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7 09:41최종 업데이트 23.07.2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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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간섭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 벌어진 뒤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내 반혁명 운동 차원의 간섭 전쟁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한민족·러시아 대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 있다. 박환 수원대 교수의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1920년 3월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한·러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섬멸하는 니항 사건이 있었다"라고 서술한다.


사할린섬 최북단의 바다 건너 맞은편인 러시아 니콜라옙스크에서 한국 독립군 약 380명이 가담한 연합부대가 일본 군인과 관헌이 포함된 700여 명을 살해했다. 강 하구인 니콜라옙스크에서 일어났다 하여 니항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은 일본의 즉각적 보복을 불러왔다. 일본은 다음 달인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월 참변'이라는 한국인 탄압을 자행했다.

이때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인물들은 최재형과 더불어 김이직·엄주필·황경섭 4인이다. 이 중에서 김이직의 본명은 김정일이다. 김이직은 고향에서 민란을 일으켰다가 도주한 뒤 사용한 가명이다.

이들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된 뒤 사법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형을 당했다. 일본 육군성 발표를 보도한 1920년 5월 9일 자 <동아일보> 기사 '총살 사건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은 이들이 체포 당시 무기를 들고 저항했을 뿐 아니라 이송 도중에 탈출했기 때문에 총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가족들은 물론 대다수 한인들이 일본 측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2007년 <역사문화연구> 제26집에 실린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4월 참변 당시 희생된 한인 애국지사들'은 지적한다. 무기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저항했겠느냐는 분위기기 팽배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이때, 그 누구보다 분개한 인물이 김이직의 동생인 김마리아다. 그는 일본 헌병대에 가서 시신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화장이 끝났다고 하자, 그럼 화장터를 알려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래도 되지 않자 "김이직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평남 용강에 가서 김이직의 두 아들인 김린성·김남성 형제를 만나 일본 돈 5천 원을 장만하여 하르빈에 갔다가 일본 헌병에게 수색당하여 압수당하였다"라고 위 논문은 독립투사 이인섭의 글을 인용해 설명한다.

운동자금을 하얼빈에서 압수당한 상태에서도 동생 마리아는 복수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때 그가 처단하고자 한 대상은 김이직의 동업자인 함동철이다. 함동철이 오빠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본군의 밀정으로 활동

<친일인명사전> 제3권 함동철 편에 따르면, 함동철은 '김정일'보다 1년 빠른 1874년 평안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190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 지회에 가입했다"고 이 사전은 설명한다. 25세 때, 안창호가 만든 공립협회의 지부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듬해에 함동철은 최재형이 회장이고 홍범도가 부회장인 권업회에 들어갔다. "1910년대에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에서 활동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그런 그가 덕창국이라는 약국을 공동 경영하게 됐다. 조제되지 않은 건재 상태의 약재를 파는 약국의 동업자가 됐다.

위의 반병률 논문은 "덕창국은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정치 망명자들이 서신 연락을 하거나 유숙해가는 장소였으며 경제적 원조를 받는 곳"이었다고 설명한다.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그런 곳의 동업자가 됐으니,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비중 있는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업 자금의 출처가 불순했다. 일본인이 그 출처였다. 밀정이 되어 김이직과 덕창국을 정탐하라고 일본 측이 돈을 제공했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인에게 자금을 제공받아 우수리스크의 건재약국 덕창국의 주임 김이직과 함께 약국을 운영하면서 김이직의 활동을 정탐했다"고 말한다.

4월 참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북쪽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한국인들이 대거 체포될 때 함동철도 함께 붙들렸다. 외형상으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이었으니 체포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교민들 사이에서는 참변의 배후에 함동철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반병률 논문은 "함동철이 덕창국의 재정을 잠식하고자 김이직을 일본헌병대에 무고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라고 설명한다. 그의 밀정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약국을 가로채고자 김이직을 밀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모양이다. 밀정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의 인간성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얼마 안 있어 함동철은 친일파로 커밍아웃했다. "4월 참변 직후 니콜리스크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간화회의 회계 감사원으로 일하면서 일본군의 밀정으로 활동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기술한다. 일본군 밀정이라는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친일단체 간부로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함동철은 연해주에 오래 있지 못했다. 1874년 대만 출병 이래 승승장구하던 일본제국주의의 해외 침략이 러시아혁명 간섭전쟁인 시베리아 출병에서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을 무산시키는 데 실패한 일본군은 1922년 10월 말에 시베리아에서 철수했다. 이것이 함동철을 그곳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독립운동 가장한 친일로 재산 축적
 

1923년 4월 12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간화회장은 유형에"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일본군이 철수한 뒤, 연해주에서는 독립운동 진영에 의한 친일청산이 전개됐다. 1923년 4월 12일 자 <동아일보>는 "근일 모처의 통신에 의한즉 로국(露國) 니코리스크에 잇는고려공산당에서는 이전에 친일 행동을 하던 자와 유산자로서 무산자를 멸시하던 자들을 일일이 처벌"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전 간화회댱 김야꼽은 이십 년간 귀양을 보내고, 그 외에 몃 사람은 각 이천 원 벌금에" 처해졌다고 전했다. 함동철이 속한 간화회의 회장이 20년 유배형을 받았으니, 그곳 간부였던 함동철에게도 불똥이 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함동철은 기사에 언급된 '벌금에 처해진 몇 사람'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는 연해주를 빠져나와 처벌을 피했다. "혐의자 함동텰 외에 몃 사람은 합이빈으로 도망"했다고 위 기사는 보도했다.

함동철 일행은 합이빈으로도 불리고 하르빈으로도 불린 하얼빈에 간 뒤에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곧 체포하러 가겠다는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경고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 기사는 "곳 톄포한다고 선언하얏슴으로, 도망하야 온 자들은 엇지할 줄을 모른다더라"라고 상황을 전했다.

5천 원을 들고 하얼빈에 들어갔다가 일본 헌병에게 압수당한 뒤 복수의 의지를 불태우던 김마리아는 함동철이 하얼빈으로 도주한 뒤 행동에 나섰다. 김마리아는 또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이번에도 조카들을 찾아갔다. 김이직의 아들들이 토지를 매각해 장만한 자금을 받아든 그는 그 돈을 들고 지린성(길림성)에 가서 고무상점을 차렸다.

그런 다음, 지린성 동쪽인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의 하얼빈으로 다시 가서 함동철을 추적했다. 그곳에서 함동철을 찾아낸 그는 복수를 마무리했다. 반병률 논문은 이인섭의 글을 근거로 "고무상점을 낸 후 한 달 후, 하르빈에 가서 그곳에서 상업을 하던 함동철을 살해했다"고 한 뒤, 고무상점을 정리하고 연해주로 돌아갔다고 설명한다.

함동철은 독립운동을 가장한 친일 활동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약국 동업에 필요한 자금까지 일본에서 얻어냈을 정도다. 하얼빈으로 도주한 뒤에 상업을 경영할 수 있었을 정도로 그의 수중에는 친일 재산이 두둑했다.

하지만 그것을 오래 지키기 힘들었다. 일본의 시베리아 출정이 실패하고 연해주의 한국 독립운동이 막강해서, 그는 친일재산을 오래 붙들 수 없었다. 거기다가 그를 추적하는 김마리아의 집요함은 친일재산 유지에 꼭 필요한 그의 친일 육신의 존립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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