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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며 임신중단권리 폐기해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 같은 퇴보를 막기 위해, 한국에서도 '낙태죄' 폐지 후속 조치를 제대로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정 이후 3년, 길었던 공백의 시간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모두를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소속 단체 회원들이 지난 2020년 청와대앞에서 '정부의 낙태죄 관련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 입법예고안이 여성에 대한 처벌을 유지하고 건강권, 자기결정권, 사회적 권리 제반을 제약하는 기만적인 법안'이라며 규탄 시위를 벌였다.
 모두를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소속 단체 회원들이 지난 2020년 청와대앞에서 "정부의 낙태죄 관련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 입법예고안이 여성에 대한 처벌을 유지하고 건강권, 자기결정권, 사회적 권리 제반을 제약하는 기만적인 법안"이라며 규탄 시위를 벌였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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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태(임신중단)'를 모른다. 나는 '임신'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잘 모른다는 게 얼마나 중대하고 위급한 일인지, 여성들은 안다. 내가 월경을 시작한 14살부터 평균 완경 나이인 50세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월경을 한다고 가정해본다. 가정에 따르면 나는 약 36년 동안 1년에 12번씩, 평생 동안 무려 432번의 월경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중 우리나라의 전국 평균 출산율은 가임기 여성 1명당 0.837명이기에(2020년 통계) 나 또한 평생동안 단 한 번 출산을 한다고 가정하면 나머지 400번 이상의 가임기에는 임신을 피해야 하는 '피임'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기간 동안 한 번이라도 피임에 실패하게 되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면 나는 임신중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학교는 나에게 피임이니 임신이니 임신중단이니 하는 것들은커녕 월경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구석기니 뗀석기니 하는 것들은 외우라고 하고 시험까지 보면서도 반대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것들은 가르쳐주지 않다니, 다시 한 번 국가의 직무유기에 분노할 따름이다. 이렇게 내 몸과 관련된 지식이 '공백'과 가까운 상태일 때 나에게 월경, 피임, 임신, 임신중단과 그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페미니즘이었다. 공교육도, 사교육도, 대학수업도 아닌 페미니즘책과 강의들 말이다.

지난해 페미니즘 북카페 두잉에서 읽었던 <아기 낳는 만화>는 충격이었다. 임신한 당사자가 임신 후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자세하게 그린 만화책이었다. 임신이 된 그 순간부터 몸의 변화가 정말 많았다. 임신이란 매일의 고통을 견디고 버텨내야 하는 일이었다.

임신을 하면 어떤 검사를 받게 되는지, 어떤 영양제가 필요한지, 돈은 얼마나 드는지, 어떤 고통이 생길 수 있고 몸의 변화는 또 어떻게 되는지, 선택지는 무엇이 있는지, 무엇보다 임신하는 동안 그리고 출산 이후 여성의 삶은 어떤지에 대해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풀어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이런 어마어마한 지식을 나는 가정으로부터든 교육으로부터든 정확하게 배운 적이 없다. 성평등의 관점이 반영된, 양육자들이 유용하게 쓸만한 자녀 성교육 책이 최근에야 활발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개인들이 페미니즘 리부트 전까지 정보의 공백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겪었을 아픔이 그려진다. 

가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당사자가 나에게 임신중단과 관련해 아는 정보가 있는지 물어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콘돔이 찢어졌다며 내가 속한 단톡방에서 유산유도약물 구입처를 물어왔는데, 뭔가 이상해 자세히 물어보고 상황을 파악을 해보니 성관계를 한 뒤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사후피임약을 먹으면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상에서 피임에 대한 교육이 얼마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콘돔이 찢어졌다고 바로 유산유도제를 찾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여성의 몸과 건강에 대해 모르기에 임신이나 임신중단처럼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성하거나 더러운 일로, 또는 여자들의 엄살로, 나만 견디면 괜찮은 일로 여겨져 왔다. 누군가는 꼭 거쳐가야 하는 이 관문을 상처입지 않고 건너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임신중단에 대한 정보접근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해 필요한 정보들
 
미국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보장 판례 폐기 결정 다음 날인 25일(현지시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대법원(scotus)은 수치다'라고 적힌 피켓 등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날 임신 6개월 이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2022.6.26
 미국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보장 판례 폐기 결정 다음 날인 25일(현지시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대법원(scotus)은 수치다"라고 적힌 피켓 등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날 임신 6개월 이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2022.6.26
ⓒ 연합뉴스/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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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지난 6월 24일 연방대법원이 낙태금지법을 위헌으로 판결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개별 주에서 임신중단을 다시금 금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미국 시민들은 격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은 2016년 인공임신중절 처벌강화안이 보건복지부 입법예고안으로 발표된 뒤 시민들의 '낙태죄' 폐지 운동이 본격화되었고 결국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 '낙태죄'를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그리고 그 이후 대체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2020년 12월 31일부로 우리나라에서 형법상 '낙태죄'는 사라지게 되었다.

'낙태죄' 폐지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페미니스트들은 주장했다. 임신 출산만 가르치고 피임과 임신중단을 가르치지 않는 성교육은 쓸모 없는 것 아니냐고. 배우자나 부모의 동의서를 받아야 임신중단을 할 수 있는 건 어느 나라 법이냐고. 감당하기 힘든 시술 비용에 결국 법망을 피해 약을 구매하거나 그 과정에서 위험한 약을 사거나 돈을 잃게 되기도 한다고. 결국 '낙태죄'를 없애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다.

한국 역시 미국처럼 역사가 뒷걸음질치기 전에 어서 권리로서의 임신중단이 적극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각종 제도의 입법이 필요하다. 아마 지방자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사람에게 어떤 정보 제공이 필요한 지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로, 다양한 임신중단 방법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사람마다 건강상태와 몸이 다르듯이 임신이 되었을 경우 몸의 변화도 다양하지만 대략 임신 기간별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임신중단 방법과 그에 따른 장점과 단점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평소 자신의 월경과 건강상태, 경제적 상황,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맞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임신중단이 가능한 병원이나 약물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병원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고 임신중단을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나마 안전한 산부인과를 찾아가기 위해 오랜 시간 예약과 상담을 거쳐 먼 거리에 있는 병원을 다니기도 한다.

지자체가 임신중단이 가능한 병의원 리스트를 만들어서 지역 주민들에게 접근 가능하게 하면 좋을 듯하다. 또 혹시 모르는 해당 병의원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의료인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성도 있다. 간혹 현금결제만을 요구하는 병원에 대해 신고창구를 운영하거나 이런 요구를 개인이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면 좋겠다. 또 안전하게 유산을 유도하는 유산유도제 성분이나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약물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급할 때 활용할 수 있다.

셋째로, 직장이나 학교를 다니고 있다면 임신중단으로 인해 쉬어야 할 때 어떤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근로기준법 제74조에 따르면 유산이나 사산은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휴가를 줘야 하는 사안이지만 인공임신중절은 포함돼 있지 않다. 

때문에 임신중단을 한 사람은 임산부로서 보호받지 못하는 바람에 막상 아픈데도 병가를 쓰자니 진단서를 제출하기 어렵고, 연차를 쓰자니 부당한 진퇴양난에 놓이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진단서를 제출하지 않고도 휴가를 쓸 수 있는 방법이 제공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임신중단에 대한 '정치적 책임 공백' 메워야

이외에도 성과 관련된 건강은 인권과 직결되기에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접근가능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특히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할 수 있도록 피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스크린에 띄워놓고 알려주는 것, 콘돔 씌우는 법 정도로는 불충분하다. 경구피임약, 사후피임약, 미레나나 임플라논 같은 삽입형 피임기구, 정관수술이나 다양한 피임기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직접 보고 만지고 시술 방법을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지와 가격에 대한 정보도 필수적이다.

거기에 더해 임신에 대한 정보접근 또한 필수적이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삶의 여러 부분들을 배치해 나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임신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은 필수적이다. 난자, 정자, 수정란만 주구장창 보여주는 임신 과정 말고, 임신에 따른 몸의 변화와 필요한 처치, 비용에 대해서도 미화 없이 보다 적나라한 묘사와 정보가 필요하다. 언제까지나 모든 것을 유튜브에서 배울 순 없지 않은가.

정보가 있어봤자 나의 선택이 불법이 된다면 내가 얻은 정보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일례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2019년과 2021년 '위민온웹(women on web)'이라는 사이트의 접속을 차단했다. 위민온웹은 임신중지 관련 정보·상담, 임신중절 약물 배송 등을 제공하는 국제 비영리단체임에도 국내에서는 전문 의약품을 처방없이 일반인이 구입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사이트 접속을 차단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기관이 임신중지와 관련한 상담을 제대로 해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처럼 한국은 아직까지 권리로서 임신중단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기에 '낙태죄'는 현재 진행 중이다. 제도는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이 있겠지만, 당장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이 없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나영 대표는 '낙태죄' 폐지 이후 후속 입법이 되고 있지 않은 현재의 상황을 '입법 공백'이 아닌 '정치적 책임의 공백'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부디 임신중단권을 시급하게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으로 보고 이에 따르는 필수적인 권리들을 하루빨리 입법하기를 바란다.

태그:#낙태죄폐지, #인공임신중지, #인공임신중단, #인공임신중절, #정보접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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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운동하는 불꽃페미액션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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