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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편집자말]
내게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학창 시절 친구들과 친정엄마, 중학교 때 은사님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과 방학 계획을 세우며 마음속 생각을 활자화하니 보고 싶은 마음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남편의 휴가에 맞춰 8월에 친정과 시댁을 찾아뵙기로 했지만, 그렇게 가족이 함께 움직이다 보면 가족을 건사하다 정작 에너지를 쏟아야 할 곳은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여름방학이 시작된 날, 친정행 KTX에 홀로 몸을 실었다.

그래, 한 번 올라가보자
 
엄마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하셔서 몰래 찍어야 했어요
 엄마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하셔서 몰래 찍어야 했어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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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산에 올라 찍은 사진을 가족 단톡방에 몇 장 올릴 때마다 친정 엄마는 산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특히 북한산 계곡물에 발을 담근 사진을 보고 너무 부럽다 하셨다. 난 매주 가는 산인데 엄마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리적 거리는 가족 간의 작은 일상의 나눔조차 여의치 않게 한다.

혹시 몰라 캐리어에 등산화를 챙겨 넣었다. 올해 74세인 엄마가 산에 오를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계곡물에 발 담그기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산에 못 가더라도 좋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엄마와 단둘이 외식하고 카페에서 여유롭게 차 한 잔 마신 후 집에 돌아와 방바닥에 널브러져 실컷 수다 떨기. 그것만으로도 내게 주어진 2박 3일은 오롯한 '쉼'의 시간일 터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마는 내 캐리어에 든 등산화를 보고 좀 고민을 했다고 하셨다. 딸이 좋아하니 함께 산에 오르고는 싶지만, 산에 오른 지 너무 오래된 데다 노쇠해진 스스로의 몸 상태를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눈치채고 "등산화는 혹시나 해서 가져온 것"이라며 안심시켰지만 엄마 마음은 또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이틀째 아침이 되자, 엄마는 "그냥 서서히 올라가 보자"라며 아침 일찍부터 산에 갈 채비를 하셨다. 우린 멀리 돌아가더라도 오르기에 가장 무난한 코스를 택해 함께 무등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크지 않은 길이었지만 74세 엄마에겐 평지가 아닌 길이 수월할 리 없었다.

"엄마, 언제든 힘들면 그냥 돌아가도 돼. 너무 무리하지 마."
"그래그래. 좀 힘들긴 하지만 산에 오니 진짜 좋구나! 이 맛에 네가 그렇게 매번 산에 가나 보다."


그렇게 엄마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산에 올랐다.
 
엄마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하셔서 몰래 찍어야 했어요
 엄마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하셔서 몰래 찍어야 했어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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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예전 기억으로 중머리재('중봉'이라고도 부름, 617m) 정도까지는 오를 수 있을 거라고 하셨지만, 한 시간 여쯤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걸어 도착한 토끼등에서조차 좀 힘들어 보였다.

"엄마, 이 정도면 많이 왔어. 그만 내려가도 돼."
"내가 또 언제 이렇게 와 보겠냐.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더 가 보자."


그렇게 엄마와 난 무등산 토끼등을 거쳐 중머리재를 향해 다시 천천히 올랐다. 토끼등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흙과 돌이 있는 오르막 산길이었지만 엄마는 생각보다 잘 올라 주셨다.

엄마가 힘들어할 때마다 쉴 때면 난 여전히 내려가도 좋다고 했지만 엄마는 다시 못 올 길이라며 멈추지 않으셨다. 오르는 도중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엄마 목소리에는 숨은 턱에 차지만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자네, 내가 지금 어디 가고 있는 줄 아능가? 내가 무등산 중봉에 올라가고 있다니께. 나 대단하지?"

그렇게 엄마는 대단하게도 617m인 무등산 중머리재에 오르셨다. 과거의 엄마(나)와 미래의 내(엄마)가 나란히 담긴 사진을 보니 어쩐지 뭉클했다.

오롯이 함께 보내는 시간
 
무등산 중머리재에 오른 친정 엄마
 무등산 중머리재에 오른 친정 엄마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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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마지막으로 무등산에 오른 뒤 14년이 지났다고 하셨다. 60세를 마지막으로 무등산과는 이제 연이 끝난 줄 알았노라 하셨다. 10년이 넘어 올라보니 과거 엄마의 기억 속 중머리재와 달라진 모습에도 신기해하시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엄마는 하산 길을 더 힘들어하셨다. 내려올 때 무릎 관절에 더 무리가 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하산 길에 만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목에 대시고는 비로소 "살 것 같다"라고 하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늙은이랑 오느라 팍팍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네가 고생했다."
"무슨~ 엄마를 보니 계속 관리만 잘하면 나도 70대까지도 산에 오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구먼."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내릴 때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했었는데, 복병은 산을 다 내려오니 있었다. 녹초가 되신 엄마의 몸도 걱정되고 날도 더워서 택시를 잡아타고 돌아가자는 내 의견과 버스를 타면 되는 걸 왜 비싼 돈을 쓰냐는 엄마의 의견이 충돌한 것이었다.

74세 엄마의 고집을 꺾기엔 50살인 나는 너무 젊었다. 한 시간여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노곤해진 나는 엄마 옆자리에서 잠이 들어 버렸다. 엄마는 아무리 피곤하셔도 버스를 타고 주무시는 법이 없다.

그에 반해 나는 버스 좌석에 앉았다 하면 잠이 온다. 엄마가 절대 안 주무실 것을 알기에 하차할 곳을 놓칠 걱정 없이 잠이 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73년생 딸은 49년생 엄마를 의지해 잠을 청했다.     

엄마는 등산 후 2~3일이 지나자 걷기 힘들 정도로 다리가 아팠다고 하셨다. 너무 무리했다고, 너무 힘들면 병원에라도 다녀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내 걱정에, 엄마는 "영광의 상처"라며 웃으셨다.

지인들께 무등산에 오른 무용담을 전하는 것도 즐거움이라 하셨다. 무엇보다, 끝까지 못 오를 줄 알았는데 결국 중모리재까지 오른 자신이 기특하다고 하셨다. 내 덕분이라고도 하셨다.

나이가 드실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의 교류를 줄여가시는 엄마.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어지면 우울증에 빠지기 쉽고 그렇게 자존감도 점점 떨어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원거리에 떨어져 사는 딸인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이번에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노모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뭔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식과 함께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사람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만 있다면 잘못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며 주었던 큰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드려야 할 때. 노모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때가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됩니다.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친정엄마, #산행,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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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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