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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며 시작된 한 시대는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다. 고르바초프의 집권부터가 그랬다. 앞서 두 명의 서기장이 1년 남짓한 집권기를 보내고 사망한 뒤, 고르바초프는 54세의 젊은 나이에 서기장이 됐다.

이 시기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은 이미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고착화된 관료제 사회 안에서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 '귀족'으로 군림했다. 경제의 성장은 정체됐다. 소련-아프간 전쟁에는 막대한 군비가 소모됐다. 고르바초프는 이 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집권 직후부터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고, 부패한 관료주의적 경제체제를 몰아내자고 말했다. 자유로운 정치와 자유로운 시장을 말했다. 그렇게 변화와 개혁의 시대가 이어졌다.

고르바초프는 정치개혁을 통해 소련의 권력구조를 개편했고, 정보의 개방과 자유화를 추구했다.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군축과 핵무기 제약을 이끌어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다. 불합리하고 부패했던 경제 구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도 이어졌다. 소련의 전체주의는 그렇게 조금씩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1985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1985년).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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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련의 경제와 정치가 가지고 있던 기초체력은 고르바초프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부실했다. 급격한 자유경제의 도입은 물가의 폭발적 상승과 경제 혼란을 가져왔다. 국가의 힘으로 억누르고 있던 갈등과 욕망은 갈 곳을 모르고 분출됐다. 동유럽에서부터 공산주의 정부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소련에 소속돼 있던 구성국 내에서도 독립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소련 내 개혁 반대파는 1991년 8월 쿠데타로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감금했다. 소비에트 연방에 소속된 러시아의 대통령 옐친은 시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며 쿠데타 세력을 몰아세웠다. 시민들이 소련군의 바리케이트를 밀고 국회의사당 진입을 시도하자 군은 철수했고, 결국 쿠데타 세력은 몰락했다. 고르바초프는 그렇게 다시 크렘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쿠데타 이후의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쿠데타 주역과 측근 세력이 제거되자 고르바초프 주변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쿠데타 진압의 선봉장이었던 옐친은 이제 고르바초프와 같은, 아니 고르바초프를 넘어선 권력을 누리기 시작했다.

소련은 혼란에 빠졌다. 쿠데타 이전에는 소련에 잔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구성국들도 이제는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소련 공산당은 쿠데타 연루를 이유로 소련 전역에서 완전히 활동을 정지당했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은 사실상 그 기능을 다했고, 연방의 대통령인 고르바초프의 운명도 뻔히 보이는 결말이었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의 옐친, 우크라이나의 크라우추크, 벨라루스의 슈시케비치까지 세 구성국의 최고 지도자가 소련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을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소련의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세 사람의 합의에 저항할 권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남아있는 구성국들은 하나둘 소련에서 탈퇴했고, 12월 16일 카자흐스탄의 연방 탈퇴로 이제 소비에트 연방에는 단 하나의 구성국도 남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다음날 공화국평의회의 결의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은 완전히 해체됐다.

그렇게 2차대전 이후 이어졌던 소련과 미국의 냉전 시대는 끝났다. 어느 한 축의 완전한 붕괴라는 형태로 종식됐다.

붕괴 이후의 러시아

소련이라는 이름뿐인 국가의 붕괴도 누군가에게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겨우 그것을 비극이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의문하게 된다.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 나아가 구 공산권 국가는 소련 붕괴 이후 오랜 기간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다시 독재로 돌아간 국가도 있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 피를 흘려야 했던 국가도 있고, 소련 시기의 영광을 지금까지도 회복하지 못한 국가도 있다.

고르바초프를 몰아내고 집권한 옐친은 그대로 러시아의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옐친은 더 강한 권력을 원했다. 의회와 권력을 분점하는 형태의 헌법에 만족하지 못했다. 옐친은 불법적으로 러시아의 의회를 해산했다. 러시아 의회가 이에 반발하자 군 병력을 동원, 국회의사당에 포격을 가하고 의사당을 점거했다. 의회를 지지했던 각 지방의회도 일괄적으로 해산됐고, 옐친의 의회 해산이 불법이라 판시한 헌법재판소장도 해임됐다.

이후 러시아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독재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소련의 말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며 시민들에게 '군에 저항하라' 외쳤던 옐친은 이제 없었다. 이제 스스로가 군을 동원해 의사당을 포격하는 독재자가  됐을 뿐이었다.

경제개혁도 실패로 돌아갔다. 가격 자유화 조치로 물가의 상승은 계속됐고, 정부는 이를 통제하지 못했다. 환율 자유화 이후 폭락한 루블화는 물가 상승을 더욱 추동했다. 정부가 민영화한 국가의 기반시설은 일부 자산계층이 독점하며 올리가르히라는 신흥 재벌계급의 등장을 낳았다. 공장과 기업은 매각되거나 해체됐고, 재벌의 금고에 달러가 쌓이는 사이 실업자는 늘어만 갔다.

자유와 개방은 이제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도 글라스노스트도 빛바랜 구호일 뿐이었다. 이제 러시아는 다시 독재와 독점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폭락한 지지율과 건강 문제를 안고 1999년 12월 31일, 옐친은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렇게 정권을 계승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총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역사의 반복

넓은 시각에서 봤을 때, 소련의 붕괴와 러시아의 성립 그리고 다시 이어진 독재에 이르는 역사는 단지 현대에 벌어진 특수한 비극이 아니었다. 이것은 러시아가 그 역사 내내 끝없이 반복해 왔던 어느 두 사상의 충돌이었다.

한편에는 러시아가 서구주의적 가치를 따라 자유와 개방을 향해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가 유럽의 일원이며, 그 어느 국가와도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한 편에는 러시아는 러시아만의 정의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가 유럽에 속하지 않는 슬라브 국가의 맹주이자 패권국이며, 자유와 민주는 서구의 것일 뿐 러시아의 몫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쪽에는 고르바초프가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옐친과 그를 계승한 푸틴이 서 있었다. 더 뒤로 돌아가면 한쪽에는 레닌이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스탈린이 서 있었다. 한쪽에는 표트르 대제가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알렉산드르 3세가 서 있었다. 러시아의 근대사란 이 두 사상의 끝없는 충돌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실각했고, 소련이 붕괴한 뒤 오랜 기간 생존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미 그렇게 30년이 넘게 시간은 흘렀다. 그 사이 옐친과 푸틴이 이끈 러시아는 다시 독재와 전체주의에 발을 들였다. 고르바초프가 해체하려 한 전쟁과 긴장은 이미 크림반도 병합과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가장 명백한 형태로 부활하고 말았다. 사라졌다 생각한 통제와 전쟁의 역사는 그렇게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역사의 반복은,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사진이 8월 31일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바초프 재단 본부에 설치돼 있다.
 고르바초프의 사진이 8월 31일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바초프 재단 본부에 설치돼 있다.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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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고르바초프는 그 상금으로 언론사 <노바야 가제타>(Новая газета) 설립을 지원했다. 지금까지도 러시아의 비판적 언론사로 남아 있는 노바야 가제타의 편집장 드미트리 무라토프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31년만에 이어진 기묘한 반복이었다.

그렇다. 역사의 반복은 단지 어느 한 세력의 집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푸틴의 장기집권이 이어지고 전쟁이 벌어지며 온 세계가 다시 긴장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반복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러시아라는 땅에서는 다음 세대의 고르바초프가 변혁과 자유를 꿈꾸며 독재와 전쟁에 맞서고 있을 것이다.

소련을 해체한 마지막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역설적이게도 소련 성립 이후에 출생한 최초의 서기장이었다. 그는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소련이라는 국가가 온전히 배출한 첫 번째 서기장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실각 이후 30년이 흘렀다. 그를 끝으로 이제 소련의 지도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역사의 한 줄기는 끊기지 않을 것이다. 그 반복이야말로, 소련의 마지막이지만 다시 첫 번째였던 고르바초프가 러시아라는 땅에 남긴 씨앗이 될 것이다.

경직되고 통제됐던 소련 사회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고, 갈등과 대치의 시대에 평화를 말했던 고르바초프라는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가 현실적으로 뛰어난 정치인이었는지, 그의 정책에 더 나은 방향은 없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유와 개방을 말하며 한 시대에 흔적을 남긴 이상, 그 이름을 잊을 수는 없다. 그가 민주와 자유의 편에 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자리를 쉽게 지울 수는 없다. 러시아가 독재와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오늘에 이르러, 다시 새 시대의 고르바초프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러시아, #소련,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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