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딸이자 순종의 이복 동생으로, 흔히 한반도 왕조 시대의 '라스트 프린세스(마지막 왕녀)'로 알려진 인물이다.

황실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망국의 아픔과 불행한 개인사까지, 누구보다 기구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다. 극적인 삶을 살았던 만큼 그녀의 인생은 책과 영화 등을 통하여 대중문화의 소재로 활용되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여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했다.
 
6월 2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는 왜 일본 정신병원에서 발견됐나'편을 통하여 덕혜옹주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의 덕수궁 복녕당에서 조선 26대왕이자 대한민국 초대황제 고종과 후궁인 귀인 양씨 사이에서 고명딸로 태어났다. 당시 61세의 고종은 환갑이 넘어 얻은 늦둥이 첫 딸의 탄생에 매우 기뻐했다. 덕혜옹주는 자라나면서 아버지 고종을 똑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당시 고종은 일본에 의하여 아내 명성황후를 잃었고, 아들 영친왕은 인질로 끌려갔으며, 결국 왕위마저 아들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하고 나라까지 빼앗기는 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덕혜옹주의 탄생은, 고종에게는 삶의 낙을 찾게 해주는 한 줄기 빛과 같았을 것이다.
 
고종은 엄청난 딸바보이자 극성아빠였다. 불과 생후 50일 만에 덕혜옹주를 자신의 침전인 함녕전으로 데려와 키우게 했는데, 조선 건국 이래 왕의 거처에서 살았던 인물은 덕혜옹주가 유일하다.

또한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은 어느날 함녕전에서 덕혜옹주를 재우던 중 고종이 갑자기 들어오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려고 했으나, 고종은 '아이를 깨우면 안 되니 그냥 누워있어라'고 만류했다는 일화도 있다. 신분고하가 가장 철저한 궁궐에서 '일개 궁인이 감히 군주 앞에서 드러눕는 게 허용된 것은 변씨 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고종은 덕혜옹주가 5세가 되었을 때, 덕수궁 준명당에 덕혜옹주만을 위한 최초의 왕실 유치원까지 설립했고, 지체 높은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근대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고종 부녀의 거처인 함녕전에서 준명당까지의 거리는 고작 150미터에 불과했지만, 고종은 왕인 본인도 사용하지 않던 가마를 이용하여 어린 딸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덕혜옹주에 대한 아버지 고종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황실의 금지옥엽으로 모든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의 덕혜옹주는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명랑한 소녀로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해줄 것만 같았던 아버지 고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호적 등록이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고 모든 권력을 잃은 고종은 친딸을 왕실족보에 올리는 것조차 일제의 허락이 필요했다. 일본은 생모 양귀인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핑계로 덕혜옹주의 입적을 거부해왔다. 고종은 왕실후손을 경계하던 일제에게 덕혜옹주가 자신의 딸로 인정받지 못할 경우, 언제든 위협을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에게 "내 노후의 쓸쓸함을 달래주는 것은 오직 이 아이 하나"라며 간곡히 호소했다. 직접 덕혜옹주를 본 데라우치는 "귀엽고 천진한 옹주를 보고 있자니 까다로운 핑계를 대지 못하겠다"며 결국 고종의 부탁을 수락했고, 덕혜옹주는 간신히 왕실족보에 입적할 수 있었다. 당시만해도 이름도 없이 그저 '복녕당 아기씨'로만 불리우던 그녀는 6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덕혜옹주라는 정식 이름과 함께 왕실 후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일제는 당시 조선의 왕공족들을 일본 천황 가문과 혼인시켜서 완전히 흡수하려는 계획을 진행중이었다. 덕혜옹주 역시 그렇게 될까 두려웠던 고종은,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우리 나라 사람과 혼인을 맺어주기 위하여 은밀하게 계획을 서둘렀다. 그렇게 덕혜옹주의 약혼자가 된 인물이 고종의 최측근인 비서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이었다. 하지만 고종의 계획을 눈치챈 일제가 김황진의 입궁을 금지시키며 혼약은 무산되고 말았다. 고종은 사랑하는 딸마저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부모 잃은 뒤 바뀌는 덕혜옹주의 삶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1919년 1월 21일, 8살이 된 덕혜옹주의 운명을 180도 바꾸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아버지 고종이 돌연 승하한 것. 일제는 고종의 사인이 심장마비 혹은 뇌출혈이라고 밝혔지만 세간에서는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당시 고종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밀사 파견을 통하여 물밑에서 일제에 저항하고 있었다. 일제는 고종이 사망하자 총독부 주관으로 장례식마저 일본식으로 진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고종의 죽음에서 비롯된 항일여론은 들불처렴 번져나가며 3.1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아버지를 잃은 덕혜옹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 일제는 덕혜옹주를 일본 소학교에 입학시켜 기모노를 입고 언어-역사-문화에 걸쳐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게 했다. 조선 왕실의 후손인 덕혜옹주를 완전한 일본인으로 키우는 동시에, 조선이 자신들의 지배력 안에 있음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
 
그럼에도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덕혜옹주의 학교생활 및 일거수일투족이 매일같이 보도가 될 만큼 뜨거운 관심과 화제를 모았다. 이는 고종의 승하 이후 홀로된 덕혜옹주에 대한 동정여론과 함께 황족의 일원이었던 그녀를 고종의 뒤를 잇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부각시키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덕혜옹주가 14세가 되던 1925년, 일제는 덕혜옹주를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강제 유학시킬 것을 결정한다. 덕혜옹주의 존재감이 커지는 데 위협을 느낀 일제가 아예 그녀를 조선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꼼수였다. 도쿄에는 덕혜옹주보다 먼저 자리잡고있던 이복오빠 영친왕과 그의 일본인 아내 이방자(마사코) 여사가 있었고, 덕혜옹주는 오빠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된다.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귀족과 부잣집 자제들이 다니던 도쿄 여자학습원으로 편입된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낯선 타지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어린 시절의 명랑했던 모습을 잃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소마 유키카라는 인물의 회고록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을 하지 않고 놀이를 권해도 교실에 앉아만 계셨다'고 한다. 또한 덕혜옹주는 학교에 항상 보온병을 챙겨다니며 집밖에서는 물 한 잔도 함부로 마시지 않았는데, 이는 아버지 고종의 독살 트라우마로 인한 어머니 양귀인의 간곡한 당부 때문이었다.
 
1929년 6월, 덕혜옹주는 일시적으로 조선에 귀국한다. 바로 어머니 양귀인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 때문이었다. <동아일보>에서는 검은색 양장차림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우울한 모습으로 귀국한 덕혜옹주의 사진을 보도했다.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유해 앞에서 애통함을 감추지 못하여 눈물을 쏟아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제는 1926년 조선 왕공족들에 대한 왕공가궤범을 제정하고 황족-귀족이 아닌 친족의 초상에서는 상복을 입지 못하게 했다. 양씨의 신분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생모를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장례식에서도 상복조차 입을 수 없었던 덕혜옹주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덕혜옹주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갔다. 덕혜옹주는 온종이 방 밖에서 나오지 않고 식사조차도 거부했다. 올케 이방자의 회고록에는 이 무렵부터 덕혜옹주가 몽유병자처럼 한밤중에 밖으로 나가 정원을 걸어다니는가하면, 눈앞에서 사람이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는 등,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의사는 덕혜옹주의 상태를 진찰한 뒤 놀랍게도 '조발성 치매증(오늘날의 조현병/ 환청과 환각, 피해망상 증상)'이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렸다. 억압과 감시에 시달려야했던 타국 생활의 스트레스, 부모의 연이은 비보는 19세의 덕혜옹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비극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일제는 이번엔 덕혜옹주에게 일본인과의 정략결혼을 강요한다. 일제가 덕혜옹주의 남편감으로 낙점한 것은 일본의 명문가 귀족인 소 다케유키라는 인물이었다. 덕혜옹주가 일본인과 결혼하게 되면 일본 귀족가문의 일원으로 편입되고, '대한제국 황녀로서의 상징적 권위'는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의도한 계략이었다.

영친왕 부부의 보살핌으로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던 덕혜옹주에게는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이방자는 회고록에서 '옹주가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듣자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다'고 회상했다.
 
다시 악화된 덕혜옹주의 조현병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결국 덕혜옹주는 24세가 되던 해에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게 된다. 당시 조선의 신문사들은 덕혜옹주의 결혼 소식을 보도하면서 일본인 남편의 사진은 일부러 삭제하고 오직 덕혜옹주의 모습만을 보도했다. 일제의 강제 정략결혼에 대한 조선인들의 분노 어린 여론을 대변하는 반응이었다.
 
결혼 이후로 덕혜옹주의 소식은 오랫동안 국내에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아내가 남편의 성씨를 따라 바꾸게 된다. 조선에서는 대한제국의 황녀이던 덕혜옹주가 일본인과 혼인하며 일본인 성씨로 개명하게 된 현실을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덕혜옹주는 조선에서도 잊혀지며 대한제국 황녀로서의 정체성을 부정 당하고 오직 일본의 백작부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 정략결혼이었음에도 덕혜옹주와 일본인 남편 간의 사이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덕혜옹주는 결혼 1년 만에 딸 정혜(마사에)를 출산하며 엄마가 됐다.
 
그런데 겉보기에 평온을 찾아가는 듯했던 덕혜옹주 가족에게 또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어느날 대마도를 방문했던 덕혜옹주 부부에게, 남편의 지인들이 인사를 청했으나 덕혜옹주가 아무 반응도 없이 가만히 서 있더니 돌연 미친 듯이 소리내어 웃기를 거듭했다고 한다. 목격자인 히라야마 타메타로의 일기에 따르면 "정말 병적인 거동이었다"고 기록할 만큼 옹주의 갑작스러운 기행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다시 악화된 것이다.
 
당시는 정신의학이 지금만큼 전문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여 치료방법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또한 정신질환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의식 수준도 낮아서 정신병 환자를 부끄러운 치부 정도로 취급하고 감추기 일쑤였다. 마음을 의지할 곳도 없었던 일본에서 덕혜옹주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는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은 마침내 독립에 성공했지만, 정작 덕혜옹주에게는 또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패전으로 일본의 귀족제도가 폐지되면서 귀족들은 작위를 박탈 당하고 막대한 재산세까지 내야 했다. 소 다케유키의 가문 역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덕혜옹주 역시 남편의 몰락과 함께 세상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덕혜옹주가 사라진 지 4년 뒤인 1950년, 서울신문사 기자였던 김을한은 덕혜옹주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하여 일본 도쿄에 방문한다. 그는 어린 시절 덕혜옹주와 혼담이 있었던 김장한의 형이었고, 가문간의 인연으로 인하여 행방이 묘연해진 덕혜옹주를 찾아나선 것.
 
놀랍게도 김을한이 덕혜옹주를 발견한 곳은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이었다. 남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상태가 악화되고 경제적 곤궁으로 인하여 간병인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그아내를 정신병원으로 보낸 것이다. 병원비는 남편 소와 오빠 영친왕이 감당해주고 있었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녀로 만인의 사랑을 받던 덕혜옹주의 비참하고 쓸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은 김을한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녀를 고국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대한제국 왕족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일종의 구심점이 되어 정부를 위협할 존재가 될 수있다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건국된 지 얼마되지 않은 데다 6.25 전쟁까지 발발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황족들의 문제까지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조국에서도 외면 받은 덕혜옹주는 그 이후로도 오랜 세월을 일본의 정신병원에서 계속 보내야 했다.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은 와중에도 덕혜옹주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55년경, 덕혜옹주는 남편 소 다케유키로부터 별거 10여 년 만에 결국 이혼을 당했다. 이는 덕혜옹주를 대신하여 오빠 영친왕과 소 다케유키 간의 합의에 의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듬해에는 덕혜옹주의 유일한 자녀였던 딸 마사에가 돌연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사에의 행적은 이후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오랜 세월은 흐른 뒤 시신없는 사망으로 처리됐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1962년 1월 26일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들어선 한 중년의 여인에게 카메라 플레시가 쏟아지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바로 덕혜옹주가 무려 37년 만에 고국 땅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부정적이었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고심끝에 덕혜옹주의 귀국을 전격 수용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하여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력해온 인물이 김을한이었다. 그는 "황족들은 일본에 제발로 간 게 아니라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이들을 방치하는 건 우리의 책임"이라며 정부를 간곡히 설득했다. 그렇게 14세에 강제로 일본으로 떠나야했던 소녀는 어느덧 51세의 지천명이 되어서야 정든 고국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덕혜옹주가 귀국하던 날, 돌연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린 한 여인이 있었다. 바로 어린 시절 궁궐에서 덕혜옹주를 돌봤던 유모 변복동씨였다. 당시 72세의 고령에도 살아있었던 변씨는 긴 세월을 지나 다시 만난 덕혜옹주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변씨는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함없이 덕혜옹주의 곁을 지켰다.
 
귀국한 덕혜옹주는 정부 측의 배려로 창덕궁에서 여생을 지내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27년이 지난 1989년, 덕혜옹주는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서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세워졌다. 부녀는 세상을 떠난 후에야 오롯이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됐다.
 
덕혜옹주의 삶이 주목을 받고 그 행적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면서 과도한 미화와 폄하가 모두 공존하는 게 사실이다. 덕혜옹주는 독립운동가나 지식들처럼 시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일파처럼 시대에 영합하고 부귀영화만 추구했던 인물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녀는 오히려 대한제국의 황녀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민감한 정치적 위치 때문에 감시 당하고 이용 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힘없는 망국의 황족이자 여성이라는 환경적 한계 속에서 그녀가 평생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전무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에서 겉으로 황족-귀족 대우를 받으며 평안을 누린 듯 보여도 정작 덕혜옹주에게 그런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결국은 그녀 역시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에 원치 않게 휩쓸려야 했던 수많은 희생양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벌거벗은한국사 덕혜옹주 일제강점기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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