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4 10:40최종 업데이트 23.10.0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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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이 대구 공군기지에서 열린 국군의 날 행사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통령은 어떤 기관인가. 제왕? 상머슴? 욕받이? 조직 우두머리? 정치배? 무얼 고르든, 유권자 자신의 렌즈에 비친 모습이다. 그러니 답은 천차만별이다.

대통령은 국가 의전 서열 1위다. 그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안내자뿐이다. 국민만이 상사인 최고위 공직자다. 책임도 가장 무겁게 진다. 3부 중 입법, 사법부와 달리 행정부에서는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외국 국가수반과 달리 한국 대통령은 통일 의무를 진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헌법이 정해놓았다. 국민투표 부의, 조약 체결 및 비준, 선전포고와 강화, 국군 통수, 대통령령 발령, 계엄선포, 공무원 임면, 사면‧감형 또는 복권…. 사형도 대통령이 서명해야 집행한다. 생살여탈권을 쥐었다. 개인이 감당하기엔 막중하다. '500여 명 + α'로 구성된 비서실이 돕는다. 그래도 고뇌와 결단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

대통령 문재인은 어떤 기관이었을까. 20개월 그의 곁에서 일한 내게 열쇠 말 두 개가 떠오른다. '인권 변호사, 촛불'. 그를 구성하는 필수 성분이다. 

젊은 시절 몰두한 일이 대부분 그 사람의 알맹이가 된다. 젊어서 대장장이였으면 그는 대체로 대장장이로 산다. 풀무질을 그만둬도 속내는 대장장이다. 난 기자로 24년을 보냈다. 여태 기자로 산다.

검사들처럼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들이 있을까. 무슨 향우회, 어떤 전우회, 어느 동문회가 잘 뭉친다고 한다. '프로 동지회'만은 못한 듯하다. 검사들은 자칭 타칭 프로라고 한다. 검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프로시큐터(prosecutor)'에서 온 듯하다.

중년이 지나 인생 항로를 180도 바꾸는 사람도 있다. 드물다. 항로를 바꾸고 알맹이까지 바꾸는 이도 있다. 더욱 드물다. 그런 사람을 전향자, 혹은 변절자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변하지 않는 쪽이다. 1972년 대학에 들어간 그는 학생운동을 했다. 구속과 강제 징집을 경험했다. 복학한 뒤 1980년 4월 시위를 주도했다.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최종 합격 소식을 들었다. 1982년 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다.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를 만들었다. 그 후 인권 변호사 길을 걸었다.

'변호사'가 아니라 '인권 변호사'
 

2018년 11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 및 본위원회 1차 회의에 위원들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는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까. 2018년 11월 22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 1차 회의 때 일이다. 경사노위는 사회적 대타협 기구다. 노동자, 사용자, 정부가 함께 고용 노동 정책 등 경제·사회정책을 협의한다. 대통령에게 정책 자문을 한다.

첫 회의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주재했다.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다. 공익위원으로 참석한 김진 변호사가 인사말을 했다.

"제가 3~4년 전 부당노동 쟁의행위 관련 손해배상 사건을 분석해보니 차령산맥 이북은 모두 김선수 변호사가, 차령산맥 이남은 모두 문재인 변호사가 담당했더군요. 이런 분이 대통령이고, 평생을 노동운동에 바친 문성현 위원장이 경사노위를 이끌고 있습니다."

경사노위 순항을 기대하는 말이다. 차령산맥은 남한을 위, 아래로 나눈다. 문 대통령은 김 변호사 말을 들으며 미소 지었다. 문 대통령은 공익위원들에게 두루 덕담했다. 김진 변호사에게 말할 차례가 됐다.

"김진 변호사님이 차령산맥 이남 이야기를 하던데, 다른 분들께도 그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웃음이 터졌다. 문 대통령은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자부심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식 연설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래도 그의 시선은 모든 국민 가운데 소수, 약자, 서민에 더 자주, 오래 머물렀던 게 아닌가 싶다.

사람은 자기만의 업무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 대통령도 다를 바 없다. 김영삼 대통령은 뛰어난 정치 감각과 화끈한 결단으로 장애물을 돌파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치밀한 준비와 정교한 셈법으로 절묘한 수를 찾아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계를 상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과 응전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리걸 마인드(법률적 사고)를 오른손에, 심사숙고를 왼손에 쥐고 일했다. 법령에 맞느냐를 중시했다는 뜻이 아니다. 논리와 법리를 따졌다. 균형을 잡고 판단하려고 했다.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법과 제도가 잘못됐다고 보면 개선 방법을 찾게 했다. 법이 약자를 가혹하게 탄압했던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가 아니라 '인권 변호사'다.

정치인 아닌 변호사 식 접근법
 

2018년 10월 23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시작하며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낙연 국무총리 방명록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다. 이 총리는 2018년 9월 베트남에 갔다. 쩐 다이 꽝 전 베트남 국가주석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 총리는 호찌민 베트남 초대 주석 집을 찾아가 방명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위대했으나 검소하셨고, 검소했으나 위대하셨던, 백성을 사랑하셨으며 백성의 사랑을 받으신 주석님의 삶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워집니다. 2018. 9. 26. 대한민국 국무총리 이낙연

극우 유튜버들은 방명록 사진을 주목했다. 이 총리가 북한 지도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가짜뉴스를 만들어냈다. 가짜뉴스는 둑 터진 강처럼 범람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문제를 여러 번 거론했다. 2018년 10월 4일 티타임 때다. 그는 "이낙연 총리 건은 명예훼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너무나 명백해, 사실 심의도 필요 없다. 자명하다. 표현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알권리를 마비시키고 침해한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명예훼손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면 어려운 부분이 많다. (가해자가 명예훼손이라는) 인식이 없거나, 공익성이 있거나 그러면 무죄"라며 "베트남 호찌민 주석에게 한 말을 북한에 한 것처럼 하면 그건 공익 목적도 아니고 논란의 여지도 없다"라고 밝혔다. 정치인이 아니라 변호사 식 접근법이다.

나흘 뒤 국무회의에 '범정부 허위 조작 정보 근절을 위한 제도개선 방안'이 보고됐다. 문 대통령은 "이 총리 건을 어떻게 대응하느냐"라고 물었다. "팩트 체크하는 언론기관이 사실관계를 확인해 발표했다"라는 답변이 나왔다.

문 대통령은 "피해가 이미 발생했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다. 팩트 체크만으로 되겠느냐"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낙연 총리 건은 너무나 현저하고 자명한 것이 넘쳐나지 않나. 사진을 조작해서 북한에 갖다 붙인 건 자명하다. 객관적으로 팩트가 확립돼 있다. 이런 정도는 정보통신망법을 활용해 내용을 차단하고 처벌 등 여러 가지가 가능하지 않으냐. 표현의 자유 침해 소지가 있고 남용해서는 안 되지만, 국민이 확실히 공감대를 가진 사안에는 정보통신망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명예훼손 처벌이 늘었는데 이 문제는 그런 대응으로 해결이 안 될 만큼 심각하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을 예시로 들었다. 문 대통령은 "내가 금괴 200톤을 갖고 있다는 식의, 그런 주장은 사실 규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금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도 쟁점이 있을 때 규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율사가 아니면 하기 힘든 발상이다.

엉뚱한 예에 국무회의장에 폭소가 터졌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때부터 금괴 200톤, 2017년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암호화폐 200톤을 보유했다는 의혹에 시달려 왔다. 이 건은 뒤에 다시 다루겠다.

문 대통령은 "내 건과 이 총리 건은 다르다"라며 "이 총리 건은 국가를 이간하고 기본 질서를 해하려는 것"이라고 평했다. 이날 부처 합동 '허위 조작 정보 근절을 위한 제도개선안'은 정부안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촛불혁명'이라고 명명했다
 

2017년 9월 21일(현지시간)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제72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촛불'은 무엇일까. 갚지 않으면 안 되는, 너무나 압도적인 부채(負債)다. 그리고 나침반이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달걀로 바위를 치듯 촛불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겨울을 지나 봄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이 권좌에서 쫓겨났다.

시민 문재인은 촛불 시위 현장에 참여했다. 정치인 문재인은 촛불로 말미암은 조기 대선에 도전했다. 대통령 문재인은 촛불 민심에 부응해야 한다고 늘 말했다. 2017년 5월 10일 취임 연설이다.

"지난 몇 달간 우리는 유례없는 정치적 격변기를 보냈습니다. 정치는 혼란했지만, 국민은 위대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앞에서도 국민께서 대한민국의 앞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 국민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마침내 오늘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위대함은 국민의 위대함입니다. 그리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국민은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새로운 정부를 만든 이는 광장에서 촛불을 든, 직접 들지 않았어도 마음을 보탠 국민이었다는 평가다.

2017년 9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했다. 도입부를 '촛불'로 장식했다.

"나는 지난겨울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야말로 유엔 정신이 빛나는 성취를 이룬 역사의 현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촛불혁명은 협력과 연대의 힘으로 도전에 맞서며 인류가 미래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마 미디어를 통해 목격했던 촛불혁명의 풍경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십만, 수백만의 불빛, 노래와 춤과 그림이 어우러진 거리 곳곳에서 저마다 자유롭게 발언하고 평등하게 토론하는 사람들, 아이들과 손잡고 집회장을 찾는 부모들의 환한 표정, 집회가 끝난 거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청년들에게서 느껴지는 긍지. 그 모든 장면이 바로 민주주의였고 평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시민의 집단지성으로 이어진 광장이었습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나 자신도 오직 시민의 한 사람으로 그 광장에 참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했습니다."


세계 지도자들 앞에서 '촛불혁명'이라고 명명했다. 촛불이 유엔의 정신이며 역사의 현장이라고 공표했다.

2018년 10월 28일은 촛불집회 1년이었다. 문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 소감을 내놓았다.
 
촛불은 끝나지 않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국민과 함께 가야 이룰 수 있는 미래입니다.
끈질기고 지치지 않아야 도달할 수 있는 미래입니다.
촛불의 열망과 기대, 잊지 않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앞세우겠습니다.
국민과 끝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자신의 당선만으로는 촛불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역설했다. 갈 길이 멀다는 하소연이다. 그 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직원들을 독려하거나 질책할 때마다 '촛불'을 이야기했다. 5년간 지속했다. 2022년 5월 9일 퇴임 연설에까지 이어진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헌정질서가 무너졌을 때 우리 국민은 가장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촛불집회를 통해, 그리고 헌법과 법률이 정한 탄핵이라는 적법절차에 따라, 정부를 교체하고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 국민들의 성숙함에 찬탄을 보냈습니다."

촛불 민심에 부응했나
 

2017년 6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6·15 남북정상회담 17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 입장, 참석자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자, 이제 이런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민심에 부응했나? 제대로 못 했기에 정권을 넘겨주지 않았나?

정치는 올림픽과 다르다. 참가와 노력, 선의에만 의의를 두지 않는다. 결과를 내놔야 한다. 모두 알 듯 '정권이 경쟁 세력에게 넘어갔다'가 결과다. 지지자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후과가 벌어지고 있다. 

'촛불 시민의 열망을 말아먹은, 실패한 정부'인가? 앞서 밝힌 바대로 평가가 진행될 것이다.

이미 시작됐다. 왜? 비교 대상이 생겼으니. 당장 현 정부 정책, 제도, 정치와 비교되고 있다. 2024년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즈음해 이전 정부와 현 정부 간 성적표가 비교될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를 잇겠다는 주장이 나올 수도, 손절하겠다는 선언이 나올 수도 있다.

2017년 6월 15일 문 대통령의 6‧15 남북정상회담 17주년 기념식 연설은 이렇다.

"김대중 대통령님은 한반도 문제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 주셨습니다. 분단 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 관계의 대전환을 끌어냈습니다. 남과 북의 평화통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 주변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문제를 이끌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중략)

김대중 대통령님의 화해·협력정책과 노무현 대통령님의 평화·번영정책을 오늘에 맞게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과 함께해 나겠습니다."


이전 민주당 정부의 계승과 발전을 말했다. 정치 세력은 계승과 극복, 발전을 말해야 한다. 그런 곳에라야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다. 한국에서 군사독재 정권을 계승하겠다는 세력은 미미하다. 정치사에서 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일부 소란과 노욕만 남았다.

계승, 발전을 떳떳하게 천명하지 못하는 정치 세력은 뿌리 없는 이익집단에 불과하다. 선거 때가 오면 사람과 색깔을 바꾼다. 정권을 얻더라도 '떴다방' 정부나 다름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툼과 탐닉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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