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18 05:24최종 업데이트 22.08.18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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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3주기입니다. 한국 사회 전반에 남긴 김 전 대통령의 발자국은 명징합니다. 13주기를 맞아 정치권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정책, 국정관리 능력을 재평가해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사회적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한 정치 양극화 시대, 여야 정치권이 김대중의 유산에서 배울점을 찾자는 겁니다. <오마이뉴스>는 각 분야별로 다섯 차례에 걸쳐 김 전 대통령이 남긴 정치적·정책적 유산을 재조명하는 전문가 기고를 싣습니다. 그 두 번째는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이자 평화네트워크 대표의 글입니다. [편집자말]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손을 맞잡은 모습. ⓒ 연합뉴스

 
한반도 안팎의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오늘날, 13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난 지도자를 떠올려 본다.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그의 업적은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진영 논리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도 든다. 더 늦기 전에 색안경을 벗고 진영 논리를 초월해 그의 공과에 대해서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때다. 갈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한국 외교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는 '두 개의 코리아'가 한국전쟁 이래 최악의 위기로 치달은 상황에서 출범했다. 휴전선 너머에 있는 북한의 붕괴는 시간문제로 간주됐고, 남한은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에 직면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들 위기를 분리해서 보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가 필수라고 여겼다.


흡수통일을 배제해 북한을 안심시키고 북한의 무력사용을 불용해 국방을 튼튼히 하며 화해협력을 추진해 북한의 점진적인 변화를 도모하겠다는 대북정책은 그의 오랜 신념과 더불어 IMF 국난 극복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IMF 조기 졸업과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경제위기와 안보위기가 맞물리고 있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혹자는 그때 한국이 북한의 붕괴를 촉진해 흡수통일을 달성했다면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 가지 반문형 질문을 던져본다. 일각에서 기대했던 것처럼 북한이 쉽게 붕괴됐을까? 북한이 붕괴해 남한이 흡수통일을 시도했다면 평화통일이 됐을까, 아니면 제2의 한국전쟁으로 이어졌을까? 붕괴 위기에 처한 혹은 붕괴된 북한을 안정화하기 위해 한미연합군을 북한에 투입했다면, 중국과 러시아는 어떻게 나왔을까? 설사 평화적 흡수통일이 이뤄졌더라도 '통일 코리아'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는 7000만 주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DJ식 '한미일 협력'
 

1998년 10월 8일, 국빈 방일 2일째를 맞은 김대중 대통령은 8일 숙소인 영빈관에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북한과 중국의 위협에 맞서 한미일이 군사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행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이러한 기조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일 군사협력을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고 간주하기에 앞서 DJ식 접근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 정부는 임기 첫해 여름부터 중대 도전에 직면했었다. 1998년 8월에 북한의 금창리 핵의혹 시설 논란과 북한의 3단계 장거리 로켓 발사(대포동 1호)가 연이어 나온 것이다. 미국이 제기한 금창리 의혹 논란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핵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으로 간주돼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나중에 미국 대표단의 현장 방문 결과 텅 빈 동굴이었다는 것이 판명됐다). 장거리 로켓 발사도 북미간의 미사일 협상 와중에 일어난 것이기에 그 파장은 매우 컸다.

이때 미국이 제안한 것이 바로 한미일 군사협력이었고, 이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 한국과 일본이 참여해달라는 요구로 구체화됐다. 금창리 의혹과 대포동 미사일 발사에 화들짝 놀란 일본은 동의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선택은 달랐다. 한미일의 MD 추구가 북중러의 결속을 야기할 것으로 보고는 미국의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한미 및 한미일 대북정책 공조를 제안했다. 한미일이 동시적이고 조율된 형태로 대북 공조를 도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페리 프로세스' 공조와 김대중-오부치 선언도 이러한 전략적 밑그림에 따라 나온 것이었다.

그랬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한미일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군사'보다는 '외교'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는 한미일의 대북 외교 협력은 실종되고 제재와 군사 협력 일변도로 향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외교를 방기하고 군사에 몰두하면 군비경쟁과 안보딜레마는 격화되고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 구도'도 고착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실책
 

2001년 3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후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과 외교정책 관련해서 두 가지 점을 비판하고 싶다. 하나는 총선을 불과 사흘 앞둔 2000년 4월 10일에 남북정상회담 합의 소식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국정원은 정치적 후폭풍을 우려해 이 소식을 총선 이후에 발표할 것을 건의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남북한의 합의 사항이라는 이유로 총선 전 발표를 강행했다.

이에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총선용 신북풍"이라고 맹비난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합의 소식이 남남갈등을 격화시켜 그 빛이 바래고 만 것이다. 남북 및 한미간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김대중 정부가 정작 초당적 협력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는 소홀했던 셈이다.

또 하나는 햇볕정책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다. 기실 햇볕정책의 진수는 대미정책에 있었다. 대북정책을 놓고 갈 길을 잃은 빌 클린턴 행정부에 갈 길을 비춰줬고 미국을 움직인 김대중의 힘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남북정상회담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이내 이는 '성공의 저주'로 바뀌고 만다. 김대중 정부는 자신감에 도취돼 시야와 판단력이 흐려진 나머지 미국의 정권교체가 한반도에 어떤 후폭풍 몰고 올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가능한 빨리 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새로운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조바심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정작 부시 행정부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의 협상을 중단하고 북한 위협을 빌미로 MD를 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외교 9단"이라고 불렸던 김대중 정부는 이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미국은 크게 달라지고 있었는데 김대중 정부는 집단 사고에 빠져 달리진 미국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과제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2월 23일 오후 전남 신안군 하의도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참배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이었던 지난 2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를 찾아 "위대한 김대중 정신을 잘 계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김대중의 정신이라고 강조했지만, 김대중의 정신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한반도 평화'와 '동아시아 공동체'다.

냉정하게 보면, 윤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때보다 훨씬 어려운 외교안보 환경을 떠안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이라고 해도 헤쳐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소통이다. 윤 대통령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은 결코 소통이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됐기에, 특히 남북관계와 국제문제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이 크게 부족하기에 소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 관련 자료는 풍부하다. 이들 자료로 학습하고 김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 햇볕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때와는 조건과 환경이 너무나도 크게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햇볕정책을 부정해선 더 나은 정책을 고안해낼 순 없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진영을 초월해 다양한 사람들, 특히 쓴소리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전임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한을 국내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떨쳐버리고선 말이다. 경제위기 극복의 열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안정화에 있다는 김대중 정부 때의 경험을 복기하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정욱식은 평화네트워크 대표이자,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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