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4 12:01최종 업데이트 23.02.0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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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6일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일본대사가 일본 <다이아몬드 온라인>에 기고한 글. ⓒ 다이아몬드 온라인


대한제국과 일본의 군사협력은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연결되고 1910년 국권침탈로 귀결됐다. 오늘날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대에도 러시아가 개입된 전쟁이 한일 안보협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북한과 중국의 군사적 압력이 지금의 한일 군사협력을 추동하는 핵심 요소이지만,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세계적 긴장 고조도 여기에 한몫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다>라는 혐한 서적의 저자인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일본대사가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틀 뒤에 쓴 글에는 이 전쟁과 한일 안보협력을 연결시키는 일본인들의 시선이 묻어 있다.


다이아몬드 출판사가 운영하는 <다이아몬드 온라인>에 작년 2월 26일 실린 그 글의 제목은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위험한 공통점, 지정학적 취약성을 전 주한대사가 해설'이다.

여기서 무토 전 대사는 우크라이나전쟁이 한국과 일본에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면서 "5월에 한국에서 탄생하는 신정권으로서는 문 정권에 의해 취약해진 국방체제를 재검토하고 한국의 지정학적 입지를 다시 검토해 일·미·한 협력체제를 강화하고 싶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1904년에 일본이 일으킨 러일전쟁은 우크라이나전쟁보다 훨씬 더 한일 군사협력을 추동했다. 그해 2월 6일 선전포고하고 이틀 뒤 개전한 일본은 그달 23일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이 의정서 제4조는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할 수 있다"라며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가 행동하기에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한다고 한 뒤 일본이 한국인들의 토지를 수용해 군사전략적 거점을 만들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로 인한 토지수용 때문에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지금의 서울 용산에 거주했던 서민층이다.

한일의정서로 본격화된 군사협력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에 의한 외교권 상실로 이어지고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에 의한 군대 해산으로 연결됐다. 한일 안보협력이 결국 한국군 해산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정미칠적, 경술국적
 

1877년 촬영된 수신사 수행원 시절의 고영희 ⓒ 국립중앙박물관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친일파들 속에, 주일공사를 두 차례 역임한 고영희가 있었다. 한일신협약을 체결시킨 주역이라 하여 이완용·송병준·조중응·이병무·이재곤·임선준와 함께 정미칠적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고영희는 정미칠적에 더해 경술국적으로도 지칭된다. 1910년 국권침탈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종의 전임자인 철종이 즉위한 해인 1849년에 출생한 고영희는 일본어에 소질이 있었다. 18세 때인 1867년에 역과시험 왜학에 급제했고, 27세 때인 1876년에 수신사 김기수 일행의 통역이 되어 일본을 시찰했다. 그 뒤 군수나 현감 같은 관직도 역임했지만, 그는 주로 일본과 관련된 사무를 취급했다.

그의 관료 생활이 한 단계 도약한 해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동학혁명 진압전쟁을 일으킨 이듬해인 1895년이다. 청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확정하는 시모노세키조약(마관조약)이 체결된 지 8일 뒤인 그해 4월 25일(음력 4월 1일), 그는 46세 나이로 차관급인 학부 협판이 됐다. 그리고 그해에 주일특명전권공사가 됐다. 이 직책은 1903년에도 다시 맡게 된다.

1895년에 협판이 된 뒤로 그는 장관 직무대리인 대신 서리를 겸하는 일이 많았다. 일례로, 1896년에는 농상공부협판이 되어 농상공부대신 직무대리를 수행하고, 1898년에는 재정기획부 차관급인 탁지부협판이 되어 탁지부대신 직무대리를 수행했다. 조선을 장악하고 청나라를 꺾은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속에서 그가 '장관급 차관'으로 격상됐던 것이다.

고영희가 대신 지위에 오른 것은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이다. 58세 때인 그해 2월에 장훈학교를 설립하고 4월에 교장이 된 그는 5월에 이완용 내각에서 탁지부대신으로 기용됐다. 을사늑약 당시에는 차관급이라 을사오적에 낄 수 없었던 그는 장관급이 된 그해 7월에 결정적 한 방을 날리게 됐다. 1904년부터 진행된 한일 군사협력이 한국 군대 해산으로 귀결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1907년 7월 18일 고종황제가 일본과 친일파들의 압력을 받아 퇴위조서를 발표하고, 다음날 순종황제가 즉위했다. 24일에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말일에는 군대가 해산됐다. 한일신협약은 대한제국 국정과 인사권에 대한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의 권한을 확대시켰고, 이 협약의 부속 각서는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규정했다.

군대 해산 과정에서 고영희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당시의 기사가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에 인용된 1907년 9월 12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다.
 
"탁지대신 고영희 씨는 경리원경으로 전임을 한다 하니, 고씨가 칠적 대신 중에 참여하야 세상 없는 큰 공을 이룬 고로 대신 지위를 영구히 지탱할 줄로 알았더니 홀디에 홀로 먼저 체임이 되면 이는 진소위 새를 잡은 후에는 활을 감추는 격이로고."
 
세상없는 큰 공을 세운 고영희만 홀연히 홀로 해임되면 그야말로 새 잡은 뒤에 활을 치우는 격이 된다며 고영희를 비웃는 기사다. 토사구팽의 '구'처럼 '일제의 활'이 되어 고종 퇴위와 한일신협약 및 군대 해산을 성사시킨 그의 역할을 반영하는 기사다.

친일 재산 축적 기회
 

<조선귀족열전>에 실린 고영희 ⓒ 위키미디어 공용


<대한매일신보>는 그가 일시적으로 위축된 일을 조롱했지만, 그 뒤 그는 자신에 대한 일본의 신임을 확인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고영희 편은 1907년 10월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고종의 강제 양위와 정미조약 체결에서 보여준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라고 설명한다.

1908년에 법부대신이 되고 1909년에 탁지부대신이 된 그는 그해 10·26 사태로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된 일을 계기로 이른바 합방론이 급물살을 타게 되자 일본을 향한 충성 경쟁에 뛰어들었다. 송병준과 이용구(일진회)가 한국 강점 방법론을 경쟁적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그는 이완용과 함께 거기에 가담했다.

위 사전은 1909년 11월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같은 달 말에는 일진회가 성명서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자, 이완용의 지시로 오사카조폐국 시찰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해 수상 가쓰라 타로를 만나 '합병안 5개 조항'을 제출했으나 거절당했다"라고 설명한다. 일본의 한국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묵인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인 가쓰라 총리를 만나 '이렇게 합병해주세요'라고 제안했다가 거절을 당했던 것이다.

이완용과 고영희가 제시한 강점 방안은 한국 황제의 지위를 존속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국가연합 형식을 담은 것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한국 침략 의도를 실제보다 낮게 점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퇴짜를 맞은 것이다.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고영희에 대한 일본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1910년에 또다시 실적을 내어 경술국적의 '영예'를 안은 그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이 되고 자작 작위까지 받았다.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1913년에는 메이지 일왕(천황)으로도 불리는 무쓰히토 일왕 1주기 추도식에 조선귀족대표로 참석했다. 1915년에는 요시히토(다이쇼) 일왕의 즉위기념 대례장도 받았다.

그는 '새 잡는 활'이 되어 일본제국에 충성을 다했다. 일제가 고종황제를 '명중'하고 한국 군대를 명중할 때, 그는 일제의 손아귀에 들린 활이었다. 그런 그를 위해 일제는 생활 기반을 튼튼히 해주었다. 친일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일제는 1910년부터 그에게 중추원 고문 수당으로 연봉 1600원을 지급했다. 월급 133원에 해당하는 이 수당은 1916년 사망 때까지 지급됐다.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가 약국 직원으로 근무할 때인 1917년에 받은 월급은 숙식 제공에 기본급 10원이었다. 고영희가 이봉창 같은 한국인들을 일본에 팔아넘긴 대가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취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은 1911년에는 은사공채 11만 원을 그에게 지급했다. 이봉창 같은 일반 대중들이 자신의 소득과 고영희의 소득을 더 이상 비교할 필요조차 없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고영희의 자작 지위는 1916년 3월 장남 고희경에게 세습됐다. 친일 아버지가 축적한 재산이 대를 이어 계승될 수 있도록 일본이 배려했던 것이다. 한일 군사협력이 한국 군대 해산으로 이어지게 만들고 이 안보협력의 결말을 잘 보여준 고영희를 일본은 그렇게 챙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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