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5 10:32최종 업데이트 23.11.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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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나흘 앞두고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 연합뉴스


2018년 4월 23일 오후 1시 55분 청와대 여민1관 3층 회의실.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 회의가 열릴 참이다. 남북정상회담을 불과 나흘 앞뒀다. 실장, 수석, 보좌관, 비서관, 행정관들은 대통령 입장을 기다렸다.

오후 2시. 문재인 대통령이 고동색 집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일고여덟 걸음, 착석. 문 대통령은 비서진을 잠시 훑어봤다. 책상에 눈길을 돌렸다.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침 소리 하나 안 났다. 공기는 무거웠다. 시간은 깃털처럼 느리게 가라앉았다. 영겁은 아니어도 몇 분 같은 몇 초가 지났다. 문 대통령이 입을 뗐다. 살짝 잠긴 목소리였다.

"지난 20일 북한은 핵실험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시험 발사 중지를 선언하고 그 실천적 조치로 풍계리 핵실험장의 폐기를 발표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북한의 성의 있는 선행 조치로 높이 평가합니다. 전 세계도 일제히 북한의 전향적 조치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 전 세계에 매우 좋은 소식으로 큰 진전이라고 평가했고, 중국·러시아·일본 등 이웃 국가들도 즉각적인 환영과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유엔 사무총장도 한반도 신뢰 구축과 평화로운 한반도 비핵화에 기여하는 긍정적 진전으로 평가했습니다.

북한의 핵 동결 조치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중대한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청신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이 핵 동결로부터 출발해 완전한 핵 폐기의 길로 걸어간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의 밝은 미래를 보장할 것입니다. 북한의 선행 조치로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지길 기대합니다.

이제 남북정상회담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군사적인 방법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구축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고, 성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도, 정부도 여야의 초당적 협력에 상응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회담에 임하겠습니다."


문 대통령 말이 끝나고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내가 경험한 청와대 회의에서 가장 무거운 분위기였다. 문 대통령이 "자, (회의를) 시작할까요?"라고 분위기를 돌리고서야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날숨이 터졌다.

인사말 골자는 북측 핵 동결 조치에 대한 평가, 정상회담 성공 기원이다. 나는 이날 메시지 핵심은 다른 데 있다고 본다. 수 초의 침묵. 이는 몇백 자 발언보다 많은 걸 웅변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전력투구

이제는 거의 잊혔지만, 당시 한반도에는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북의 핵무장 추구, 이전 정부와 갈등으로 남북 간 대치는 어느 때보다 가팔랐다. 연일 비상등이 커졌다. 국제사회는 북측에 강한 경고를 보냈다.

앞서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남북 관계에서 몇 발짝 진전은 있었다. 한반도, 더 넓혀 동북아, 세계 평화의 주춧돌을 놓아야 했다. 그게 남한 대통령과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정상회담이다. 만감이 교차했을 터.

침묵의 몇 초를 지켜보는 참모들은 보고서와 TV 화면 속 남북 관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남북 관계를 목도했다. 돌이켜보면 문 대통령이 비서진에게 보낸 가장 강하고 무거운 메시지였다. '이 일에 우리는 진력해야 한다.'

그러잖아도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전력투구했다. 오히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이들이 흥분해서 '오버'할까 우려하는 듯했다. 남북정상회담은 남북만의 의기투합으로 굴려 갈 사안이 아니다. 주변국 동의가 중요했다.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놉(Nope)'하는 순간 회담은 물 건너갈 수 있다.

3월 20일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2차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회담 자료를 준비할 때 우리 입장에서가 아니라 중립적인 입장에서 각각의 제안 사항들이 남북과 미국에 각각 어떤 이익이 되는지, 우리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고 북한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는지, 미국의 이익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익을 서로 어떻게 주고받게 되는 것인지 등을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북·미 이익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 남북만 '얼씨구나'하고 앞서가면 미·중·일이 반대할 수도 있다. 그대로 놔두면 한미와 북·중으로 편 갈라 대치하는 교착 상태가 계속된다. 미·일에만 기대면 북·중·러는 더욱 밀착한다. 한반도는 그런 곳이다. 고구마 화법, 전략적 모호성이 차라리 미덕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첫 만남을 하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4월 27일이 됐다. 세계인은 남북 정상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김정은 위원장은 군사분계선 앞에서 기다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했다. 김 위원장은 높이 5㎝, 폭 50㎝ 군사분계선 턱을 넘어 남쪽 땅을 밟았다. 북한 지도자의 첫 남한 방문이다.

문 대통령은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김 위원장은 "그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라고 했다. 두 정상은 손을 맞잡고 북쪽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다시 악수했다. 양측을 가른 보이지 않는 철벽은 그렇게 증발할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이날 문 대통령 만찬사다.

"북측 속담에 '한 가마 밥 먹은 사람이 한 울음을 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찾아온 손님에게 따듯한 밥 한 끼 대접해야 마음이 놓이는 민족입니다. 오늘 귀한 손님들과 마음을 터놓는 대화를 나누고 풍성한 합의와 함께 맛있는 저녁을 갖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특별히 준비해 주신 평양냉면이 오늘 저녁의 의미를 더 크게 해 주었습니다. (중략) 이제 이 강토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전쟁으로 인한 불행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영변의 진달래는 해마다 봄이면 만발할 것이고 남쪽 바다의 동백꽃도 걱정 없이 피어날 것입니다."

시구(詩句) 같은 인사말을 들으면서, '정말 그랬으면…'이라고 빌었다. 다들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모두 생중계로 보셨을 터이니, 더 써봐야 푸른 소(沼)에 돌 던지듯 쓸데없는 일 같다.

다 된 밥의 솥을 엎는 격

흥분된 하루가 지났다. 청와대 업무 특징이 있다. 기쁨은 하루 이상 지속하지 않는다. 좋은 일 뒤에는 일거리가 따라온다. 청와대에 판문점 선언 이행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임종석 비서실장이 위원장이다. 북미 정상회담 지원, 판문점 선언의 분야별 추진 등을 논의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릴 북미 정상회담이 다음 과제였다. 암초가 나타났다. 존 볼턴 백악관 안보 보좌관이 초를 쳤다. 그는 백악관에 있는 내내 북미 갈등의 불씨를 흩뿌렸다. TV 화면에 그의 콧수염이 나오면 가슴이 철렁했다.

볼턴 보좌관은 4월 29일 인터뷰에서 북핵 폐기 방식으로 리비아 모델을 언급했다. 그는 "2003~2004년 리비아 모델에 대해 많이 염두에 두고 있지만 (북한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라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선(先) 핵 포기, 후(後) 보상'을 뜻한다.

2003년 리비아는 자발적으로 핵 포기를 선언했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 해제 등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2011년 반(反) 정부 시위로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가 권좌에서 축출됐다. 그는 반군에게 사살됐다. 리비아 모델 언급만으로 북한이 반발할 게 뻔했다.

미국 매파는 멈추지 않았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5월 21일 인터뷰에서 "지난주 이른바 리비아 모델이 언급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명확히 했듯 (북한 문제는) 김정은이 협상을 하지 않는다면 리비아 모델이 끝났듯 끝나게 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5월 24일 담화를 냈다. 톤이 고약했다. 그는 "핵보유국인 우리를 리비아와 비교하는 것만 봐도 (펜스 부통령이) 얼마나 아둔한 얼뜨기인가 알 수 있다"라며 "우리는 미국에 대화를 구걸하지 않으며 미국이 우리와 마주 앉지 않겠다면 구태여 붙잡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5월 24일(현지 시각) 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전격으로 발표했다.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앞으로 쓴 공개서한을 내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당신들 발언에 나타난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으로 인해 애석하게도 지금 시점에서 회담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느낀다"라고 썼다. 첫 북미 정상회담인 만큼 우여곡절이 있으리라고 예상됐다. 그러나 양측은 너무 나갔다.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솥을 엎는 격이다.

다행인 점도 있다. 양측 발언을 뜯어보면 전제가 있다. 상대가 '~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했기 때문에'라고 돼 있다. 이 조건이 충족되면 논의는 재개될 수 있다.

북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5월 25일 "트럼프 대통령이 거론한 '커다란 분노와 노골적인 적대감'이라는 것은 사실 조미(북미) 수뇌 상봉을 앞두고 일방적인 핵 폐기를 압박해 온 미국 측의 지나친 언행이 불러온 반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 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힌다"라고 했다. 좋은 신호다. 누군가 나서야 했다.

정상이 손을 맞잡았다
 

2018년 5월 26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두번째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뒤 나오고 있다. ⓒ 청와대


5월 26일 오후 회색 벤츠 한 대가 청와대를 빠져나갔다. 차는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 도착했다. 내린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문 대통령은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다. 두 정상의 두 번째 만남. 회담을 마치고 문 대통령은 오후 6시쯤 관저로 돌아왔다. 임종석 비서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 핵심 참모를 불렀다. 문 대통령은 합의 내용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브리핑은 내일 하기로 했다. 그쪽 (김정은 위원장 보도) 전통이 그렇다. 일부만 알리라"고 지시했다.

윤영찬 수석은 오후 7시 57분 기자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개최했습니다. 양 정상은 4‧27 판문점 선언의 이행과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양측 합의에 따라 회담 결과는 내일 오전 10시 문 대통령께서 직접 발표할 예정입니다."

방송 메인 뉴스 시간 직전이었다. 기자들 질문이 쏟아졌다. 답변은 하나였다. "내일 대통령께 물어보시라."

다음 날 오전 10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장에 섰다. 그는 "우리 (남북) 두 정상은 6·12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위한 우리 여정은 결코 중단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이를 위해 긴밀히 상호협력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모두 북미 정상회담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만큼 양측이 직접 소통으로 오해를 불식시키고 정상회담에서 합의할 의제에 대해 실무협상을 통해 충분한 사전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라며 "김 위원장도 동의했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일체 형식 없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라고 회담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4월 역사적인 판문점 회담 못지않게, 친구 간의 평범한 일상처럼 이루어진 이번 회담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이어 "남북은 이렇게 만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라며 "앞으로도 필요할 경우 언제든지 서로 통신하거나 만나 격의 없이 소통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화답했다. 공식 트위터에 "우리는 정상회담 개최 논의 재개에 관해 북한과 매우 생산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 회담한다면 싱가포르서 다음 달 12일 열릴 것이다. 필요하다면 개최 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다"라고 썼다.
 

2018년 6월 12일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 합의문에 서명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 케빈 림/스트레이츠 타임스


6월 12일 오전 9시 3분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카펠라 호텔에서 북미 정상이 손을 맞잡았다. 초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나 가능한 일이 TV 전파를 타다니.

그 뒤 북미 간에 알력이 다시 표면화됐다. 문재인 대통령 중재가 또 중요해졌다. 문 대통령은 그해 9월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머리를 맞댔다. 세 번째 만남이다. 남북 군사 충돌을 막는 '9·19 군사합의' 등 결실을 이뤄냈다.

지금은 막혀 억새가 돋고 이끼가 끼었어도

내가 청와대를 나온 뒤 남·북·미 사이는 계속 출렁거렸다. 결실을 보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새 정부 들어 남북, 북미 관계는 악화일로다. 남북 간 의제는 미사일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5년 허송세월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북측 가짜 평화 공세에 속았다는 지적도 있다. 결과론이다.

'파스칼의 내기'라는 논증법이 있다. 수학자이자 과학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주장이다.

신의 존재 여부를 놓고 내기한다. 파스칼은 존재한다는 쪽에 걸어야 이긴다고 했다. ①신을 믿으면 존재하지 않더라도 잃는 건 없지만, 존재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②신을 믿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잃을 건 없지만, 존재한다면 지옥에 떨어진다. ③그러니 신을 믿는 게 최선이다.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지옥의 실현을 보고 싶지 않으면 남북 대화가 최선이다. 협의가 되면 평화로 다가간다. 협의가 되지 않아도 어차피 본전이다.

한번 뚫은 길이다. 지금은 막혀 억새가 돋고 이끼가 끼었어도, 다시 뚫기는 쉬울 것이다. 내기를 해야 한다면 난 여전히 남북 대화를 한다는 쪽에 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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