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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나라 전통의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경상북도 안동을 찾아간다. 단양의 숙소에서 출발해서 죽령터널을 통과하고 영주와 예천을 지나 안동으로 들어왔다. 안동 하회마을 안까지는 직접 들어갈 수는 없고, 하회마을 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야 했다.
 
안동찜닭과 간고등어의 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다.
▲ 안동의 대표음식 안동찜닭과 간고등어의 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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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을 관람하기 전에 하회마을 입구에 있는 하회장터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장터 좌우에는 안동의 대표음식, 안동찜닭을 파는 많은 식당들이 즐비하다. 나는 가족과 함께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자리를 잡은 한 식당에 들어가서, 안동찜닭과 안동 간고등어가 함께 나오는 정식을 주문했다. 안동찜닭의 맛이 과하게 달지 않고 담백했다. 관광지 식당가에 있는 식당 기준으로 보면 맛이 아주 훌륭한 곳이다.

하회마을 매표소 앞에서 하회마을 종합안내소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셔틀버스를 타고 구릉을 타고 오르내리는 길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하회마을에 대한 해설사의 안내를 받고 싶어서 종합안내소에서 안내시간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하회마을 해설해 주시는 분이 마을 입구의 안내도 앞에서 곧 안내를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가족과 함께 급한 걸음으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하회마을 안에서
 
하회마을 동쪽의 화산 줄기가 낮은 구릉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흐르고 있다.
▲ 안동 하회마을 하회마을 동쪽의 화산 줄기가 낮은 구릉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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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河回)'는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회마을 동쪽에 화산(花山) 줄기가 뻗어 있고, 이 산줄기가 낮은 구릉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흐르고 있었다.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은 마을 맞은편의 부용대(芙蓉臺)와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회마을은 2010년에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그 문화적 가치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 
 
하회마을의 내력과 안동 양반문화의 답사코스를 알려주고 있다.
▲ 문화유산 해설사 하회마을의 내력과 안동 양반문화의 답사코스를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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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내도 앞에서 문화유산 해설사가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양진당과 충효당 등 우리들이 꼭 보아야 할 곳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해 주었다. 풍산 류(柳)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내력들을 알고 보니 마을의 기와집들마다 오랜 역사가 담겨있어 보였다. 특히 이 하회마을은 임진왜란 때에 영의정을 지내며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기에 힘썼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태어난 곳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가장 크다. 
 
하회마을 고택에서는 과거의 전통을 잇는 문화유산 제작과정을 만날 수 있다.
▲ 하회마을의 문화유산 하회마을 고택에서는 과거의 전통을 잇는 문화유산 제작과정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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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천히 하회마을 답사를 시작했다. 마을의 대체적인 모습은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기와집은 솟을대문이 우뚝 솟은 보물 제306호, 양진당(養眞堂)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사랑 마당이 열려 있고, 그 뒤로 사랑채가 높은 기단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사랑 대청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솟을대문이 우뚝 솟은 양진당 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사랑 마당이 열린다.
▲ 양진당 솟을대문이 우뚝 솟은 양진당 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사랑 마당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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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은 고려시대인 14세기에 풍산 류씨가 하회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을 당시에 세워진 집이다. 당시 하회마을 뒷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본 후에 하회마을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이 양진당이었기 때문에 현재도 고려말의 건축양식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건물 중 일부가 소실되어 17세기에 고쳐 지었는데, 사랑채는 고려의 건축양식이 남아있고 안채는 조선의 건축양식으로 남게 되었다. 고려말과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이 함께 남아 공존하는 소중한 고택인 것이다.
 
높은 기단 위에 자리를 잡은 사랑채와 연결되는 사랑 대청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 양진당 높은 기단 위에 자리를 잡은 사랑채와 연결되는 사랑 대청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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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에서 드물게 정남향인 양진당은 원래 99칸의 집이었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고택의 정취가 고즈넉했다.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 아래, 목조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제 기단과 계단의 묵은 세월이 이 집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잘 보존된 이 대종가(大宗家) 건물을 보고 있으니, 씨족 마을과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이끌었던 근엄한 분위기가 지금도 전해지는 것만 같다.

양진당 남쪽에 자리잡은 충효당(忠孝堂)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서 현재 보물 414호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류성룡이 생존시에 살던 집은 아니고, 현재의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류성룡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한 후, 단출한 삼간초옥에서 청렴하게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의 충효당은 그의 사후에 그의 문하생과 후손들이 지었고, 그 후에도 확장되어 지금은 52칸이 남아있다. 류성룡의 청백한 삶과는 달리 후손들은 큰 집에서 번창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그의 사후에 그의 문하생과 후손들이 지은 집이다.
▲ 충효당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그의 사후에 그의 문하생과 후손들이 지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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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이라는 이름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고 강조한 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현재의 충효당은 조선 중기를 대표할 수 있는 전형적인 사대부의 집이다. 고택의 솟을대문을 지나면 나오는 사랑채의 모습이 참으로 단아하면서도 편안하다. 문을 통과하면서 처음 접하는 사랑채가 종묘처럼 가로로 길게 이어지고 있어서 웅장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인다. 

충효당 남쪽에는 별도로 건립된 박물관인 영모각(永慕閣)이 류성룡의 귀중한 유품과 저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명칭은 류성룡이 풍산 류씨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책 '영모록(永慕錄)'에서 따왔다. '영모'는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류성룡의 피땀 어린 분투를 만날 수 있다.
 
충효당 남쪽의 영모각에는 류성룡의 귀중한 유품과 저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 영모각 충효당 남쪽의 영모각에는 류성룡의 귀중한 유품과 저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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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각 안에는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 안동에 돌아와 지은 국보, 징비록(懲毖錄)이 전시되어 있다. 징비록에 남겨진 임진왜란의 전황, 조정과 백성들의 수난상, 전쟁의 원인들을 읽고 있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하다. 임진왜란의 처참한 역사를 후세에 남겨 기억하게 하고자 한 리더로서의 류성룡의 진면목이 느껴진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이 도체찰사로 왕을 호종하고 군무를 총괄하면서 직접 손으로 쓴 기록과 함께 임진왜란 관련 문건 및 자료들이 담긴 류성룡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도 보물로 지정되어 후손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 임진왜란 동안 전란의 최고 책임자로서 직무수행에서 발생하는 사태에 대해 대비하는 방안을 건의한 진사록(辰巳錄), 임진왜란 전후의 일들을 기록한 난후잡록(亂後雜錄)에는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의 숨가빴던 활동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유교문화는 풍산 류씨의 씨족문화보다 류성룡이 남긴 임진왜란 당시의 국가적 업적에서 비로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류성룡이 전쟁의 위기에서 명장 이순신(李純信)과 권율(權慄)을 천거한 것만으로도 그는 우리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한 하회마을

하회마을 한복판, 한옥 사이의 작은 골목길을 지나자 마을의 가장 높은 중심부에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 있다. 이 신목은 한번 둘러보는 것 만으로도 하회마을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알 수 있다. 영험해 보이는 이 느티나무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로 이미 일본에까지 크게 소문이 나 있다. 하회마을 느티나무는 수 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으며 지금까지 우뚝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의 규모가 웅장하고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 화경당 집의 규모가 웅장하고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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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의 집들은 모두 이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낙동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집들이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으로 남향 건물로만 지어지지 않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서로 교감하고자 한 선조들의 집에 대한 자연스러운 접근이 아주 돋보인다.

하회마을을 떠나면서 낙동강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소나무 숲을 걸었다. 강을 따라 넓게 펼쳐진 모래 퇴적층 위의 만송정(萬松亭) 숲은 조선 선조 때에 류성룡의 형인 류운용이 강 건너편의 바위 절벽인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마을 북서쪽의 부족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를 심으면서 유래한 숲이다. 현재는 1906년에 다시 심은 소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마을 북서쪽의 부족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를 심으면서 유래한 숲이다.
▲ 만송정 숲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마을 북서쪽의 부족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를 심으면서 유래한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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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공기 속의 울창한 강변 소나무들이 참으로 포근하게 다가온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빗 속에서 안동의 명승과 유적지를 계속 둘러볼 것인지를 고민했다. 우리는 한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쉬다가 다시 안동 여행 길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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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동, #안동여행, #하회마을, #류성룡, #충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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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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