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0 18:09최종 업데이트 23.08.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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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지난 7월 5일 백선엽씨의 동상이 세워졌다. 동상은 2분30초 간격으로 360도 회전하도록 제작됐다. ⓒ 조정훈

 
윤석열 정부는 이승만과 함께 친일파 군인 백선엽을 띄우고 있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백선엽은 지난 7월 5일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백선엽 동상 제막식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게 됐다. 동상이 된 그는 360도 회전하면서 대한민국 전체를 두루 살피고 있다.

다음날인 7월 6일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데 직을 걸겠다'고 맹세했다. 7월 24일에는 윤석열 정부가 백선엽의 국립묘지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했다.


윤석열 정부가 백선엽을 칭송하는 것처럼, 백선엽도 또 다른 친일파를 높이 평가한 일이 있다. 360도 회전 동상을 세워주는 일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글을 통해서나마 꽤 높게 평가해 준 인물이다.

항일조직 소탕에 두각 드러낸 김창룡
 

이승만과 악수하는 김창룡 ⓒ 국가기록원

 
백선엽은 1956년 1월 30일 서울 용산구에서 발생한 김창룡 육군특무부대장 피살 사건의 군사재판장이었다. 백선엽은 2012년 자서전인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서 "내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김창룡 장군 피살과 그 재판"이라고 한 뒤 김창룡의 업무 능력을 경이적으로 평가했다.

"김창룡 장군은 당시 누구나 그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는 방첩 분야의 최고 베테랑 군인이었다. 아울러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총애하는 군인 중의 하나였다. 그의 권력은 아주 강했다. 최고위 장성들 또한 그의 예리한 수사력의 안광을 벗어날 수 없는 경우가 흔했다. 방첩 분야뿐 아니라 일반 정보 계통에서도 그는 막강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선엽이 높이 평가한 김창룡은 1916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출생했다. 덕성보통학교와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를 졸업한 그는 실 만드는 제사공장 직공과 만주 창춘(장춘)역 직원을 거쳐 운명적인 직장을 찾게 됐다.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게 될 업무와 연관되는 직장이었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군속(군무원)으로 들어간 일이 그것이다.

헌병대 군무원이 된 그는 25세 때인 1941년에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입소했다. 그곳 교육을 이수하고 헌병보조원이 된 그는 같은 시기에 백선엽이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됐다. 백선엽이 만주국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에서 항일 투사들을 토벌했다면, 그는 일본군 헌병대에서 항일 투사들을 정탐하고 추적했다.

'베테랑 군인'의 길로 들어선 김창룡은 1943년에 만주국 동북부인 싱안베이성(흥안북성)에 배치된 뒤 혁혁한 성과들을 거뒀다. 다음은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창룡 편의 설명이다.

"1943년 싱안베이성을 중심으로 지하 공작을 펴던 중국공산당의 거물 왕진리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관동군 헌병대는 왕진리를 이용한 역공작으로 소·만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던 9개 지하 조직을 색출하고 조직원 50여 명을 체포했다. 이 공로로 헌병 오장(伍長)으로 특진했다."

중국공산당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 조직이었다. 그런 조직의 거물급을 검거해 소련·만주 국경지대의 9개 지하조직을 색출하는 데 기여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3년 이후에 그가 거둔 실적과 관련해 "2년 동안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암약하면서 50여 건이 넘는 항일조직을 적발했다"고 기술한다.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에 숨어들어 매월 2개 정도의 항일 조직을 적발했으니,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백선엽이 "예리한 수사력의 안광"을 운운하며 칭찬할 만했던 것이다.

김창룡은 4년 이상 일본 헌병 혹은 그 군무원으로 일했다. 일본이 보기에 그는 밥값을 '넘치게' 했다.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거나 혹은 일제 패망이 좀 더 늦어졌다면, 훨씬 높이 승진했을 게 분명하다.

헌병에서 전범으로... 다시 육군 특무부대장으로

항일 투사들을 잡아주고 친일 재산으로 살아가던 그의 삶은 29세 때인 1945년에 일본 패망으로 위기에 처했다. 서른쯤에 그는 헌병에서 전범으로 전락했다. 일제 패망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전범 죄목으로 소련군에 붙들렸던 것이다.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는 1992년 4월 12일, 김창룡을 김구 암살의 실질적 지령자로 지목했다. 그러고 나서 이틀 뒤에 나온 14일 자 <한겨레> '암살 지령자 김창룡 그는 누구인가'는 "해방 뒤 친일 전력 때문에 숨어 지내던 김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압송되던 중 열차에서 탈출, 월남했다"라고 설명했다.

인생이 끝나는가 싶다가 극적으로 부활한 김창룡은 만주군 출신들의 도움으로 남한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3기를 졸업한 그는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발탁됨으로써 첩보 업무를 다시 맡게 됐다. 그런 다음, 국군에 대한 숙정(肅正)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해방 이전에 추격한 사람들과 비슷한 부류를 공격했다. 그가 해방 이전에 붙잡은 사람들과 해방 이후에 붙잡은 사람들이 상당 부분 비슷했던 것이다.

김창룡은 "예리한 수사력의 안광"으로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군사책 박정희를 색출해 검거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부류의 좌파만 잡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추격한 좌파의 상당수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제에 쫓기던 독립운동권 인사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좌파가 아니었다가 해방 뒤에 비로소 좌파가 된 사람이 1, 2년 내에 김창룡의 시야에 들어갈 만큼 거물급이 되기는 힘들었다. 그의 수사망에 포착된 좌파의 상당수는 해방 이전부터 좌파였던 사람들이다.

해방 이전에 좌파가 된 사람들은 좌파가 좋아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를 무너트리기 위해 그 반대편 이론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연구했던 사람들이다. 그가 해방 직후에 잡으러 다닌 좌파의 상당수는 그런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박헌영과 함께 항일투쟁에 참여한 조선공산당은 해방 뒤 남로당으로 이어졌다. 김창룡이 그런 남로당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사실은 해방 이후의 그가 오로지 좌파를 잡으러 다녔다기보다는 독립투사 출신들도 잡으러 다녔음을 의미한다.

1949년에 김구가 암살된 뒤 암살범 안두희를 감형하고 군에 복귀시켰고, 예편 뒤에 후견인까지 했던 장본인이 김창룡이다. 독립투사 김구 암살에 관련된 사실은 해방 이후의 김창룡이 잡으러 다닌 사람들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김창룡의 본업이 해방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8년 8월 27일 자 <경향신문> 1면 좌상단을 비롯한 당시의 언론보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친일파들은 "반민족자를 처단한다는 자는 공산당 주구다"라는 논리로 친일청산에 맞섰다. 친일파 처단을 외치면 공산당이라는 논리는 자신들의 반대 진영을 빨갱이로 간주하던 친일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김창룡이 잡으러 다닌 좌파의 상당수가 실제로는 항일투사들이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사례다.

김창룡은 해방 전에는 일제의 녹봉을 받고 그런 일을 했다.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의 월급을 받고 그 일을 했고,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녹봉을 받고 그 일을 했다. 소련군에 체포돼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크게 보면 그에게는 '경력 단절'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역시, 현충원에 누워있다
 

2020년 6월 6일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무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충청5.1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김창룡 묘에서 파묘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어떤 인재를 신임하느냐에 따라 지도자의 그릇과 격이 드러난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육군특무부대장 직을 맡기고 별 두 개를 달아준 사람은 이승만이다.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공안정국을 주도하면서 독립운동가나 진보 진영을 빨갱이로 몰아 대한민국에서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해쳤다. "예리한 수사력의 안광"을 가졌다는 그는 실적을 쌓기 위해 좌파가 아닌 사람들도 빨갱이로 몰아 체포했다. 1974년 7월 31일 자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김창룡 저격 사건 편에 따르면, 1956년에 그를 저격한 사람들은 그가 40여 건의 공안사건을 조작한 사실을 진술했다.

김창룡은 특무공작을 통해 일제에 발탁되고 두각을 보였다. 그가 만주군 출신들의 추천으로 국군에서 중용되고 이승만의 총애를 받은 것도 특무공작 때문이었다. 진짜든 가짜든 그는 빨갱이들을 많이 잡아 왔고, 그의 실적은 일제의 전쟁 수행이나 이승만 정권의 공안정국 유지에 기여했다.

그랬던 그가 결국에는 특무 때문에 몰락했다. 1956년 1월 30일 서울 용산에서 그를 저격한 사람들은 그의 부하였던 허태영과 특무부대 출신들이었다. 특무로 일어났다가 특무로 몰락한 셈이다.

이승만 정권은 김창룡의 공을 잊지 않았다. 사망 당일에는 육군 중장으로 추서하고, 2월 3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최초의 국군장을 거행했다. 무덤 앞에 세운 묘갈에는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 역사학자인 이병도의 글도 넣어주었다.

묘갈명에서 이병도는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한 것을 망자의 핵심 공적으로 평가했다. 해방 직후의 숙군이 독립운동가 출신이나 진보 진영을 겨냥한 것임을 모를 리 없는 역사학자가 '숙군'이란 표현으로 김창룡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미화했던 것이다.

이병도는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피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라고 찬미했다. 백선엽과 이병도가 호평한 이 '호국의 신'은 현재 대전현충원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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