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2 04:57최종 업데이트 22.08.02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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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8일 오후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소재 외무성 이쿠라공관에서 박진 한국 외교부 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회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전범기업 재산 현금화 절차에 박진 장관의 외교부가 뛰어들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김성주 할머니가 전범기업을 상대로 신청한 상표권·특허권 매각명령사건과 관련, 외교부가 대법원 민사2부 및 3부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보도에 따르면, 외교부는 '정부는 한·일 양국 공동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과의 외교 협의를 지속하고 있으며, 민관협의회 등을 통해 원고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의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내용을 의견서에 담았다.


의견서 제출이 '대법원 민사소송규칙'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해 '외교적 노력을 경주 중'이라고 행정부가 밝히는 것은 외교 절차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재판을 지연시켜 달라는 메시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이런 '재판 지연'은 경우에 따라 '사건 종결'로 귀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양승태 사법농단 시절의 불행한 일들, 즉 재판이 지연되는 도중에 피해자들이 사망한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양승태 대법원 재판지연 기시감

징용 피해자인 고 여운택 할아버지는 평양 이발사였다. 스무 살 때인 1943년, 일본에 가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제철(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 오사카공장 직원으로 자원했다.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오사카에 가서였다. 공장이 아니라 강제노역장이었다. 숙소는 각목 창살로 둘러싸여 감옥이나 진배없었다.

이남에 정착한 '평앙 이발사'가 소송을 건 것은 74세가 된 1997년이다. 그는 손해배상청구의 길이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해에 그는 일본 법원에 제소했다. 여기서 패소한 뒤로는 2005년부터 한국 법원을 두드렸다. 1심, 2심 연달아 패소했다.

3연패 뒤에 거둔 첫 승은 2012년 대법원 판결이었다. 대법원이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던 그는 "죽을 곳 가서 일한 거 못 받게 하는 게 안타까웠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라고 감격해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89세였다.

다만 2012년 대법원 판결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판단해보라며 원심 법원에 돌려보내는 판결이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고등법원은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라 여운택 할아버지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일본제철이 대법원에 재상고를 했다. 실익이 없는 재상고였다. 대법원이 심리를 진행하지 않고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결정이 내려지는 게 일반적인데도, 그 일반성이 양승태 대법원 하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재판이 한없이 지연됐고, 여운택 할아버지의 생은 2013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는 외교부도 함께 가세한 결과였다. 2018년에 양승태 사법농단 실태가 폭로될 때 드러난 것처럼, 외교부 역시 재판 지연을 거든 책임이 있었다.

당시 공개된 법원행정처 문건에 따르면 "판결 확정 시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다"며 "대법원의 신중 처리를 요망한다"는 정부 입장이 법원에 전달됐다. 여운택 할아버지가 작고하기 얼마 전인 2013년 9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이 작성한 문건에는 "외교부와 관계를 고려해 신중히 판단할 필요.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기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적혔다. 외교부와 양승태 대법원이 공조해서 절차를 최대한 지연시켰던 것이다. 그때와 비슷한 일이 2022년에 또다시 되풀이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윤석열 정부 보도
 

7월 31일 자 <요미우리신문> 기사 '전 징용공 문제에서 현금화 회피 노리나' ⓒ 요미우리


이번에 외교부가 의견서를 보낸 일에 대해 일본 언론도 주목했다. 한국 외교부의 태도에 주목한 7월 31일자 <요미우리신문> 기사 '전 징용공 문제에서 현금화 회피 노리나(元徴用工で現金化回避狙いか)'도 그중 하나다.

이 기사는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30일 일·한 최대 현안이 된 전 징용공(옛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소송 문제에서 한국정부의 대응을 설명하는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고 밝혔다"라고 한 뒤 "일한관계 개선을 지향하는 윤석열 정권은 의견서 제출로 현금화를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압류 재산의 현금화를 회피한다는 것은 언뜻 쌍방 합의에 의한 문제 해결을 도모한다는 말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전범기업을 빼고 한·일 양국 국민과 기업이 위로금을 지급해주는 대위변제 방식에 크게 기울어 있다. 전범기업을 사실상 면책시키는 쪽으로 경도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압류재산 현금화를 회피하는 것은 전범기업 편에 섰음을 의미하는 것과 진배없다. <요미우리신문>는 한국 정부가 의견서를 제출한 목적이 현금화를 회피하는 데 있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가 한국 국민들을 편들고 있지 않는 현실이 일본 신문 보도에도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외교부에 대한 우호적 시각은 박진 장관의 방일 결과를 보도한 7월 20일자 <지지통신> 기사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한국, 일본 측의 유연 기대(韓国、日本側の軟化期待)'라는 제목의 기사는 일본 측이 피해자들에게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으면 한국 정부가 국민들을 설득하기 힘들 정도로 상황 타개가 쉽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한국 정부로서는 표면적으로 해결을 위한 작업을 하는 것으로써 재판소에 의한 현금화 움직임에 브레이크를 걸 의도(思惑)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위 기사는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보내기 전에 보도됐다. 한국 정부가 문제 해결을 지향하고 있다는 표면적 외형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법원의 절차 진행에 브레이크를 걸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기사는 평했다. 한국 외교부의 '성의'가 일본 언론에도 읽히고 있는 셈이다.

염치없는 외교부

외교부 의견서에 '한·일 양국의 공동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외교부가 합리적 해결 방안을 모색 중'이라는 대목이 있다. 위 <요미우리신문>도 한국 외교부가 '일·한 양국의 공동이익'을 언급하는 의견서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한국 국민의 이익은 일본 정부가 사과·배상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여는 데 있다. 과거 문제를 미해결로 남겨두려는 일본은 과거지향적 한일관계에 묶여 있다. 외교부와 일본 측이 추진하는 그 같은 방향은 한국 국민의 이익에도 맞지 않고 객관적인 세상 이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것이 '한·일 양국의 공동 이익'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외교부는 '합리적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는 명분으로 재판절차에 개입하고 있지만, 외교부가 추진하는 방향은 절대로 합리적이지 않다. 가해자가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법이다. 전범기업을 배제하고 제3자들이 위로금을 주는 방법이 합리적이 될 수는 없다. 당사자 간에 합의가 도출되지 않으면 법원이 법률에 입각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 방법이다.

외교부는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열린 때가 1951년이다. 피해자들을 위한 해결 방안을 70년 넘게 도출해내지 못한 외교부가 지금도 여전히 '노력 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염치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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