 싫었다. 학교 선배든 애인이든 손 위 남자에게 가리지 않고 '오빠'라 부르는 요즘을 생각하면, 아버지 소원이었는데 그냥 실컷 불러드릴 걸 그랬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 <간큰가족>포스터
ⓒ 두사부필름
영화 <간 큰 가족>의 아버지는 북쪽에 아내와 핏덩이 딸을 남겨두고 떠나온 실향민이다. 이곳에서 다시 결혼을 해 아들 둘을 두었고, 지금은 아내와 아들, 며느리, 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

북쪽에 두고 온 아내와 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다가 죽기 전에 꼭 한 번 그들을 만나보는 것이 소원인 아버지가 갑자기 다쳐 자리에 눕게 되고 그러던 중에 간암 말기임이 밝혀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버지에게는 감춰진 재산 50억이 있고 통일이 되면 상속을, 그렇지 않으면 전액 통일부에 기증한다는 것 아닌가.

이제 어쩔 수 없이 가짜 통일뉴스를 시작으로, 남북 탁구 단일팀 경기에 평양 교예단의 서커스 공연까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온 가족이 나서서 상상도 못할 통일 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웬 걸, 곧 돌아가실 줄 알았던 아버지는 통일의 기쁜 소식에 힘을 얻어 기력을 회복하시고는 통일된 땅, 북한행을 손꼽아 기다리신다. 그러니 간 큰 가족들의 간은 이제 더할 수 없이 쪼그라들고 만다….

앉으나 서나 북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이 눈에 밟혀 견딜 수 없어 하는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이곳의 아내와 아들들은 때로 서운해 하기도 하고 속상해 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꿋꿋하시기만 하다.

직접 만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말하지 않고는 영영 풀리지 않을 그 가슴 속 응어리를 당신 자신도 도저히 어쩌지 못해서일 것이다. 지금 이곳의 가족들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남겨두고 온 식구들을 지켜주지도, 제대로 보살피지도, 품어주지도 못한 한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이어지는 웃음 속에 분단의 상처와 아픔을 담고 있다. 영화 속 아버지의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는 평생 큰 아픔을 안고 살아오신 내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 분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 바탕 소동이 끝나고 영화도 끝났지만, 나는 아버지께 이 영화를 권해드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웃고만 일어나실 수 없을 만큼 아프실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는 강한 함경도 사투리로 가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고향을 잃은 사람[失鄕民]이 아니라 고향을 두고 온 사람이다. 그러기에 나는 고향에 돌아갈 것이다. 기필코 돌아갈 것이다."

83세 고령의 아버지가 이제 고향에 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나는 그래서 코미디 영화를 보며 웃긴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덧붙이는 글 | (간 큰 가족, 2005 / 감독 : 조명남 / 출연 신 구, 감우성, 김수로, 김수미, 성지루 등)

2005-07-06 12:16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간 큰 가족, 2005 / 감독 : 조명남 / 출연 신 구, 감우성, 김수로, 김수미, 성지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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