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엄마 극혐> 스틸컷

영화 <엄마 극혐>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지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지가 알아서 하겠지"

갚지 못한 빚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성으로 존재하는 것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이고만 부채는 청산할 도리도 없이 깊은 곳에 쌓인다. 그동안 받아온 부모의 사랑과 헌신 같은 것. 그중에서도 낳고 기르는 일의 8할은 책임졌을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채무는 어떤 방식으로도 떼어낼 수 없는 무게를 가진다.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는 것, 하루빨리 제 몫을 하는 성인이 되어 쥐꼬리만 한 그 빚의 일부를 상환하는 것이다.

그런 채무자의 마음에도 가끔씩 거센 파도가 몰아친다. 보잘것없던 몸집이 부모의 품을 삐져나올 정도로 커지고, 울타리 너머로 시선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할 즈음부터다. 현실적으로 떠날 준비는 되지 않았으나 어쩌면 곧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 이때가 되면 그동안 부모로부터 받아온 것들을 모른척 하고 싶어 진다. 자신의 삶은 이제 자신의 것으로. 그렇게 선을 긋고 홀로 나아가고자 한다. 자신을 길러온 사랑이, 아직도 떠나지 않는 관심이 더 이상 고마운 마음으로만은 남지 않게 되고 만다.

영화 <엄마 극혐> 속 가영(강태제 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영화 하나를 만들기 위해 7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다. 엄마(김영선 분)의 말을 빌리자면 시커먼 남자애들이랑 밤늦게까지 어울려 다니고,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뚱뚱하고 능력 없는 남자친구(문상훈 분)를 두고 있다. 엄마는 그런 가영의 인생에 대해 사사건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간섭해 온다. 가영 또한 20대 중반이 훌쩍 넘어서까지 통금 시간을 정하고 어길 시엔 벌금까지 요구하는 엄마와의 관계가 편할 리 없다. 그렇게 엄마는 점점 극혐인 대상이 되어간다.
 
 영화 <엄마 극혐> 스틸컷

영화 <엄마 극혐>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2.
누군가에 대한 걱정과 핀잔에는 사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놓여 있을 경우가 많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문구로 그 문제를 표면화했을 때 상대가 받게 될 상처를 최대한 미루고자 하는 이유다. 다른 표현으로라도 그 문제를 전달하고는 싶고, 자신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괜히 다른 사소한 일들로 꼬투리를 잡게 된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혜지 감독은 한없이 예민하고 어려울 수 있는 부모 자식 사이, 모녀의 이야기로부터 이를 추출해 낸다. 걱정이 되는 문제를 들추고 싶지만 조심스러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만 당장 어떻게 해결할 도리가 없는 상반된 두 사람의 입장이 부딪히는 자리다.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가영이 그 모습을 엄마에게 들키는 장면은 기폭제가 된다. 예정된 촬영일만 되면 비가 내려 허탕을 치던 차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마지막 날까지 비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속이라도 달래 보자는 심정의 순간이다. 더 이상 스태프도 구할 수 없고, 기자재도 빌릴 수 없는 상황에서 담배를 태우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더 있을까. 딸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의 속은 타들어가기만 한다.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루어 짐작하는 일과 그 모습을 직접 마주하는 일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두 인물의 충돌을 암시하는 텍스트는 이미 사전에 충분히 마련되어 왔다. 엄마는 이 자리에서 딸에 대해 지금껏 가져왔던 걱정과 염려, 근심을 단번에 쏟아낸다. 무엇보다 이런 비 좀 내린다고 주저앉아 있는 게 무슨 감독이냐며 지금이라도 때려치우고 취업 준비하면서 사람 구실하라는 말은 지금의 이 모진 말들이 단순히 가영의 뜻이나 재능을 폄하하거나 꺾으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든다. 영화감독이 될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이렇게 사소한 장애물 앞에서 쉽게 주저앉는 듯 보이는 모습이 안타깝고 답답했던 탓이다. 가영은 눈물을 쏟는다. 엄마의 관심이 부담스러웠을 뿐이지, 응원과 지지까지 철회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03.
앞서 빚이라는 딱딱한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단일한 방향으로밖에 흐를 수 없는 이 관계조차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은 역시 가족이라는 단어다. 주는 사람에게도 다시 되돌려 받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감정을 전달하고, 기대는 쪽에도 깊은 죄책감이나 짙은 무력감을 남기지 않는 신기한 낱말. 오늘이 아니면 더 이상의 추가 촬영을 기대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가영이 엄마에게 어색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바탕이기도 하다. 엄마 역시 그 요청을 짐짓 모른 척 받아준다.

도착한 현장에서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촬영을 위해 필요한 짐을 옮겨다 주는 일도, 갑자기 잡힌 일정에 구하지 못한 스태프의 일도, 예정된 일정을 위해 떠나야 하는 음향 감독의 일도 모두 엄마의 차지다. 가영은 엄마로 하여금 운전만 도와주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민망하고 자신의 일을 돕도록 해야 하는 상황이 가영도 어렵기만 하다. 무엇보다 오늘 남은 촬영은 모녀가 강하게 부딪히던 날, 그 순간의 장면에 대한 내용이다. 엄마에게 다 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 말이다.

딸이 현장에서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영을 도와주는 친구들에게 인사도 할 생각으로 따라나섰던 엄마. 음향감독을 대신해 헤드폰을 쓰고 붐마이크를 드는 동안 딸의 진심이 담긴 해당 장면의 대사를 마음 깊이 전해 듣게 된다. 항상 짜증만 내던 가영의 진심이 처음으로 전달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엄마로부터 받은 '빚'을 당연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아직까지 받고 있고 고마워하고 있다는 딸의 마음이다.
 
 영화 <엄마 극혐> 스틸컷

영화 <엄마 극혐>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4.
"야, 나도 너 극혐이야."

이 영화 속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풀기 어려운 복잡하고도 다난한 장면이 놓여 있다. 그 일이 반드시 서로를 상처 입히고 힘들게 만들어서는 아니다. 가깝고 미안한 관계일수록 속마음을 정확한 표현으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를 잘 포장해서 전달하고 싶은 욕심까지 들면 타이밍 또한 금방 놓치게 된다. 이런 사연들이 하나둘 쌓이다 보면 방구석 한편에 돌돌 말려 떠다니는 티끌처럼 어려운 마음이 생기게 될 터. 우리는 다시 조금 더 짜증 나고 미안하고 어려운 마음이 되고 만다. '극혐', 어쩌면 당신을 문자 그대로 혐오해서가 아니라 그런 당신 앞에 놓인 내 마음과 상황이 미워져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어렵게 마련된 가영의 작품이 상영되던 날. 엔딩크레디의 가장 마지막에는 'Special thanks to 엄마'가 새겨진다. 짧은 한 편의 영화 안에서도 그 진심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현실의 관계 위에서는 오죽할까.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당신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거나 잊어서는 더욱 아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하지 못하는 말들. 우리에겐 그런 것들이 있고, 이 영화는 잠시나마 그 사랑을 비춰낸다.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여섯 번째 큐레이션인 '엄마와 엄마의 엄마'는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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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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