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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 22일, MBC <10시 임성훈입니다>에 낯선 강사가 출연해 세 번에 나누어 성교육 강의를 진행했다. 성담론, 그것도 청소년의 성을 방송에서 처음으로 공론화시킨 이 프로그램의 인기가 치솟자 방송사는 강의를 7회로 연장했다. 3개월 뒤인 그 해 10월에는 <구성애의 아우성(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의 성을 위하여)>이라는 단독 편성으로 2주간 강의를 진행했는데 이 프로도 '대박'이 났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확대로 청소년의 음란물 접근이 용이해 지기 시작하던 시절, 학부모의 관심은 자녀들의 성교육에 쏠릴 수 밖에 없었다. 1998년은 게임 '리니지'가 출시된 해이기도 했다. 컴퓨터 앞에 앉은 자녀들은 게임 아니면 음란물을 보고 있다는 부모들의 '심증'과 '물증'이 더해가던 때에 구성애의 출현은 부모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아니 산불에 폭우같은 희소식이었다.
 
구성애의 아버지 구광서 목사(사진 가운데)는 반민족행위특별법조사위원회의 서기로도 활동했다.
 구성애의 아버지 구광서 목사(사진 가운데)는 반민족행위특별법조사위원회의 서기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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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전문가로만 알려진 구성애를 이야기할 때 한국 현대사의 질곡 한 가운데 있었다는 점을 빼 놓을 수 없다. 구성애의 아버지는 반민족행위특별법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서기로도 활동했던 구광서(1911-1994 사진 가운데)다. 황해도의 3대째 기독교 가정에 태어난 그는 독립운동가 구용칠(1890-1924)의 조카이기도 하다. 만주 길림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고향 북한에서 기독청년 운동을 했는데 이 때 체포령이 떨어지자 월남했다.

월남 후 김구 주석과 인연이 닿아 반민특위 서기를 맡았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구광서(具廣書)는 본명이 아니라고 한다. 반민특위 서기(書記)를 맡게 되자 이름에 '서'를 넣었다고 하는데 밝혀진 본명은 없다. 구목사가 1911년생이니 구성애는 45세에 낳은 딸이다. 광서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고 해도 구성애가 본명을 기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평양 출신의 감리교 목사 호취훈 (胡就勳, 1894-~ 1947)이 독립운동을 할 때 쓰던 가명이 구광서(具廣瑞)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물론 한자로 '서'자는 다르지만 두사람 모두 독립운동에 이어 해방후 북한 지역에서 기독교 청년운동을 했다는 점, 호목사가 고문 후유증으로 1947년 사망했고, 이즈음에 상해임시 국무위원장이었던 도연권 감리교 목사가 구광서(구성애의 아버지)를 김구 주석에게 소개했다는 점이 두 '구광서' 사이의 어떤 인연을 짐작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알려진 이야기는 없다.

반민특위가 무산된 후 신학교에 진학한 구광서는 이후 그리스도교단의 유악기파 측에서 활동했다. 유악기파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란 악기를 사용하는 교단으로 서울기독대학교(은평구 신사동 소재)가 교단 소속 신학교다. 반면 무악기파 그리스도교단(churches of Christ)은 그리스도교 신학대학으로 시작해 현재는 KC대학교(강서구 화곡동 소재)로 이름이 바뀐 신학교를 운영하는데  4년제 정규대학 인가는 KC 대학교가 먼저 받았다.  

목사가 된 구광서는 여러 군데 교회를 개척했다. 팟캐스트 <이이제이> 출연한 적이 있는 구성애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대학 때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1975년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진학한 구성애는 전대협, 한총련 같은 전국 조직이 없던 1970년대 연세대학교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기독학생회(SCA) 부회장을 맡았고 매해 농활(농촌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졸업 후 안정된 간호사의 길을 가지 않고 조산원 자격증을 따서 산부인과에 갈 수조차 없는 농촌의 가난한 이들의 출산을 돕는 활동을 했다.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역시 가톨릭 농민회에서 농민운동에 헌신하던 서울대 농대 출신의 송세경과 결혼했지만, 신혼의 달콤함을 즐길 겨를도 없었다.

남편 송세경이 1981년 '부림사건'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이 사건을 통해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지역 시민 운동권에 이름을 알렸고, 송세경과 문재인의 관계도 그 때 맺어졌다.
  
구성애(왼쪽) 강사와 문재인 대통령
 구성애(왼쪽) 강사와 문재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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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구속되자 양심수 석방운동에 뛰어든 그는 연금, 구타 등 당할 수 있는 일은 다 경험했다고 한다. 2년만에 남편이 석방되었지만 오히려 옥바라지 할 때보다 더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남편과의 마찰이 위험 지경에 이르자 구성애는 무려 10여 차레 가출을 반복했고 1년 동안 구로 공단에 위장 취업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성에 대해 무지한 현실에 놀라 그들을 상담하고 도와주던 것이 오늘날의 구성애가 된 첫 걸음이었다.

가정으로 돌아온 구성애는 농촌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부산 노동자 협의회에서 간사 생활을 하면서 간호사, 조산원, 여성 노동자들의 상담 경험을 풀어 놓은 게 반응이 좋아 단위 노동조합에서 서로 초빙하는 인기 강사가 되었고 결국 매체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구성애는 2012년에는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였던 (낙선한) 문재인 지지 TV연설을 했다. 구성애의 인기나 그의 주요 시청층을 감안하면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2015년 9월 25일 팟캐스트 <진짜가 나타났다>에는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요즘 구성애의 활동은 전성기만큼 활발하지 않지만 삶에서 우러나온 경험을 자산으로 끝까지 진보에 있었던 그의 삶은 존경스럽다. 이번 대선 결과는 이 세대의 리더십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선택으로 나타났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은 아름다웠고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에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적폐세력은 계속 살아남는데 왜 이들 진보 세력만 일찍 퇴조해야 하는가에 대한 볼멘 소리가 없지 않지만 적폐세력이 부패의 기술을 다양하게 발전시킨 것에 비해 민주화 운동 세력은 가치와 명분에만 집중했지 이러한 것들을 대중화시키는 기술개발에 미흡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샹탈무페가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에서 밝혔듯이 좌파가 헤게모니 위기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더 다가가야 했다. 

앞서 말한 팟캐스트에서 구성애가 기억하는 문재인, 문재인이 기억하는 구성애와 남편 송세경은 서로 좋은 사람, 점잖은 사람이라는 칭찬으로만 가득했다. 아~ 이들에게는 그들이 이루려고 했던 가치보다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구나라는 사실에 안타까웠다.

교과서에 충실했다는 수석 합격자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다. 그들에게는 고득점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교육이 있었다. 문재인은 교과서적 대의민주주의에만 충실했던 사람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쟁취가 가장 우선이었던 시절의 그 인생관으로 살아온게 패착이었다.

이들 세대는 퇴조하고 있다. 구성애도 아버지처럼 정의로운 길을 갔지만 2020년대 지금의 성담론에 개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들 세대의 경험과 인생 여정만큼은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덧붙이는 글 | 뉴스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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