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7 04:56최종 업데이트 22.11.07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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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서 참사가 발생하고 경찰이 바로 이틀 뒤에 작성한 '정책 참고자료'가 얼마 전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주기적으로 작성되고 제출되던 자료였다면 참사 직후라고 해도 만들어서 안 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제는 내용이다. 참사 수습에 만전을 기해도 모자랄 시간에 정부 부담 요인을 우려하는 건 매우 부적절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된 건 시민사회 단체들의 동향을 살핀 부분이었다. 사실 동향을 살핀 것도 아니고 몰래 탐문 조사라도 한 것처럼 관련 내용이 작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더욱 당혹스러운 점은 그 내용조차도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관련기사: '경찰청 문건'에, 시민단체 "접촉한 것처럼 거짓보고서 작성" http://omn.kr/21g18).
 

경찰청이 이태원 압사 참사 발생 이틀 뒤인 지난 10월 31일 주요 시민단체의 동향과 언론 보도 추이 등의 정보를 수집·분석한 '경찰청 정책 참고 자료' 내부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문건은 특별취급으로 분류돼 대통령실 등 상급 관계기관에 배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 SBS 뉴스

 
공개된 '정책 참고자료'에는 진보성향 단체가 이태원 참사를 정권 퇴진운동으로까지 끌고 갈 대형 이슈로 보고 있으며 긴급회의 등 대응 계획을 논의 중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지난 3일 여론동향 문건 관련 입장 발표에 참한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은 자료에 담긴 내용은 허위 날조이며 누구도 문건에 등장한 일정을 진행한 적이 없다고 못 박았다.

특히 해당 문건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이번 참사를 여가부 폐지 등 정부의 반 여성 정책 비판에 활용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단체는 입장문을 통해 그런 내용을 검토한 적도 없고 경찰과 접촉한 사실도 없다고 밝혔다.

믿지 않은 이유

사실 보도를 접한 순간부터 문건에 담긴 내용에 일말의 신뢰도 가지 않았다.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 활동가 중 그 누구도 인명을 앗아간 사회적 참사를 놓고 저런 식의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그렇다.


물론 이번 참사를 이유로 여성단체가 대정부 투쟁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정부에 져야 할 책임을 묻는 방식일 테지 주장하던 의제를 위해 희생자를 단순히 '활용'하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사고는 활동가들의 것이라고 보기에 지나치게 조잡하다. 특정 사건을 여성운동의 의제로 만들고자 한다면 활동가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태의 원인이 성차별적 문화나 성평등 제도 미비인지를 살피는 식이다. 활동가들은 이 일을 아주 치열하게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이 4일 오전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지난달 31일 이후 닷새 연속으로 조문하고 있다. ⓒ 유성호

 
그런데 단지 참사의 희생자 중 여성이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반 여성 정책 비판에 활용할 것이라고? 이건 여성운동 활동가의 전문성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비윤리성이나 조잡함 외에도 문건의 내용이 사실이 아닐뿐더러 심지어 시민단체를 적대시 하는 이가 썼으리라 짐작이 가는 점이 또 있다. '활용'이라는 단어다. 문건을 작성한 사람이 평소에 여성단체가 피해와 희생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니까 쓸 수 있는 단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단체의 목표는 피해와 희생을 막고 원인이 되는 차별과 멸시를 없애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 무슨 목표가 있겠는가. 피해자나 희생자를 이용한다는 발상은 시민운동으로 인해  자신의 권력이 위협 받는다고 느낄 기득권자나 할 만한 것이다.

약자 멸시가 횡행하는 사회

이처럼 문건에 담긴 시민단체 관련 내용은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그와 별개로 저걸 정말로 믿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그런 면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발 빠른 대응은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멸시의 정서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이 자신의 권리와 평등을 주장할 때 드러나는 반감이 매우 크다. 가령 청소 노동을 질 낮은 일로 취급하고 하찮게 치부하는 정서는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청소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 시위를 '소음 공해'라 비난하고 아예 재학생이 나서서 고소까지 하는 유례 없을 일이 발생했다. 특히나 재학생과 청소 노동자들이 서로의 투쟁에 연대했던 지난 역사를 기억하면 놀랍고도 씁쓸한 순간이었다(관련기사: "학생들 청소노동자 고발, 부끄럽다"...수업계획서로 일침 놓은 연대 교수 http://omn.kr/1zm5c).

어떤 사람들은 약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무기처럼 휘두른다고 말한다. 소수자인 것이 도덕적 우월을 담보하듯 굴고 무엇이든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줄 안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현상은 피해나 약자성의 경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약자들이 일으킨 소란으로 자신들이 더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거나 아예 가짜뉴스를 퍼트려 상대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식이다.

이런 흐름 때문에 가장 많은 고통을 받았던 대표적인 집단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었다. 유가족이면 다냐는 말부터 언제까지 슬픔을 강요할 것이냐는 날 선 반응까지. 특히 보상과 관련해 하지도 않은 요구를 했다거나 받지도 않은 걸 받았다는 가짜뉴스는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을 괴롭히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사고 유가족들이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마련된 추모 장소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권우성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

물론 당시의 상황이 국가 기관까지 동원된 여론 조작과 허위사실 유포의 결과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유일한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들에 동조하고 자극받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피해자에 대한 악의적인 주장과 가짜뉴스가 떠돌아도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을 잃은 사람,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 차별 받는 소수자 등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며 적어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무너졌다. 많은 사람이 그런 합의를 이제는 '특권'이라고 부른다. 약자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권력처럼 둔갑한 것이다. 그러니 무너질 수밖에.

시민사회 단체, 특히 여성단체에 대한 어이없는 허위사실이 마치 실제 탐문조사의 결과처럼 돌아다니다 유출된 이번 사건은 어쩌면 해프닝처럼 끝날지도 모른다. 누가 왜 그런 문건을 작성했는지 책임이야 끈질기게 묻겠지만 지금의 파장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허위사실에 속고 시민단체를 비난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려운 이유는 해당 문건 속에 사회가 약자를 고립시키고 비난 받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인식이 노골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지금 집권한 정치 세력은 이미 이전에 같은 방식으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 했던 바가 있다.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결국 남은 답은 하나다. 참사 이후 남겨진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듣고 존중할 것. 악의적인 비난과 멸시 특히 유가족을 특권층처럼 취급하는 프레임을 거부할 것.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무너진 최소한의 선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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