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1 05:47최종 업데이트 23.10.11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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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수천m에 있는 강원 태백시 장성동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채탄 막장. 2012.8.7 ⓒ 연합뉴스

 
우리는 헤어 나오기 힘든 큰 위기를 만났을 때 '인생 막장'이라는 말을 쓴다. 막장은 탄광의 갱도 끝을 가리킨다. 광산 수백 미터 땅굴 속을 타고 들어가 시커먼 탄가루를 캐야 하는 광부의 힘겨운 삶이 떠오른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굴속에서 탁하고 답답하고 불안하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하는 막장 생활은 상상만 해도 두렵다. 그러나 오죽하면 막장에 가겠나? 실제 내가 청년 때만 해도 특별한 재주가 없는데 망하거나 목돈이 필요하면 탄광에 가거나 원양어선을 타라는 말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환경적 요인과 채산성 악화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탄광 막장은 거의 없어졌다. 그렇다면 요즘엔 '막장'에서 일하는 것 만큼 힘든 일 가운데 하나는 택배기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택배하면서 만난 기사들치고 깊은 사연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것저것 고심해 보고, 시도해보다가 안 되면 결국 택배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다. 큰 사업을 하다가 부도나서 이빨이 다 빠지도록 고심하다가 20여 년 전 택배로 들어온 A형님, 60세 넘도록 어머니를 모시며 혼자 살던 B형님,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이 몸뚱이 하나로 아들에게만은 가난을 물려주기 싫다며 아파서 팔목마다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도 매일 400개 넘게 배송하는 C.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노숙인 쉼터에 오는 이들은 모두 사연이 있었다. ⓒ pixabay

 
나는 2017년부터 3년 동안 영등포의 어느 노숙인 쉼터 시설장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교회부설 쉼터였기 때문에 매주 한 번씩 예배를 드렸다. 나는 너무 종교의식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가능하면 모두에게 필요한 힘이 되는 이야기, 인생살이 교훈, 마음의 다스림, 격려와 축복이 나눠지도록 신경을 썼다. 어느 날은 내가 먼저 간략히 내 삶을 회고하여 고백한 후 모두 가능한 대로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숙인은 타고났을까? 당연히 그럴 리 없다. 그리고 놀랐다. 50대 초반 재주 많던 어떤 분은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했었고, 이후에도 정치인 친구들과 사업도 하며 잘 지냈는데, 사업 실패로 모든 걸 잃은 후 알코올 중독이 되어 폐인처럼 지내다가 자활하려고 우리 쉼터에 들어왔다고 한다. 쉼터 방장을 하셨던 60대 초반 형님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대기업에 다니다가 명예퇴직 당해 직장을 나왔고, 재기에 실패해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이혼하고 가출 후 노숙인이 되었다. 또 다른 형님은 인천에서 여러 개의 학원을 경영하던 학원장이었으나 무리한 투자로 일시에 망해 결국 노숙인이 되었다.

그중에 항상 점잖던 한 형님은 육사 교관을 지낸 예비역 대령이었다. 예편하면서 군인 경력을 살려 받은 퇴직금과 대출도 받아 알고 지내던 지인과 방위산업 관련 납품 업체를 인수했다가 부도가 나서 한순간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늘 말도 없고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그 형님은 자기 사연과 남은 가족을 말하면서 주책맞게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렇다. 누구도 사연 없이 살아온 사람이 없었다. 특히 인생 60년 정도 살다 보면, 겉은 멀쩡해 보여도 여기저기 삶이 무너지지 않기란 정말 힘들다. 문제는 인생 막장의 엄연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다. 두 가지가 참 중요해 보였다.

첫째는 '내가 왕년에 누구였는데' 하면서 지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난 세월이나 한탄하며 자존심을 내세우면 안 된다. 아까 말한 예비역 대령이 그랬다. 재기하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일하고 저축하는 건 좋은데, 어쩔 수 없어 함께 지내기는 하지만 나는 너희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노숙인 동료와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혼자 외톨이가 되어 사니 주변 평판도 안 좋고, 다툼도 많았다.

둘째는 그와 정반대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식으로 아예 되는대로 사는 것이다. 물론 내가 관리하던 쉼터는 자활을 목적으로 운영되기에 제멋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생활과 저축, 취업 등을 관리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이 있었다. 평소 일도 열심히 하고 인간관계도 좋았는데, 가끔 술을 마시면 여러 날 폐인이 되어 직장도 나가지 않으며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싸우다가 결국 다시 쫓겨나는 것이다. 그런 분들을 보면 너무너무 안타깝다.

사실 나도 그랬다. 나름 인생을 열심히 살았지만, 나이 50이 넘어 정말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인생의 막장을 만났다. 살길도 없었고, 살 의욕도 없었다. 목사인데도 기도나 성경 읽기도 힘들었다. 그때 친구인 지금의 택배대리점 점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 이것, 저것 생각하며 상념에 빠지면 더 헤어 나오기 힘들다. 이럴 때일수록 돈도 벌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택배해라. 정신없이 일하며 몸을 쓰다 보면 힘들어서 잡념도 없어지고 마음도 회복될 거다.' 그렇게 택배를 권했다.

나를 재기하게 만든 '택배' 
 

서울의 한 물류센터 (자료사진) ⓒ 연합뉴스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2015년에 목회하며 한번 힘겹게 경험해봤던 일이라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치 제대했던 군대에 다시 들어가는 심정 같았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처럼 듣고 바로 다음 날 점장에게 전화해 정식 기사로 일하겠다고 했다. 그때가 2020년이다. 매일 새벽 5시 조금 넘어 일어나면 그때부터 오늘 하루만 견뎌낼 힘을 달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했다. 이런 중얼거림은 나의 간절한 기도였다. 일과 중에도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계속 혼자 기도를 했다.

일은 힘겨웠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 길게 늘어졌다. 밤에 이것저것 밀린 일과 휴식도 취하고, 졸면서 몇 마디 기도하다가 어느새 푹 쓰러져 자곤 했다. 그리고 또 다음날….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반년쯤 지나니 친구 점장의 말처럼 진짜 숨이 쉬어지고 마음이 한결 단단해지고 삶의 의욕이 생겼다. 훨씬 자연스럽게 사람을 대하게 되고 일상도 여유로워졌다.

그때, 매일 새벽 눈을 뜨면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낮에 일하면서도 생각날 때마다 흥얼흥얼 부르던 찬양곡이 있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곡이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내 마음의 기도: '내일 당할 어려움은 또 내일 생각하겠습니다. 그저 딱 오늘 하루 견뎌내고, 살아갈 힘만 주십시오')."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 해요('불행을 당하거나 용케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나를 붙들어 이제 평탄한 삶을 살게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두 해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택배를 하고 나니, 정말 몸도 마음도 힘이 생겨났다. 그리고 내가 뜻밖에 중단해야 했던 목회를 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듯 생겨났다. 그래서 택배를 그만두고 예전보다 더욱 힘든 시절이지만, 목회를 다시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가장 힘겨울 때 내게 택배를 권해준 친구 점장에게 한없이 고맙다. 나도 보답처럼 회사에서의 필요가 있어 요청이 오면 마다하지 않고 다시 나가서 구멍 난 곳을 메워준다. 다음 주간에도 여행가는 기사를 대신하여 일해주기로 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금 인생 막장을 경험하는 분이 있는가? 그럴 때 여러분은 그 위기를 어떻게 이겨내고, 다시 재기하는가? 내 경험을 들어 말한다면, 인생의 위기가 닥치고 의욕이 떨어지고 길이 안 보일 때 육체노동을 권한다. 우리는 살기 힘들어지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 '택배라도 하면 되지'라고 쉽게 말할지 모르지만 어려움이 닥쳐도 여간해서 농사짓고, 택배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내가 왕년에 어떤 사람인데'는 아무 소용 없는 얘기다.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막장에 들어가 열심히 땀 흘리면 숨이 돌려지고, 다시 살아갈 의욕과 힘이 생기고 마침내 재기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갑자기 수년 전 서로 함께 울고 웃었던 노숙인 쉼터 형님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조만간 연락해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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