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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요즘, 전북 군산은 선거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타임머신을 타고 아련한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하는 인물이 몇 있다. 50~60년대 지역 선거판을 뜨겁게 달궜던 김원전, 김판술, 백효기 등이다. 그중 김원전·김판술은 2012년 4월 <오마이뉴스>에 소개한 적이 있다.(관련기사: 먹고 보자 김원전, 찍고 보자 김판술!).
 
사진 왼쪽부터 백효기 전 전북도의원, 천주교 전주교구 박정일 주교. 강근호 전 의원(민선 군산시장 역임)
 사진 왼쪽부터 백효기 전 전북도의원, 천주교 전주교구 박정일 주교. 강근호 전 의원(민선 군산시장 역임)
ⓒ 강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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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라북도 최초 여성 도의원으로 기록되는 백효기(1908~1990)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백효기씨는 서울 출신으로 동덕여자고등학교 졸업 후 유학, 일본소화약전(日本昭和藥專)에서 약사 면허를 취득한다. 귀국 후 서울에서 삼성약국을 개업한다. 그는 국산품 장려회 간부로도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피난길에 나섰다가 군산에 정착, 명산동에 '백약국'을 연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사업에도 앞장섰던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군산의 모던걸'로 통했다.

신익희 후보 급서에 충격 받고 정치에 입문
 
제3대 정부통령 선거 앞두고 민주당 군산지구당 당사(1956)
 제3대 정부통령 선거 앞두고 민주당 군산지구당 당사(1956)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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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효기씨는 1956년 5월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급서하자 충격을 받고 정치에 입문한다. 그해 8월 군산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국의 조직적인 부정개표로 고배를 마신다.

사건의 발단은 계수원이 계산한 587표가 선관위원장에 의해 500표로 발표됐던 것. 당시 신문은 '개표장(시청)에 모인 100여 시민들은 재개표를 요구하며 철야집단농성에 들어갔으나 무장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몇 명은 투표함을 감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해 4월에는 선거 벽보와 현수막 훼손에 대비해 견대부대(肩帶部隊)가 등장하고, 민주당 군산시 지구당이 괴한들에게 피습을 다하는 등 군산지역 선거 분위기는 그야말로 참담 그 자체였다. 당시 민주당 당사는 중앙로를 경계로 경찰서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아래는 1956년 5월 9일 자 <경향신문> 기사 내용이다.
 
군산시내 선거판 상황을 보도한 1956년 5월 9일 치 <경향신문>
 군산시내 선거판 상황을 보도한 1956년 5월 9일 치 <경향신문>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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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씨가 서거한 5일 당지에서는 통행금지 시간을 이용하여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작당하여 시내에 첩부되어 있는 민주당 선거 벽보를 일제히 철거 또는 먹칠까지 하는가 하면 경찰서 정문 건너편에 있는 민주당 선거사무소에 붙어 있는 고(故) 신 씨의 부보(訃報)까지 먹칠을 하는 등의 무모한 행동이 자행되고 있어 일반 주민의 분격을 사게 하고 있다.(일부 현대어로 수정)"
 

그해 치러진 정부통령 및 지방의회 의원 선거는 '부정선거 종합백화점'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군산에서는 중상·모략 및 폭력이 난무했으며 민주당 선거사무소에 첩부(貼付)된 선전벽보가 까맣게 먹칠을 당하고 정체불명의 벽보가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보기 흉한 낙서까지 해놓아 뜻있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선거 때마다 관권 개입이 극에 달했던 시절, 백주 대낮에 자유당 당원들이 군산시 민주당 당사를 습격해 선거운동원 3명을 무차별 구타, 중상을 입히는 폭행사건도 발생했다. 이를 제지하고자 출동한 경관들은 수수방관하다가 사건 발생 30분 후에야 자유당 당원들을 연행했다가 곧바로 석방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청중들 손에 땀을 쥐게 했던 '대통령 향한 독설'
 
군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4·19혁명 제2주년 기념식(군산사범학교 1963년 졸업앨범에서)
 군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4·19혁명 제2주년 기념식(군산사범학교 1963년 졸업앨범에서)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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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효기씨는 1960년 12월에 치러진 도의회 의원선거에서 당선된다. 당시 나이는 쉰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첫 등원하는 날 "나는 일개 지방의원이지만, 200만 도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내가 죽는 날까지 4.19로 희생된 아들, 딸들의 혼을 머리에 이고 한평생을 열심히 살겠노라. 그리해서 그들의 한을 꼭 풀어주겠노라"라고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도의원 자격을 박탈당한다. 1961년 5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과 정당 활동을 금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초선 도의원임에도 장관을 지낸 김판술 3선 의원과 '막역지우'로 지냈던 백효기. 1963년 10월 어느 날, 군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윤보선 대통령 후보 지원유세 때 김대중, 박순천 등과 함께 연사로 나섰던 그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서울에서 내려온 박순천씨와 같은 여성으로 외모가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60, 1970년대 각종 군중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그의 독설은 청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군산 사람들은 그를 김옥선(장항·서천 지역 국회의원), 박순천(신민당 당수 및 고문) 등과 함께 한국 정치계의 '여성 트리오'라 칭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백씨의 연설에 "저 사람(백효기)이 만약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만인지상'으로 일국을 호령하는 지도자가 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청중도 있었다.
 
신민당 군산지구당이 도서지방의 부정선거 증거품으로 고발장에 덧붙여 낸 고무신, 녹음테이프 및 부재자 명단,(1967년 6월 21일 치 ‘동아일보’)
 신민당 군산지구당이 도서지방의 부정선거 증거품으로 고발장에 덧붙여 낸 고무신, 녹음테이프 및 부재자 명단,(1967년 6월 21일 치 ‘동아일보’)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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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부정선거(1967) 때, 차형근(공화당) 후보와 김판술(신민당) 후보가 대결한 군산에서는 공화당 후보가 도서지역 주민들에게 나눠줬다는 여자고무신 20켤레와 '공화당원이 고무신과 청주를 돌렸다'고 폭로한 섬마을(오식도) 이장의 녹음테이프, 선거 당일 출어 중이었는데도 투표한 것으로 돼있다는 120여 명의 어부 명단 등이 제시되어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신민당 군산지구당 부위원장이었던 백효기씨는 당사 2층에서 마이크를 잡고 당국의 부정선거를 폭로하면서 당사에 진입한 경찰들을 진두지휘한 경찰서장을 성토한다. 이때 방송을 듣고 있던 시민 40여 명이 백효기씨의 뒤를 따르며 '6.8선거는 무효'라고 외치며 행진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청소년 60여 명도 가세했다. 이때 백 씨는 난투극 끝에 경찰에 연행된다.

'통대선거'에 출마하려다 좌절된 이유
  
제13대 대선(1987)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 군산 유세장 풍경.
 제13대 대선(1987)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 군산 유세장 풍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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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집권을 꿈꿔온 박정희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한다. 이어 유신헌법에 따라 그해 12월 토론 없이 실시된 무기명 투표에 의해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에 앞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는 총선거(통대 선거)가 전국적으로 치러졌다. 군산 지역에서는 총 18명(군산 6명, 옥구 12명) 선출된다.

새롭게 구성되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게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권한이 부여된다는 소식을 접한 백효기씨는 '통대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단독으로 출마할 것이 예상되는 박정희 후보에게 반대표를 던지기 위함이었던 것. 백씨의 출마를 위해 이곳저곳 추천받으러 다녔던 강철영(백효기씨 사위) 씨에게 당시 상황을 들어본다.

"그때 경찰서 정보과에서 얼마나 치밀하게 음모를 꾸몄는지 장모님은 후보등록조차 못했죠. 출마하려면 100명의 추천을 받아야 했는데 그 역할을 제가 했거든요. 죽어라 뛰어다녔지만 친구 몇 사람 제외하고 모두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한 사람도 추전을 받지 못했어요. 관공서에 사발통문을 돌리고, 공화당 끄나풀들이 찾아다니며 추전해주면 자식까지 불이익당할 거라고 압력을 넣었으니 누가 추천하겠어요. 참 무서운 세상이었습니다."
 

이후 백효기씨는 야당 당수를 지낸 박순천씨가 신의를 저버리고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지지하고, 친5공 인사로 변신하자 실망한 나머지 정치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도의원으로, 반독재 권력비리 척결 등 정치투쟁을 전개하며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헌신했던 백효기. 그는 영면에 드는 1990년 11월 그날까지 군중집회나 정당 연설회에서 만나볼 수 없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군산신문>(1990년 10월 1일), <西海新聞>(1990년 11월 16일), <경향신문>(50~60년대), <동아일보>(50~60년대), 강철영 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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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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