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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공대 교문 밖, 박정희 이름이 적힌 현수막 아래 학생들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다. 1969년 서울대에 입학한 윤조덕 원장은 "공대 밖 좁은 길에서 박정희의 3선 연임 반대와 교련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했었다"고 기억했다.
 서울대 공대 교문 밖, 박정희 이름이 적힌 현수막 아래 학생들이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다. 1969년 서울대에 입학한 윤조덕 원장은 "공대 밖 좁은 길에서 박정희의 3선 연임 반대와 교련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했었다"고 기억했다.
ⓒ 윤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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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이승만이 영구집권을 기도하다가 1960년 4월혁명으로 쫓겨난 지 9년 만에 다시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강행했다.

정치학자 새뮤얼 버틀러는 '권력은 마주(魔酒)'라고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임자가 국민의 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장기집권을 기도하는 개헌을 강행한 것은 전혀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 무지한 행동이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것은 만고의 철칙이다. 1970년 3월 미모의 20대 여성이 한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총을 쏜 범인은 친오빠라고 경찰은 발표했지만 많은 의혹이 뒤따랐다. 1970년대 벽두를 장식한 이른바 '정 여인사건'의 막이 올랐다. 

사건은 거대한 정치스캔들로 비화하고 시중의 화제가 되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대정부질문의 이슈로 삼았다. 정 여인에게 아비를 알 수 없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박정희의 아들이냐, 국무총리 정일권의 아들이냐를 둘러싸고 의문이 꼬리를 이었다. 그녀는 정부의 특수층 아니면 불가능한 복수여권을 소지하였고 미화 2,000달러가 현금으로 나왔다. 신민당 조윤형 의원이 국회에서 풍자 가요시를 낭송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X이라고 말하겠어요.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것을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승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것을 죽고 나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주석 4)

권력층이 부패타락하고 경제발전의 과실이 특수층으로 집중될 때 일반 국민은 여전히 빈곤과 압제에 시달렸다. 정부가 서둘러 조직한 향토예비군은 청장년들의 공사활동을 억제하는 사슬이 되고, 일용노동자 등 서민층 생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박정희는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면서 가장 경계한 것이 대학생들이었다. 야당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분열과 매수 등 정치공작으로 조종하고, 노동계는 아직 크게 두려워 할 정도로 세력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론계 역시 경계의 대상이지만 사주ㆍ간부들을 대상으로 통제와 떡고물로 요리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학원이었다. 한일회담을 반대할 때는 수만 명의 학생들이 광화문까지 진출하여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1974년 대학가에서는 일제히 교련과 학교의 병영화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일었다.
 1974년 대학가에서는 일제히 교련과 학교의 병영화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일었다.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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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1970년대 초 대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학원병영화의 일환으로 군사훈련을 강화시켰다. 1971년 1학기부터 정규과목으로 채택된 교련교육을 종래 주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리고 집체교육까지 부과하여, 재학 중 무려 71시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 

교관도 전원 현역으로 교체하는 등 학원병영화를 강화ㆍ가속화시켰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한 조처였다. 일반 청장년들에게는 향토예비군으로, 대학생들에게는 교련으로 묶어 통제한 것이다. 이 시기부터 대학가의 핫 이슈는 교련반대에 모아졌다. 박정희는 교련반대 학생시위를 가혹하게 처벌했다. 군대로 징집한 학생도 많았다. 

학생들은 교련을 반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동서 화해 무드라는 세계사적 조류와 정면충돌한다.
둘째, 군비 확장에 몰두한다면 민족 자멸만을 초래한다.
셋째, 힘의 대결은 평화적 통일에 대한 무능을 표시하는 것이다.
넷째, 학생까지 무장해야 할 절박한 사태가 아니다.
다섯째, 단계적 특혜로 학생 서로를 분열시킨다.
여섯째, 이중 삼중의 병역의무 부과는 민주주의 원칙에 배치된다.
일곱째, 특혜 아닌 특혜로 학생들을 유혹하려는 것은 전체 학생들을 모독하는 행위다.
여덟째, 학생군사훈련은 실효성이 없음이 드러났다. (주석 5)


주석
4> <민주전선>, 1970년 4월 15일치.
5> <자유의 종>, 제8호, 1971년 3월 5일치.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지하, #시인김지하평전, #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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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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