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2 15:20최종 업데이트 23.10.2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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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편집자말]
"혹시, 화났어요?"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보통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띤 채 사람들을 대하고, 모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도 꼭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며 부드럽게 다가간다. 내 SNS에 달린 댓글 하나하나마다 대댓글을 달고, 다정하게 대응하려 애쓴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한 번씩 방심할 때가 있다. 찡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무표정인 상태로 있어도, 목소리 톤을 조금이라도 낮춰도 상대방은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러곤 꼭 이런 질문이 터진다. 뭐 안 좋은 일 있는 거 아니냐고. 화났냐고.

처음에는 그런 질문이 당황스러워 얼른 웃으면서 모면을 하곤 했는데, 상황이 반복되니 "화났냐고 물어서 화가 났다"고 대꾸하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치솟았다. "혹시 화났어요?"라는 말은 물음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 "평소처럼 감정노동을 계속해"라는 명령을 우회한 말이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이것은 내게 일종의 긍지,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혹시 이러한 나의 친절함은 여성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사회적으로 훈련받은 태도가 아닌가 하는 의문.

그러고 보니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 중 대부분이 여성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가 그동안 여성에게 불행을 숨기고 분노를 제거하며 고통을 완화하는 학습을 하도록 압박을 가해왔기에, 나 역시 친절함이 몸에 부지불식간에 밴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꽤 합리적이었다.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 마리안느 라프랑스(Marianne LaFrance)도 저서 <왜 미소 짓는가? (Why Smile?:The Science Behind Facial Expression)>에서 여성이 더 밝은(웃음을 짓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던가. 가부장제를 교란할 의사가 없고, 현상 유지 상태에 '순응'한다는 걸 표정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서구에도 무표정한 상태의 여성의 얼굴을 가리키는 RBF(Resting Bitch Face)라는 멸칭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다. RBF 용어 역시, 여성은 언제나 행복하고 남을 기쁘게 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사회적 구성물일 터이다.

그 후 나는 의식적으로 표정에 웃음기를 싹 거둬보았다. 대화할 때도 필수적인 단어 위주로, 되도록 짧게 해보려 애썼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분위기가 왠지 윤활유 없이 돌아가는 기계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분위기 따위야 별 상관없었다. 문제는 내 감정 상태였다.

미소 짓지 않음이 곧 무례인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계속 삐걱거렸다. 왠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혹시 가부장의 목소리를 나 스스로 내면화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이걸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남에게 감정을 쏟지 않으면 후련함만 남을 줄 알았건만, 나는 도대체 왜 불편했던 걸까.

거절 당한 반 고흐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내 불편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친절을 놓으면 안 되는 까닭을 쉴 틈 없이 설명해주었으리라. 자신의 인생을 예로 들어가면서 말이다.

반 고흐야말로 일생동안 타인의 친절을 갈구했지만, 그만큼 절망했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몰이해와 그로 인한 소외감 속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반 고흐의 제수였던 요한나 봉허(Johanna Bonger)마저도 이렇게 얘기했겠는가.

"그때 우리가 함께 있었을 때 내가 조금만 더 빈센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더라면! 그때 그에게 짜증을 부린 것이 지금은 얼마나 후회되는지 모른다."

불행히도 반 고흐는 가는 곳마다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왜였을까. 지금에야 우리는 반 고흐가 천재적인 화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생전의 그는 캔버스에 덕지덕지 물감만 끼얹은 어지러운 그림을 그리는 무명화가일 뿐이었다.

게다가 반 고흐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잘 정돈해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늘 사람들에게 먼저 열정적으로 다가갔으나 상대방은 그 에너지를 부담스러워했고, 반 고흐 특유의 지나치게 산만한 태도는 뒷말을 낳았다.

"반 고흐의 맞은편에 앉아 마주 보고서 이야기하는데 누군가가 한쪽에 나타나면, 그는 눈만 돌려 그를 보는 게 아니라 머리를 통째로 돌리곤 했다... 그와 잡담을 나누는데 새가 지나가면 그냥 흘끗 보는 대신 머리를 통째로 들어 무슨 새인지 확인하곤 했다. 그런 태도는 그의 시선에 고정된 기계 같은 표정을 부여했다. 헤드라이트처럼."

반 고흐와 생전에 알고 지냈다는 사람이 남긴 증언이다. 특별히 마을에 해를 끼치거나 누군가에게 폭력을 쓴 것도 아니었건만, 그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는 공감대가 마을에 퍼지자 자연스럽게 반 고흐는 고립됐다.

카페에서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거리에서 반 고흐가 다가가 말을 걸며 포즈를 취해달라고 간청하면 달아났다. 그런 다음 그들은 거부당한 반 고흐가 성큼성큼 걸어가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평소 인물화 그리기를 간절히 원했던 반 고흐에게 이런 상황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지역주민들의 불친절함에 상처받은 마음을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토로할 정도였다.

"그들과 나 사이는 너무 멀어 보여.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좀처럼 다가가지 못해. 그저 저녁 식사나 커피 주문을 할 때 말고는 거의 하루종일 말없이 지낸단다. 처음부터 그래왔지."(1888년 7월 5일)

사람들의 따돌림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던 반 고흐는 1890년, 의미심장한 그림 하나를 그린다. 바로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작품을 모작한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신약성경 루카복음 10장 30~35절에 등장한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향하던 유대인 나그네가 강도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해 있자,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도왔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반 고흐는 왜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까지 하면서, 굳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그린 걸까? 그림의 어떤 점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던 걸까?

들라크루아의 <착한 사마리아인> 모작
 

빈센트 반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 (들라크루아 작품 모작) 1890년, 캔버스에 유채,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

   
실상 반 고흐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그림 속 죄없는 사람과 다름없었다. <착한 사마리아인>을 그리기 시작한 때는, 그가 1년 3개월가량 머물고 있었던 프랑스 아를에서 떠난 직후였다. 아니 떠났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그는 쫓겨났다. 마을 사람들이 '미치광이랑 함께 살 수 없다'며 시장에게 탄원서까지 보내며 야단법석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열심히 그림만 그리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미쳤다고 손가락질만 했다. 그저 조금만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 줬으면 했지만, 모두 반 고흐를 외면했다.

마치 그림 왼쪽에 등을 보이면서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들은 바로 만인의 존경을 받던 사제와 경건하기로 소문난 레위인. 남 부러울 것 없이 살던 이들은 쓰러진 유대인을 그냥 지나쳤지만 단 한 사람, 유대인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만이 안간힘을 다해 그를 노새에 태우고 여관비를 대신 내주어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

반 고흐는 절박한 처지에 빠진 자신 앞에도 사마리아인같이 선한 사람이 나타나 주기를, 어쩌면 그 소망을 그림 속에 투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외젠 들라크루아, <착한 사마리아인> 1849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 들라크루아


그런데 눈여겨 봐야할 점이 있다. 반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따라 그리면서, 사마리아인의 외양을 슬쩍 바꾼 것이다. 붉은 수염을 기른 깡마른 얼굴의 사내, 영락없이 반 고흐 자신의 얼굴이다.

강도당한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을 자신과 비슷하게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신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상처 입은 사람에게 친절히 손을 내민 사마리아인처럼, 반 고흐 자신도 선의를 담아 타인을 대하겠다는 다짐 아니었을까.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9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내셔널갤러리오브아트 ⓒ 빈센트 반 고흐

 
'선의'는 인간됨의 증거

"여성들에게만 강요됐던 친절함, 저는 더 안 할래요. 근데 왜 제 마음이 이렇게 불편할까요?"라고 묻는 내 앞에 아마 반 고흐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세상에 회의하고 냉소하는 것은 너무도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잃지 않는 태도야말로 인간됨의 증거라고.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예술과 문명>에서 이렇게 짚었듯이 말이다.

"13세기 수도자 성 프란체스코에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아마도 '순결, 복종 그리고 빈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고, 15~16세기를 살았던 미켈란젤로에게 물었다면 '비열과 부정에 대한 경멸'이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18~19세기 초 인물인 괴테에게 물었다면 '전체와 미 속에서 사는 일이다'라고 말했을지언정 결코 '친절'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타인에 대한 '친절'이야말로, 오랫동안 인간 문명이 진보한 결과로 건져낼 수 있었던 소중한 결실이라는 것이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친절을 놓으니 내 인격의 한 부분이 소리 없이 닳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알겠다. 가부장 사회가 휘두르는 주먹에 내가 맞았다는 이유로 내가 그동안 정성껏 가꿔온 나의 '선함'을 외면하는 건,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남자들이 여자만큼 친절하지 않은 것은, 남자들이 그동안 마땅히 해야 할 감정노동에 게을렀던 증거일 뿐이다. 왜 '정상성의 기준'과 '기본값'을 그런 남성 평균에 맞추어 낮춰야 하나. 오히려 달라져야 할 쪽은 남성들이다. 당연히 갖춰야 할 '사회적 예의'의 기준선 위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남성들은 지금부터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참고서적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스티븐 네이페,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 지음, 최준영 옮김, 민음사, 2016
<예술과 문명>, 케네스 클라크 지음, 최석태 옮김, 문에출판사, 1989
<화가의 마지막 그림>, 이유리 지음, 서해문집,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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