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일본의 기업인 단체 게이단렌(경단련, 經團連·경제단체연합회) 대표단 접견에서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네번째부터 허창수 전경련 회장, 윤 대통령,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 2022.7.4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일본의 기업인 단체 게이단렌(경단련, 經團連·경제단체연합회) 대표단 접견에서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네번째부터 허창수 전경련 회장, 윤 대통령,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 2022.7.4
ⓒ 대통령실 제공

관련사진보기

 
적극적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접촉이 다소 잠잠해진 상태다. 나토정상회의를 계기로 추진했던 한일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윤석열 정부가 6.1 지방선거에 승리하고도 국정을 확실히 주도하지 못하는 상황과 더불어,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오는 10일 참의원선거 때문에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기 힘든 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경단련(게이단렌, 일본경제단체연합회) 대표단이 4일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총리 등을 만났다. 또한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과 함께 제29회 한일재계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엔 비회장단인 삼성·SK·현대자동차·LG도 참여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 회장(오른쪽)과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이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제29회 한일재계회의에 입장해 자리에 앉고 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 회장(오른쪽)과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이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제29회 한일재계회의에 입장해 자리에 앉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형식상으로는 일본 경제계를 대표하는 단체의 방한이지만 과거 사례를 비춰보면, 실질적으로는 일본 정부의 의중이 담긴 방문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한일재계회의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은 양국 재계뿐 아니라 국가간 이해관계도 함께 담고 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입각해 양국관계를 구축한다(제3항), 비자 면제 프로그램 부활을 통해 민간 교류를 정상화시킨다(제5항), 민주주의·시장경제 가치에 입각해 한일관계와 동북아 평화에 기여한다(제6항)는 등의 내용도 담겼다. 

1984년 3월 9일자 <동아일보> 5면의 경단련 특집 기사는 "경제대국 일본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다"라며 "자민당 총재 겸 내각 수상이 이끄는 행정부가 그 하나요, 재계의 총리라고 불리는 경제단체연합회의 회장이 이끄는 대기업 총수들의 집합체 곧 경단련 회장단이 또 하나의 재계 내각으로서 군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번에 발표된 한일재계회의 공동성명은 경단련이 여전히 상당한 위상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국제적 영향력 키워나간 경단련

소위 '재계 내각'이 등장한 것은 일본 패망 직후였다. 패전 이전의 경제단체들로 구성된 경제단체연합위원회가 1945년 9월 18일 결성됐고, 이를 모체로 1946년 8월 16일 경단련이 발족했다.

2020년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이 발행한 <주요국 사용자단체의 현황과 역할 비교분석>에 따르면 재벌의 발호가 일본 군국주의를 더욱 부추겼다고 판단한 연합군최고사령부(GHQ·SCAP)는 '권력집중 형태를 띠지 말 것' '재벌세력을 대변하지 말 것' '전쟁 책임를 기용하지 말 것' 등의 제약 사항을 경단련에 적용했다.

억눌린 채로 출범했음에도 경단련은 재계뿐 아니라 국가 전체를 이끌어가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자민당을 틀어쥔 경단련의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경단련은 1955년 자민당 탄생에 개입했을 뿐 아니라 정치자금 제공으로 자민당을 먹여 살리는 방법으로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는 이후 경단련이 정부의 경기 대책이나 예산편성 등에까지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사례 중 하나는 미키 다케오 내각(1974~1976) 시절에 있었다. 앞서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는 "재계 이익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되면 수상일지라도 결코 장수하기 어렵다"라며 "76년 어느날 자민당 부총재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경단련 도코 회장을 방문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도코에게 '미키 군을 (정권에서) 끌어내릴까 하는데~' 하고 새로운 정변 의사를 비쳤다. 시이나가 도코에게 미키 축출을 통고한 것은 '미키 수상에게 정치자금을 대지 말라는 압력이었다'고 경제평론가 아키모토 히데오는 밝혔다. 이로부터 당시 재계의 '미키 이탈' 현상은 대세가 됐으며 자금이 끊긴 미키 수상은 선거에 대패, 결국 퇴진해야 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앞줄 세 번째)을 비롯한 양국 단체 소속 회장단들이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제29회 한일재계회의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도쿠라 마사카즈 게이단렌 회장(앞줄 세 번째)을 비롯한 양국 단체 소속 회장단들이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열린 제29회 한일재계회의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경단련은 옛 소련과의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중일수교의 물꼬를 트는 데도 기여했다. 또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엔 한국 방문 등을 통해 박정희 정부의 대일정책을 간접적으로 거들었다. 식민지배 문제 해결 없이 국교정상화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또 다른 방식으로도 경단련은 한국 문제에 개입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김대중 납치가 1973년 8월 도쿄에서 발생해 한일관계가 경색된 이후, 경단련은 한국을 자극하는 발언을 던져 박정희 정부를 압박하는 데도 가담했다.

도쿄에서 제6회 한일민간경제위원회 회의가 진행되던 기간이자 김대중 납치사건의 여파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을 때인 1974년 3월 2일, 우에무라 고고로(植村甲午郎) 경단련 회장이 한국의 원자재 부족 문제를 언급하다가 망언을 입에 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내지에서도 부족 상태"라는 표현을 써 한국 여론을 크게 자극했다.

한국이 식민지라는 전제 아래 일본을 '내지'로 지칭한 경단련 회장의 망언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친일 콤플렉스를 갖게 된 박 정권을 곤란케 만들었다. 경단련 회장의 공식 발언으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한국 국민과 일본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경단련은 한국 독재정권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5.18 광주학살 3개월 뒤인 1980년 8월 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신일본제철(전범기업) 회장이자 경단련 회장인 이나야마 요시히로(稲山嘉寛)는 축원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 시기는 경단련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훨씬 셀 때였다. 경단련 회장의 전두환 지지는 효과가 있었다. 1980년 8월 28일자 <경향신문> '전 대통령 체제 출범... 해외의 반응'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계 저명인사들의 발언과 함께 소개된 경단련 회장의 메시지는 전두환이 국제적 지지를 받는 듯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기여했다.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경단련

경단련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우리 민족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질서의 긴장도가 이완되면서 남북 간에 훈풍이 불었던 1970년대 초반, 1990년대 초반, 2000년 전후에 경단련은 대북 접근을 강화하거나 대북 발언을 늘렸다.

남북관계가 전환기에 들어설 때마다 경단련이 이런 행보를 보인 건 일본 경제계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북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측면도 있었다. 이는 북한의 대외관계 역량이 남한에 덜 쏠리도록 만드는 측면도 있었다.

2004년 5월 22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해 7월 8일자 <폴리뉴스> 기사 '고이즈미의 일본판 북풍?'에 따르면, 이 회담에 대한 일본 사회운동가들의 관점이 6월 14일·15일 고려대에서 열린 '아시아 반전평화운동의 현황과 전망'이란 토론회에서 표시됐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경단련이 고이즈미 방북을 환영하고 일본이 대북수교를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 아래와 같은 의견을 내놨다고 보도했다.

"첫째, 일본이 북한에 경제협력 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북한이 일본제품을 구입하게 된다(만든다). 이들은 1965년 한일조약을 예로 들었다. 둘째, 남북철도의 이용과 러시아 가스파이프라인의 통과를 위해서다. 셋째, 한일 FTA 교섭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북일수교가 필요하다. 외적 요인으로는 남북의 자주적 통일이 진전됨에 따라 (북일) 수교가 늦을수록 일본 자본의 손해가 예상된다는 점이다."

한반도에 해빙 기운이 불 때마다 경단련이 북한 문제에 적극적 태도를 취하게 된 데는 '남북이 접촉하는 데 일본이 가만 있으면 일본 기업들이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경단련이 여러 방법으로 한국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경단련이 지난 4일과 5일에 한국 재계와 정계 요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양국가간 협력을 다짐하는 공동성명도 발표했다. 참의원선거로 자민당 정권의 보폭이 좁아진 상황에서 경단련이 나서서 윤석열 정부의 의중을 재차 확인한 셈이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배상 없이 한일관계를 이전 수준으로 복원하려는 일본 재계의 욕망이 이번 경단련 방한에서도 드러났다. 결정적 순간마다 한국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곤 했던 경단련이 이번에도 한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태그:#경단련, #일본경제단체연합회, #게이단렌, #한일관계, #식민지배 문제
댓글1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