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19 20:35최종 업데이트 24.02.1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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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영화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관람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4·10 총선을 앞두고 여권에서 크게 부각하는 인물은 이승만이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정부·여당이 그를 열심히 띄우고 있다. 게다가 이승만은 최근 다큐영화 <건국전쟁>의 주인공으로 부활하기까지 했다.

이 작품은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4·19혁명 초래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는 중도층 유권자들의 인식에 영향을 줄 만한 요소들을 갖고 있다. 일례로 '4.19혁명을 촉발시킨 3·15부정선거는 이승만이 아닌 이기붕의 책임이다', '4.19혁명의 원동력인 민주주의의 성숙은 이승만의 작품이다', '이승만은 4.19 부상자들을 방문해 눈물을 흘렸다', '이승만은 하와이 교민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등등의 이야기가 영화에 나온다. 이승만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기 위한 접근법이 영화에서 시도되고 있다.


특히 <건국전쟁>은 이승만이 특권층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었다는 메시지도 전달하고 있다. 농지개혁에 대한 설명이 그중 하나다.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 정작 농민의 삶은 바꾸지 못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개인적으로 저는 1950년의 농지개혁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결정적 장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면서 "만약 이게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지금과 많이 다른 나라가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발언한다.

이 발언은 법무부장관 때인 지난해 7월 1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한 제46회 제주포럼에서 나왔던 말이다. 또 그날 그는 대한민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농지개혁의 수혜자인) 농민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학농민전쟁처럼 한국전쟁(6·25전쟁)을 사실상 농민전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한동훈 위원장은 영화를 관람한 지난 12일에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으신 것, 농지개혁을 해낸 것,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이승만을 띄웠다. 하지만, <건국전쟁>과 한 위원장의 이 같은 노력은 헛수고로 귀결되기 쉽다. 농지개혁이 한국 민중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고 할 만한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닷새 뒤인 1949년 5월 1일의 제1회 총인구 조사에 따르면, 당시 인구는 2016만 6758명이었다. 그달 6일자 <조선일보> 1면 중간에 따르면, 농업 인구는 1375만 명이었다. 전체 인구의 68% 정도였던 것이다.

이처럼 농민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국민의 삶을 뒤바꿀 만한 농지개혁이 일어났다면, 그 혜택을 입은 농민들이 죽기 전까지 고마움을 간직하는 게 자연스럽다. 농업시대에 소작농이 자작농이 되는 것은 공업시대에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이 기업체 하나씩을 갖게 해준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은 웬만해서는 잊히지지 않을 것이다.

농지개혁이 정말로 한국 민중에게 그런 축복이 됐다면,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 한둘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지연된 농지개혁이 완료된 지 얼마 뒤인 1960년 3월과 4월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이승만 하야를 외쳤다. 고마움의 정서가 광범위하게 남아 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친일청산이 무산된 이유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해방 직후의 보수세력이 친일청산을 극력 반대한 것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농업시대의 기득권은 농지 소유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세력이 기득권을 지키자면 친일청산뿐 아니라 토지개혁도 극력 저지했어야 한다.

그런데 보수세력은 친일청산만 악착같이 저지하고 농지개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농지개혁으로 잃을 게 별로 없었음을 뜻한다. 일반 민중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만한 개혁은 아니었던 것이다.

민중들의 강력한 요구, 농지개혁 서두른 미군정
 

1947년 4월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이승만이 하지 미군정사령관과 만나는 모습 ⓒ 국사편찬위원회

 
농지개혁은 이승만 정권 이전의 미군정에 의해 시작됐지만, 이것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토지개혁이 이미 세계적 이슈가 된 상태에서 미군정이 이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소유권을 보호하는 힘은 국가권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고려가 조선으로 교체될 때 정도전과 조준이 토지개혁을 했던 것처럼, 국가가 바뀌게 되면 토지제도도 재편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에는 세계대전이 두 차례나 발발해 세계적으로 국가의 흥망성쇠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에는 토지개혁이 세계적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4월 3일 자 <경향신문> 2면 전체 기사는 "토지개혁 즉 토지소유제도에 대한 국가적 변혁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제1차 대전 후 소련에 실시된 사회주의적 토지혁명을 필두로 자본주의 각국를 통해서의 공통적인 번민의 과제"였다고 한 뒤, 제2차 대전 직후에는 "구라파 급(及) 동양제국(諸國)에 있어 일종의 유행"이 됐다고 설명한다.

구라파 및 동양권까지 유행이 된 것은 전 세계 민중들이 열렬히 희망했기 때문이다. 한국 민중들도 그러했다는 점은 일제강점기에 노동쟁의와 더불어 소작쟁의가 국내 항일투쟁의 큰 줄기를 형성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토지개혁 이슈를 지배하는 쪽이 한국 민중이었다는 점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요청으로 한국·일본 민중을 관찰하고 돌아간 국제인권옹호연맹(ILHR)의 로저 볼드윈(Roger N. Boldwin)의 시찰 소감에서도 나타난다. 1947년 6월 27일 자 <조선일보> 1면 중간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대규모 선거를 치르기 전에 꼭 선행해야 할 과제로 토지개혁과 친일청산을 거론했다. 선거에서 민중의 표를 얻자면 친일청산과 토지개혁이 절실하다고 봤던 것이다.

한국 민중이 희망하는 토지개혁의 형태는 1947년 2월 20일과 21일에 열린 제2차 전국농민총연맹 전국대회의 결의 사항에 집약돼 있다. 그달 22일 자 <독립신보> 2면 중간은 "무상몰수·무상분배의 진보적인 토지개혁 초안을 가결하는 등 큰 수확"이 있었다고 대회 결과를 보도했다.

유상몰수·무상분배가 더 좋은 것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당시의 재정 상태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또 유상분배는 소작농의 경제력을 전제로 한다. 현금 대신 수확물로 갚는다 할지라도 경제적 여력이 있는 소작농이라야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의 민중은 국가가 무상으로 거둬들여 무상으로 분배해 주기를 원했다.

농지개혁 비껴간 문중·대학... 명확한 한계 있어
 

지난해 3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처음에는 미군정이, 나중에는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에 나섰지만, 이들의 역할은 민중의 요구를 억압하고 기득권층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농지개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전국적 선거 전에 농지개혁을 해야 한다는 볼드윈의 권고에 따라 미군정이 5·10 총선 직전인 1948년 3월 22일 '중앙토지행정처의 설치법'을 제정해 일본인 농지를 불하하고, 그해 8월 15일에 출범한 이승만 정부가 그 뒤를 잇는 과정에서 농지개혁의 취지는 상당 부분 퇴색됐다.

문중 소유의 토지가 많았던 그 시절에 문중 토지는 농지개혁에서 제외됐다. 사찰의 토지도 그랬다. 대학이 보유한 토지도 농지개혁을 비껴갔다. 그래서 대학에 토지를 숨기는 지주들이 많았다.

2020년에 <사회적경제와 정책연구> 제10권 제4호에 실린 이정락·정재훈·이윤경·유호웅의 공동논문인 '농지개혁 실시에 따른 사립대학 팽창에 관한 심층 분석'은 1981년에 나온 김영모의 논문을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농지개혁으로 사유지를 반환하게 될지 모르는 계속된 혼란과, 앞선 북한의 토지개혁은 지주들로 하여금 대학 설립을 서두르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대지주 또는 그들의 자손 중에 해방 이후 교수 또는 학자로 이동한 사람들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국 소작농의 비애는 농지개혁 이후에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이는 농지개혁이 소작 금지의 예외를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법에 허점이 많아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9년 1월에 <농정연구>에 실린 조석곤 상지대 교수의 논문 '농지개혁과 경자유전'이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와 대한민국 시대의 <농가경제조사> 등을 토대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1945년 당시의 소작지 비율은 50%대였다.

이 비율은 1951년에 8.1%로 떨어졌다가, 농지개혁의 법망을 피해 농지 임대차가 늘어난 결과로 1960년대에는 20%대에 근접하고 1980년대에는 30%를 넘더니 1990년대에는 40%를 뛰어넘었다. 2015년에는 50%를 넘었다. 소작지 비율만 놓고 보면, 일제강점기 수준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이렇게 농지개혁은 점점 후퇴했는데도 한동훈 위원장을 비롯한 여권 지도부는 농지개혁을 한국 경제의 원동력으로 치켜세운다. 농지개혁은 소작농을 법조문상으로는 없앴지만 실질적으로 없애지는 못했다. 농토에서 직접 땀을 흘리지 않는데도 농지 소유로 불로소득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서민대중을 잘살게 해주지 못했다. 

<건국전쟁>과 한동훈 위원장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아무리 열심히 띄워도 결국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 작품과 한 위원장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저는 1950년의 농지개혁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결정적 장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는 한 위원장의 발언은 그의 말처럼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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