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7 11:47최종 업데이트 23.01.2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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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대표가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을 진단한다' 토론회에서 발제하고 있다. ⓒ 남소연


지난 12일에 이어 26일에도 일제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외교부가 주관한 12일 공개토론회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에 관여하는 박철희 서울대 교수가 사회를 보고,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과 심규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이 발제를 했다.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임재성 변호사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질의응답 시간에 토론자로 나섰지만, 두 사람은 '5분 정도로 끝내라'는 주문으로 인해 발언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들은 피해자 입장을 대변하므로 서민정·심규선 두 사람과 함께 발제자로 선정되어야 했는데도, 발제자가 아닌 토론자가 된 것은 물론이고 10분 가까이 사용한 다른 토론자들보다도 훨씬 더 시간 제약을 받았다.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이 토론회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정부가 답을 정해놓고 주최하는 행사에 들러리로 설 수 없다는 이유였다. 토론회가 임박한 시점까지도 정부가 토론자 명단과 발제자 발표문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도 또 다른 이유였다.

김홍걸 국회의원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이 주관한 26일 토론회는 정반대 양상을 띠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사회를 보고 임재성 변호사와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대표 등이 발표자로 나섰다. 임재성 변호사는 '정부안의 절차적 문제점'이라는 제목으로, 이국언 대표는 '피해자 입장에서 본 정부안 문제점'이라는 제목으로 참여했다.

12일 토론회에 불참하거나 제대로 발언하지 못한 측이 26일 토론회를 주도하고, 12일 토론회에서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정부 방안의 문제점이 26일 토론회 때 부각됐다.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 별도의 토론회가 열려야 하는 이 상황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 및 전범기업보다는 윤 정부와 더 많이 대립해야 하는 구도의 산물이다. 피해자들이 일본과의 본선보다 한국 정부와의 예선에서 힘을 소진하게 만드는 구도가 이런 현실을 낳고 있다. 

윤 정부가 피해자 대신 엉뚱한 쪽을 대변하는 현실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일본 기업의 채무를 인수해 피해자에게 지급한다'는 정부 방침에서도 나타난다. 행정안전부 산하 재단이 채무인수를 통해 대위변제하는 구도는 윤 정부가 어느 쪽에 이익을 주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제3자인 재단이 채무자의 책임을 인수해 채권자에게 지급하는 것이 채권자인 징용 피해자들에게 반드시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채권자가 제3자의 변제에 동의하면 모르겠지만, "채무자한테 받아야 한이 풀리겠다"는 채권자에게는 이런 방식이 만족스러울 수 없다. 돈을 받는 것뿐 아니라 한을 푸는 것도 이익의 범주에 포함되므로, 제3자가 채권자를 거스르면서까지 개입하게 되면 채권자의 이익이 침해될 수밖에 없다.

반면, 미쓰비시나 일본제철처럼 채무 지급을 거부해온 채무자에게는 제3자의 인수가 손해가 될 여지가 별로 없다. 재단의 채무인수를 일본 정부가 환영하는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 방식은 채권자보다는 채무자에게 훨씬 이익이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세금으로 일본의 전범기업을 돕는 이 구도는 '피해자·한국정부 대 전범기업·일본정부'가 아닌 '피해자 대 전범기업·한일정부'가 돼 있는 모순된 현실에서 생겨났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내각은 재단이 훗날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할 여지를 없애고자 '구상권도 포기하라'는 메시지를 언론에 흘리고 있다. 자국은 책임질 일이 없다며 피해자들을 외면해왔으므로 구상권에도 신경 쓰면 안 되는 일본 정부가 윤 정부를 상대로 '확실한 마무리'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역사를 왜곡하는 일
 

서민정 외교부 아태국장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해 그간 국내 의견 수렴 및 대일 협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 유성호


한국 정부가 재단을 앞세우는 지금 상황은 대한민국 실정법까지 뒤틀리게 만들고 있다. 재단 설립의 근거 법령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살펴보면, 재단이 전범기업 책임을 인수하는 것이 이 법률에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강제동원조사법으로 약칭되는 이 법은 입법 취지를 설명하는 제1조에서 "국가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원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천명한다. 피해자 측을 지원하는 것이 법의 제정 취지임을 명시한 것이다. 그런 뒤 제37조에서 재단 설립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했다.

재단은 이 법에 의해 설립됐으므로 법 제1조에서 벗어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희생자와 유족 등'을 돕는 활동뿐이다. 가해자인 전범기업의 채무를 인수해 '가해자의 불편을 치유하고 한일 현안 봉합에 기여하는 일'은 법의 허용 범위를 벗어난다.

법 제1조에 따르면, 재단은 "위로금 등을 지원"하는 활동밖에 할 수 없다. 불법행위 피해 발생에 따른 배상금 지급은 활동 범위 밖에 있다. 이를 의식해 재단이 지난 12월 21일 "피해보상 및 변제"를 활동 범위에 추가하는 정관 변경을 의결하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이달 9일에 정관변경을 승인했지만, 강제동원조사법을 바꾸지 않는 한 이런 정관 변경이 근거 법령과 조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범기업의 편의를 봐주는 행위 자체가 법 제1조와 충돌한다. 피해자를 위한 법률에 근거해 설립된 재단이 가해자들의 불법행위책임을 떠안고 그들의 판결금과 소송비를 대납해주는 것이 법에 맞는 일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는 강제동원조사법을 개정하거나 대체 법률을 제정하지 못하고 재단 정관의 변경을 통해 전범기업에 혜택을 주고자 시도하고 있다. 여소야대로 인해 법률을 제·개정하지 못하고 대통령령이나 부령 같은 시행령을 제·개정해 상위 법률을 무력화시키는 윤석열 정부의 시행령 통치가 이런 데까지 응용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민간 재단도 아니고 정부 재단이 외국의 전쟁범죄책임을 떠안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침략전쟁의 가해자 측과 연루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또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대표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전범책임을 떠넘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윤석열 정부가 피해자 편에 서지 않아 '피해자 대 전범기업·한일정부' 구도가 부각됐다. 피해자들이 힘을 쓰기 힘든 이 구도로 인해 12일 정부 토론회 때 피해자 측은 발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26일에 별도의 토론회가 열려야 했다.

한국 피해자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 상황은 굴욕적인 1965년 한일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의 재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불리한 조건에 놓인 피해자 측을 우리 국민들이 응원하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 조성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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