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퀸시 존스의 음악과 삶> 포스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퀸시 존스의 음악과 삶> 포스터. ⓒ 넷플릭스

 
퀸시 존스, 그 이름은 이곳저곳에서 수없이 들어왔다. 음악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 정확히 정체가 뭔지 알지 못했다.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직접 부른 가수가 아니면 잘 모르거나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퀸시도 가수는 아니니까 잘 모르는 게 이상하진 않을 테다.

그런데 그가 프로듀서로서 제작한 면면만 조금 훑어도 그의 위대함을 단번에 캐치할 수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 레이 찰스, 마이클 잭슨, 투팍 샤커,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했고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 'Thriller', 'Bad'가 특히 유명하며 자선기금 프로젝트 일환으로 만든 Africa for America의 'We are World'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인의 귀를 호강시켜 준 것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영화 <퀸시 존스의 음악과 삶>이 제목 그대로 퀸시 존스의 음악과 삶을 반추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고 무엇을 목표 삼아 지금에 이르렀으며 90세가 넘는 이후의 삶도 왜 그렇게 영위할 것인지 등을 제대로 짚는다. 그 위대한 닥터 드레의 팟캐스트 <더 파머시>에 퀸시가 초대받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큐멘터리가 시작된다.

우여곡절 끝에 가파른 상승세

퀸시 존스는 1933년 미국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고(정신병원행) 남동생과 함께 길에서 거지처럼 살았다. 11살 때까지 깡패가 되는 게 꿈이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만 했고 퀸시는 우연한 기회에 음악의 길로 빠져든다. 트럼펫이 주무기였다. 14살 때 밴드에 참여했고 16살의 레이 찰스와 친해졌다. 흑인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시절, 음악은 그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흑인 편곡자가 현악곡을 쓰게 하지 않는 뉴욕을 떠나 1957년 파리로 간 퀸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멘토이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스승인 나디아 블랑제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곳에선 예술가로서 또 흑인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밴드를 만들어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고 1960년대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머큐리 레코드사의 부회장이 되었다.

1964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요청으로 그의 차기 앨범 프로듀싱을 맡았고 이후 그의 밴드를 이끌며 그와 함께 꿈의 세계이자 상류 사회로 발돋움했다. 프랭크는 인종 차별을 반대하고 나섰기에 퀸시의 든든한 후원자나 마찬가지였다. 일과 돈과 여자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프랭크와의 일을 끝내고 퀸시는 LA로 건너가 영화음악을 만든다. 큰 성공을 거두지만 다시 한 번 이혼을 경험한다.

또 다른 정점을 향한 동력들

1970년대 초 퀸시는 또 한 번 백인 미녀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고 일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미국 음악의 장르 구분을 파괴하려는 시도였다. 자기파괴적으로 일했고 인정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뇌동맥류로 쓰러져 입원해 수술 후 말 그대로 죽다가 살아난다. 수술은 두 번이나 이어진다. 퀸시는 더 이상 트럼펫을 연주할 수 없게 되었지만 곡 작업 능력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한편 현재를 사랑하기로 한다.

1944년 이후 45년 만에 고향집을 찾는다. 언제나 과거가 그를 붙잡고 괴롭혔기에 고향집을 찾아 정리하지 않고는 앞으로 또 미래로 나아갈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정점을 몇 번이나 찍었기에 지칠 대로 지쳤을 테고 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동력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고 또 흑인이었다.

흑인 뮤지션과의 작업은 물론, 방송 프로그램과 힙합 잡지를 만들었고 예전에 영화를 제작해 오프라 윈프리를 발굴했던 것처럼 윌 스미스를 발굴했다. 또 당시 세상을 뒤흔든 동부와 서부 힙합의 전쟁을 중재하고자 했다. 나아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누비며 인도주의적인 행보에 앞장섰다.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인 퀸시 존스

2015년 1월 초, 퀸시 존스는 쓰러진다. 당뇨병성 혼수상태에 빠져 나흘 만에 깨어났다. 알고 보니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 것. 80이 넘은 나이임에도 자기 관리에 소홀했다. 수술 후 요양해 몸을 잘 추슬렀고 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다. 그런가 하면 더욱 열정적으로 전 세계를 돌며 젊은 뮤지션들을 돕는다. 하지만 혈전 문제로 다시 입원한다.

그래도 다시 할 일을 해야 한다. 수많은 이가 그를 원하고 또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을 들여야 할 중요한 일은 '소미스소니언 흑인 역사 박물관' 오프닝 콘서트다. 수많은 이들을 초청했고 수많은 이와 함께 공연을 마쳤다. 이 작품 <퀸시 존스의 음악과 삶>은 그렇게 끝난다. 퀸시 존스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퀸시가 바라 마지않는 미래 세대의 삶까지.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면서도 (본인이 직접 말하길) 결혼 빼고 모두 성공해 최정점을 맛본 퀸시 존스, 9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의 말마따라 먼 길을 왔고 먼 길을 가야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비로소 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 된 것 같다. 피상적으로는커녕 그동안에는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한 꺼풀 벗기고 들여다본 것 같다. 인물 다큐멘터리가 주는 맛이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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