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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기자말]
내가 ADHD 진단을 받지 못하고 정체성의 안개 속을 거닐 때, MBTI가 동아줄이 됐다. 결과가 안 맞는 사람도 많다지만, 내 결과의 정확성은 양궁으로 치면 카메라를 뚫었달까.

INFJ가 가장 드문 유형이라는 대목에선 거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그렇게 어딜 가도 겉도는 느낌이었구나! 그래서 평생 나랑 비슷한 사람을 못 만나봤구나! (내가 맹신자라 그런 건 아니다. 진짜 잘 맞았다니깐.)

역시 내 기준이긴 하지만, ADHD인 중에 성격유형 검사나 심리테스트를 섭렵하지 않은 사람 못 봤다. '도대체 나는 어떤 존재길래 이러는가.' 병명을 알기 전까지 혼란은 끝이 없다.

"이 사회에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없다고 느껴본 사람이라면 자기 내면에 어떤 근본적인 소외감, '외계성'을 감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책<사이보그가 되다>에서 김초엽 작가의 말이다. 외계성 짙은 사람에게 세상은 불시착한 행성과 같고, 자신에게 명확한 실체를 부여하는 건 이들에게 인생 자체에 버금가는 의미가 있다.

설명되지 않는 자신과 산다는 것  

내 친구는 ADHD가 네 글자라서 MBTI 유형 같다고 농담하곤 하는데, 그걸 들으면 엉뚱하게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세상의 무해한 별종들을 낙인찍는 요소가 언젠간 하나의 성격 요소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날도 오지 않을까?

나는 이 사회에서 명백히 비주류다. 비혼 여성 퀴어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정신장애와 신체적 지병을 가졌고, 이혼가정에서 자랐고, 지방대를 나와 지방에서 살고, 소속된 곳 없이 글을 쓴다.

하지만 나도 어떤 기준에선 주류이고 다수에 속한다. 부모님이 모두 한국인이고, 나도 이민자가 아니다. 외모는 눈에 띄는 점이 없고, 시스젠더(cisgender, 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성 정체성이 일치함)이고,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소수와 다수는 상대적 개념이다. 누구나 잠시라도 소수의 입장에 놓여 본 적이 있다. 소수 종교를 믿거나, 외국에 머물러 봤거나, 비주류 학문을 전공했거나, 모임에서 혼자만 여자/남자였다거나, 못 먹는 음식이 있었다거나. 소수자성에 대해 얘기하는 일은 자기 안의 소수자 서사를 돌아보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소외 속에서 나 역시 생각하게 됐다. 내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답을 내린 많은 생각들은 내가 만나온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외계성 보이지 않는 소외 속에서 나 역시 생각하게 됐다. 내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답을 내린 많은 생각들은 내가 만나온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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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건 일종의 권력이다. 소수일수록 자기를 변호할 상황은 많지만, 적당한 언어를 찾는 일은 더 어렵다. 소수자의 말들은 흔히 신뢰받지 못하거나 곡해된다. 접해 보지 않은 정보는 의심받기 쉽고, 다수의 해석은 다수의 기준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 차를 인식하는 건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가 된다. 

두 사람 사이의 '다름'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일 때, 소수의 특성을 가진 사람은 다수의 언어를 이용해 자신을 숨긴다. 모든 말과 행동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역산해 '선택'한다. 이 관계에서는 어디까지 진실할지, 서사를 잘라낼지 수정할지, 꾸며낸다면 어떤 얘기가 적절하고 뒤탈 없으며 관계의 진정성을 해치지 않을지 고민한다. 

공감의 골짜기를 혼자서 뛰어넘는 과제도 부여된다. 소수의 입장인 사람이 상대방의 세계에 감정 이입하여 원활히 소통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원이 돼야 할 자기감정이 누군가에게 돌봄 받지 못하면 지쳐간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오히려 고립에 가까워진다. 누군가는 골짜기로 추락해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소수자를 사회적으로 취약하게 하는 언어, 신뢰, 공감의 부족은 '당연히 너도 그렇겠지'라는 전제에서 시작되고, 이런 무의식은 사회적 무관심과 몰이해에서 출발한다. 강요 없는 강요로 커버링(covering, 사회적 낙인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훌륭한 소수자'가 되긴 싫은데

이 취약성을 넘어서는 건 꽤 까다로운 기술이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을 짚어내는 일. 자기 삶에 지친 이들을 눈살 찌푸리게 하지 않고 이해의 언저리까지 끌어당기는 일. 때로는 사회적 기여감을 주며 관심을 끄는 일. 상대의 고통이 소외되지 않게 하여 반감을 줄이는 일.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일.

냉정히 말해 소수자성을 드러내면서 호감을 유지하자면 자기연민과 피해의식, 분노와 억울함, 우울, 좌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필요가 있다. 인생을 얘기하면서도 켜켜이 쌓인 감정의 무게를 조절하는 내공이 요구된다. 소수자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매력자본'이다.

한동안 그게 분했다. 좁은 방에 나를 가둔 사람에게서 "왜 그러고 있어? 거기 갇히면 안 되지"란 말을 듣는 기분이었다. 세상과 인생이 내 맘에 적재한 쓰레기를 알아서 처리하고 마음의 평수까지 넓혀야 한다니. 너무하잖아?

하지만 나로선 그걸 넘어서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나로서 사랑받을 수는 없으니까. 여러 사람에게 지극히 사랑받더라도 자기자신으로 사랑받은 적이 없다면, 그 사랑은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를 가둔 이의 뜻에 동조해 그대로 살다 보면 숨이 막힌다. "나 언제까지 숨어 있어?"라고 물어오는 자아에게 "네 모습은 그대로 멋져"라고 말해봐야 자아는 안 믿어준다. 자기를 부정해온 사람이 세상과 삶을 긍정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난 그 감정 쓰레기들을 스스로 치워보기로 했다. 나 혼자 만든 쓰레기는 아니지만, 이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건 나라서. 넓어진 공간에 더 좋은 것들을 들여오고 싶고, 시야가 좁아져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이 없길 바라서다. 

약한 사람이 악해지기는 쉽다. 사는 게 힘겨워 남을 볼 여유를 잃을 때, 언더도그마(underdogma,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고 인식하는 현상)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겪은 사회적 폭력을 재생산한다. 하지만 자기 경험이 역지사지의 동력이 되면, 무관심과 몰이해를 넘어서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나르시시즘의 긍정적인 효과
 

<위대한 쇼맨>이란 뮤지컬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19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사업가 '바넘'은 샴 쌍둥이, 다모증·왜소증·거인증 환자, 고도비만인 등 당시로선 '괴물(freak)'로 취급받던 이들을 모아 자신만의 쇼를 만드는데, 이 쇼가 선풍적 인기를 끈다.
 
영화에서 사업가 바넘이 만든 최초의 서커스는 이 쇼를 만든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오고 자신을 사랑하는 계기가 된다.
▲ 영화 <위대한 쇼맨> 스틸컷 영화에서 사업가 바넘이 만든 최초의 서커스는 이 쇼를 만든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오고 자신을 사랑하는 계기가 된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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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춤도 대단히 좋지만, 이 영화에 깊이 빠져든 건 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건드려주는 요소 때문이다. 멸시받으며 숨어 지내던 이들이 자신의 기괴함을 자원으로 삼아 "이게 나다(This is me)!"라며 찬란히 드러내는 모습. 단순한 드러냄을 넘어, 손가락질 받는 이유를 매력으로 바꾸는 태도.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퀴어(Queer, 이상한)'로, 장애인들이 자신을 '크립(crip, 불구자)'으로 지칭하며 비하에 쓰인 용어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유치하게 표현하면 "그래, 나 OOO다. 어쩔래?"라는 태도랄까.

만일 나치독일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1순위 그룹으로 제거됐을 거다. 그러나 우생학적 서열을 거꾸로 뒤집어서 소소한 자부심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런 나르시시즘을 '쎈 척'이나 정신승리보다는 행복의 주도권을 남에게 넘겨주지 않는 방책이라 하고 싶다.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매력-정상성, 균형 잡힌 외모 등-의 좁은 틀을 넓히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삶의 유일하고 독보적인 전문가다. 그렇기에 삶의 아름다움을 단일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시선보다는 언제나 한 차원 위에 있다. 이 사회에서 '흐릿한 존재'인 소수자들이 자신에게 주체적으로 형태를 부여하고, 삶의 복잡성을 말하고 보여주는 건 다양성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단순히 숨쉬기 위한 '증명'보다, 자연스럽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용기라는 건 억지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용기는 툭 꺼내놓는 결과물보다 과정에 가까운 게 아닐까. 이미 가진 힘을 가만히 느껴보고, 내면의 목소리에 조금씩 몸을 싣는 과정. 그렇게 밖으로 나온 용기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 힘을 끌어당긴다.

요즘 느끼는데, 나를 사랑하고 남을 돌아보는 여유란 묵은 감정을 싹 치워놔야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돌아보지 못한 세계들에 관심 가질수록 마음의 공간은 늘어난다. 나를 가둔 소수자성이 나를 많은 세계와 연결시키는 셈이다. 골짜기에 다리를 놓고 오갈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 브런치에도 연재합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adhdworker)

*다음 화는 '천재와 바보 사이의 재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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