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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건 뭐지?'

이른 아침, 다리미 판이 세워져 있는 창가에 서서 남편의 옷을 다림질하고 있었다.
펼쳐둔 셔츠 위에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있을 때였다.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마주 보이는 베란다 구석, 까만 물체가 꿈지럭대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두리뭉실한 뒷태는 흡사 살이 찐 고양이 같았지만, 꼬리가 길고 얼굴이 날렵하고 뾰족했다. 거기다 작지만 사람 같이 손가락 마디가 있는 손을 가졌다. 그 손가락으로 피크닉 파라솔을 꽂는 통 안에 밤새 고인 빗물을 퍼서 손을 씻고 있었다.

앙증 맞은 모습으로 사람처럼 손을 씻고 있던 생물체는 나를, 아니 정확히는 집 안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까만색과 짙은 회색이 섞인 라쿤이었다. 언젠가 동물원에서만 보았던 야생 동물 라쿤을 집 안에서 보고 있자니 보고 있어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긴 했지만 독일 주택가의 라쿤 출몰이 '세상에 이런 일이?' 정도는 아니다.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도 라쿤의 공식 방문이 여러 차례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집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라쿤을 친절한 이웃집에서 촬영을 해주었다. 그래서 사진으로 보았고 그들의 소리를 들었으며 비가 새는 지붕을 보고 알았다. 물론 그때의 그 라쿤이 저 라쿤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독일 동물원에 살고 있는 라쿤.
 독일 동물원에 살고 있는 라쿤.
ⓒ 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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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주택가에 웬 라쿤?

라쿤은 몸길이 40~70cm 무게 3.5~9kg 사이의 포유류다. 잡식성에 야행성 동물인 라쿤은 북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야생 너구리과 동물이다. 아메리카너구리라고도 불리우는 라쿤은 1900년대 이후 동물원에서 탈출했거나 운반 도중 사라져 유럽에도 서식하게 되었다.

손을 자주 씻는 습성을 가진 라쿤을 독일에서는 '바쉬베어(Waschbär)'라 부른다.
직역하자면 '씻는 곰'이라 하겠다. 물에 무언가를 맨날 씻고 있어 깔끔 떠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라쿤의 오래된 사냥 습성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런 라쿤이 원산지인 북아메리카에서 멀고 먼 독일에 서식하게 된 시작은 이러했다. 

1934년 캐나다에서 라쿤 두 쌍을 데려다 독일 동물원에 기증하기 위해 운반을 하던 중 카셀 근처 에더제(Edersee)에서 잃어버린 후 독일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201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동안 독일 전역에 약 130만 마리의 야생라쿤이 서식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라쿤 두 쌍, 네 마리로 인해 유럽에도 야생라쿤이 살게 되었고 독일에서 라쿤, 즉 바쉬베어의 원산지는 카셀이 된 셈이다.
 
독일 주택가 베란다로 찾아온 라쿤
 독일 주택가 베란다로 찾아온 라쿤
ⓒ 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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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집 들어가듯 우리집 지붕을 오르는 라쿤

이른 아침, 전날 야근하고 퇴근한 사람처럼 부스스한 모습으로 베란다에 출몰한 라쿤은 세 마리였다. 베란다의 나무 기둥을 붙들고 날렵하게 차례로 올라가던 라쿤들은 마치 자기네 집 들어가듯 자연스레 지붕으로 올라갔다.

몇 년 전 라쿤이 지붕을 망가뜨리고 큰아들 방에 빗물이 새고 나서 지붕 수리를 하고 라쿤 방지템으로 철판을 붙였다. 라쿤이 올라가다 미끄러지도록 말이다. 그런데 라쿤이 그 철판을 밀림의 왕자 타잔이 나무를 타듯 그렇게 잘 올라갈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런 세 마리의 라쿤을 보고 심란해진 우리는 곧바로 지붕 수리 전문 업체에 연락을 했다.

9년 전 주택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우리는 한국의 빌라 같은 '보눙'에 살았다. 그때까지는 라쿤의 심각성을 잘 알지 못했다. 라쿤은 귀엽게 보이는 외양과는 다르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꾼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주택의 빗물 배수관을 나무 타듯 올라가 지붕을 뜯어 놓는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지붕 고치는 일을 하는 기술자를 닥데커(Dachdecker)라고 부른다. 라쿤이 뜯어 놓은 지붕을 닥데커를 불러 수리하면 손상 상태에 따라 적게는 몇 천 유로 많게는 수만 유로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막대한 손실을 입지 않기 위해 가정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라쿤이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방지판을 곳곳에 설치하는 것 뿐이다. 주택가를 지나 다니다 보면 라쿤이 지붕 위로 올라 가는 길목인 빗물을 내보내는 배수관 그리고 벽면 등에 투명한 방지판이 붙어 있는 집들을 자주 보게 된다.
 
독일 주택에 설치된 라쿤 방지템.
 독일 주택에 설치된 라쿤 방지템.
ⓒ 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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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의 무법자, 라쿤?

라쿤을 집에서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우리집도 이미 여러 차례 지붕 수리를 거듭했다. 모두 라쿤이 한 짓이다. 지난 번에는 라쿤이 땅굴 파듯 한쪽 지붕을 지속적으로 파놓아 방안으로 빗물이 줄줄 새기도 했다.

원래 야생라쿤의 서식지는 물이 가까운 숲이다. 그런데 먹이를 구하기 쉽고 새끼를 낳기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돌아 다니다 민가의 주택, 특히나 지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라쿤은 먹이를 찾기 위해 30km 전방까지 다닌다고 한다. 최고 속력 24km/h를 달릴 수 있는 라쿤은 빠르고 영리한 동물이며 주로 가족끼리 무리 지어 다닌다. 여러 마리가 함께 지붕을 지속적으로 뜯다 보면 어딘가 취약한 곳에 틈이 생기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라쿤이 시내나 주택의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은 다반사다. 그래서 카셀에서는 야간에 밖에 재활용품 쓰레기 봉지를 세워 놓거나 음식물 쓰레기통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 주택가를 산책하다 보면 자물쇠가 달린 음식물 쓰레기통을 집 밖에 두고 사용하는 집들이 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다가 쓰레기통 안에서 빤히 쳐다 보고 있는 라쿤과 눈이 마주친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다. 손가락이 발달되어 있고 영리한 라쿤들은 쓰레기통 뚜껑 정도는 가뿐하게 들어 올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라쿤은 날카로운 갈고리 모양의 손톱을 이용해 나무를 잘 탄다. 그렇다 보니 새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나무 위에 있는 새 둥지에서 새알을 남김 없이 먹어치워서 조류 생태계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 귀여운 침입자는 생태계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무법자인 셈이다.
 
독일 주택가 베란다에서 라쿤이 지붕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모습.
 독일 주택가 베란다에서 라쿤이 지붕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모습.
ⓒ 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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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주택 베란다에서 라쿤이 지붕으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
 독일 주택 베란다에서 라쿤이 지붕으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
ⓒ 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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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쿤은 자연보호법과 무관하다

생태계 무법자 라쿤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연보호법으로 보호되는 야생동물인줄 알고 있다. 우리도 그랬다. 그러나 라쿤은 더이상 자연보호법의 보호 대상인 야생 동물이 아니다. 예전에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내에서 개체 수가 적었던 라쿤은 자연보호법으로 관리되는 야생 동물이었다. 야생라쿤은 번식력이 좋아 해를 거듭할수록 개체 수가 크게 늘어났고 주택의 창고, 지붕 등을 수없이 망가뜨려 피해를 입히고 있다. 

그럼에도 함부로 라쿤을 잡거나 사냥해서는 안 된다. 주택에 피해를 입힌 라쿤을 덫을 놓아 잡는 것은 사냥 라이센스가 있는 라쿤 사냥꾼, 즉 '바쉬베어 예거'라는 전문가만이 할 수 있다. 또 사냥꾼이라 해도 독일의 많은 주가 라쿤의 번식기인 3월부터 6월 사이에는 사냥을 법적으로 금하고 있다. 이 기간에는 임신한 라쿤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기간에 몰래 밀렵을 하다 들키면 최고 5천 유로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2016년과 2017년 사이에 급증하던 라쿤으로 골머리를 앓던 정부에서 전국적으로 일부 사냥을 허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10년간 라쿤의 개체수가 더 증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맞닥뜨렸다고 한다. 야생동물들의 종족번식 본능이 극도로 자극되어 급증했다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

그 후 카셀에서 번식기를 제외한 시간에 허락된 라쿤의 사냥은 한 해 2천여 마리로 제한됐다. 현재 카셀의 라쿤 숫자는 현재 수만 마리 이상 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 숫자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독일 주택가에 설치된 라쿤 방지템.
 독일 주택가에 설치된 라쿤 방지템.
ⓒ 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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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주택가 모습
 독일 주택가 모습
ⓒ 김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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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


태그:#독일, #주택가, #주택, #지붕, #라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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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카셀 미대에서 서양회화를 전공하고 현재는 독일 개인병원 의료팀 매니저로 근무 중입니다. 생생한 독일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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