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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필식 감독의 설명을 듣는 FC녹색당 여성축구팀
 신필식 감독의 설명을 듣는 FC녹색당 여성축구팀
ⓒ 김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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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릴 때부터 공으로 하는 놀이는 뭐든지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했던 구기종목은 피구나 발야구다. 특별히 인원 제한이 없어서 반 전체를 둘로 나누어서 할 수 있는 스포츠라 체육시간에 많이 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여자아이들은 발레를 많이 배우고, 남자아이들은 축구팀을 구성한다. 태권도 학원은 남녀 구분 없이 많이 가는 편인 것 같다.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았던 나는 피구나 발야구 게임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세팅하고 마지막까지 정리하는 열혈 선수였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중학교에 가서는 피구 정도만 했던 기억이 있다. 전학을 두 번 했는데 여중에 다닐 때는 핸드볼 선수 친구들 경기 구경을 주로 했고, 남녀공학 중학교에 다닐 때는 남학생들이 축구하면 옆에서 같이 뛰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학생들이 없어서 그냥 김이 빠져 관두곤 했다.

대학교 다닐 때,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썩 거렸는데, 정작 나는 큰 관심이 없었다. 뉴스에서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면 그 정도만 힐끔 보고 말았다. 그때 알았다. '나는 남이 하는 운동경기 구경에 관심이 없구나. 직접 뛰는 게 더 재미있었어.' 
     
녹색당에서 여성의 날 기념으로 색다른 이벤트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여성축구 친선경기를 해보자고 했다. 녹색당도 매년 여성의 날이 되면 피켓을 들고 집회에 나갔다. 성별 임금과 가사노동 분담 성별 차이 퍼센트와 같은 통계수치를 말하고 그 수치가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차별받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발언했다. 지난 13년간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 피해자는 최소 1155명이라는 통계수치가 있다.

각 지자체는 여성의 체육활동을 지원하는 것보다는 K리그와 같이 시민 구단을 만들어 선수를 키우는데 적지 않은 예산을 쓰고 있다. 그런데 작년부터 여성 취미 스포츠 활동에 재미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남성의 취미활동으로만 여겨졌던 축구나 풋살클럽에 많은 여성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모 공중파 방송의 <골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서 여성 풋살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미 녹색당 당원들 중에서도 여성 풋살클럽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시작부터 반응이 아주 좋았다. SNS를 통해 당원이 아닌 여성들도 함께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예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숨쉬기 운동만 겨우 하던 내가 축구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응원만 해도 될 것 같은데...' 

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슛팅 연습 중인 녹색당원.
 슛팅 연습 중인 녹색당원.
ⓒ 김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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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회의를 통해 계획을 세웠다. 네 번 연습을 하고 여성의 날 기념 친선경기를 해보자고 했다. 첫 연습날, 나는 경기녹색당 대의원대회를 온라인으로 마치자마자 짐을 챙겨서 경기 의왕시에서 서울 중랑구까지 갔다. 응원만 할 생각에 청바지에 운동화만 장착하고 갔다.

가보니 몸풀기를 하고 있었다. 가볍게 몸풀기는 같이 해도 되겠다 싶었다. 준비 운동이 끝나니, 녹색당팀의 코치로 자원해주신 신필식 당원님이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 처음 뵙는 분인데, 얼마나 친절하게 차근차근 알려주시는지 살짝 감동이 밀려왔다. 1시간 동안 공을 차보고, 패스하고, 슈팅도 해봤다.

기본기 훈련을 마친뒤 두 팀으로 나누어서 연습 경기를 하기 시작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니 공포의 도가니였다. 풋살장은 농구장 만한 크기였는데 12명이 사람들이 뛰니까 꽉 찬듯한 느낌이었다. 공을 차면 누군가의 얼굴에 맞을 것 같았다.

나는 공이 무서워서 도망 다녔는데,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서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어릴 때 피구, 발야구, 핸드볼을 해본 경험이 있다고 만만하게 봤는데 역시나 이건 아닌 것 같았다. 틈만 나면 교체해서 경기장 밖으로 피신을 했다. 

1시간 동안 4쿼터로 나누어 연습경기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었다. 뛴 지 3분도 안되어 너무 숨이 차서 괴로웠는데,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교체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다시 경기장으로 들어가서 보니 누가 우리 팀이고 누가 상대팀인지 구분도 안되고, 사람들이 지르는 소리마저 울려서 너무 겁이 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 다리가 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팔을 힘차게 휘두르면서. 

코칭해주시는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봐야 해요. 패스를 이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숨 가쁨과 희열
 
녹색당원들과 축구에 관심있는 여성들이 함께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녹색당원들과 축구에 관심있는 여성들이 함께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 김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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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건 경기구나. 전략이 필요하지. 공간이 좁으니까 우르르 몰려다니면 자꾸 흐름이 끊어지는구나. 적당히 위치를 잡고 패스해주기를 기다려야겠다.' 머리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작 몸은 따라가지 못해서 헛발질을 여러 번 했다. 아쉬움과 두려움이 교차되며 끝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아,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숨 가쁨과 희열인가.' 함께 뛰어서 기쁘다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팀을 나누어 공을 가지고 게임을 했던 순간들이 막 떠올랐다. 이거 정말 재미있는데?

그렇게 첫 훈련이 끝나고, 3번의 연습을 더 했다. 방역수칙과 인원제한, 서울과 경기 각 지역에서 당원들이 오기에 적당한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3~4번째 연습은 실외 풋살장에서 했는데,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번 뛰고 나면 다리가 아파서 절뚝 대다가도 연습하는 날이면 또 잊어버리고 열심히 뛰었다. 공을 찰 때는 아프다는 생각이 안 났다. 

'이걸 받아서 누구한테 넘겨주지? 어떻게 하면 우리 팀이 이길 수 있을까?' 상대편이 한 골 넣으면 우리 편이 넣은 것만큼 기쁘진 않은데 그래도 신이 났다. 

'아니, 너무 잘하잖아!' 감탄을 하고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몸이 부딪히면 서로 미안하다고, 괜찮냐고 말하기 바빴다. 감독님도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매번 가르쳐 주실 때마다 잘 못해도 괜찮다고 지지해주셨다. '아니, 왜 말을 못 알아듣냐?'고 할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말 없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분은 한국에서 여성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남성이었다. 

함께 참여한 녹색당원 중에 한 여성당원은 10대인 딸과 함께 참여를 했다. 원래는 엄마만 참여하려고 했는데 13살 초등학생인 딸도 공을 한번 차 보더니 재미있는지 열심히 연습과 경기에 참여했다. 몸이 어찌나 빠른지 나중에는 골도 여러 번 넣고, 1시간 내내 뛰어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어른들과 하는 경기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은 아직 어려서 당원이 될 수 없는데, 아빠라도 입당을 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는 FC녹색당 꿈나무, 서로 잘 키워줘야지. 세상을 멋지게 만들고 싶으니까! 중학생이었던 나는 함께 축구할 여자들이 없어서 그냥 그만두었는데, 이제는 세상이 달라지고 있으니까. 취미로 축구를 하고 싶은 여자들도 이제는 함께 뛸 사람들이 있다!'

외연이 확장된 연대
 
여성의날 친선 축구경기 피켓들. 녹색당원들과 여성들이 여성의 날 기념으로 함께 축구경기를 했다.
 여성의날 친선 축구경기 피켓들. 녹색당원들과 여성들이 여성의 날 기념으로 함께 축구경기를 했다.
ⓒ 김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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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다. 녹색당과 친선경기를 하기로 한 팀은 'FC대포꾼'이라는 풋살팀.  우리는 3월 6일에 친선경기를 하기로 했다. 경기 당일, 사람들이 많이 올지 걱정이 되었다. 친선경기지만, 만약 실력 차이가 너무 나면, 재미없어서 사람들이 실망하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걱정을 안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가보니,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구경하러 와주었다. 상대팀은 몇 년을 함께 합을 맞춰온 팀이고 우리는 4번 연습한 초보니까 이기는 것은 생각한 적도 없다. 한골 넣으면 그나마 다행이겠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한 골도 넣지는 못했다. 선수로 뛸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녹색당팀도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뛸 수 있었다. 1시간 동안 경기를 하고, 두 팀을 모두 섞어서 다시 팀을 짜고 경기를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낯설어도 신기하게도 한 팀이 되면 사람들은 의지하고 연대하고 함께 기뻐한다. 우리는 5월에도 함께 친선경기를 하기로 약속했다. 

하나의 팀이 다른 팀과 만나서 경기를 하려면 팀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매니저처럼 경기장도 잡아주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고, 팀과 팀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훈련이나 경기 당일에도 김밥을 싸오고, 비건 빵을 구워오고, 간식을 준비해 왔고, 상대팀에 줄 선물도 챙겨 왔다. 숨어서 세심한 준비를 해준 고마운 당원들이 있었다. 여성의 날을 기념해서 피켓도 만들어 왔다.

'혐오 정치를 뻥! 우리는 페미니스트! 여성의 스포츠 활동을 응원합니다! 모든 여성에게 빵과 장미를!'

여성은 누가 응원해 주는가? 여성의 연대가 더 나은 내일을 만든다고 피켓에도 썼지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연이 확장된 연대다. 딸과 아내와 친구가 경기를 뛴다고 하니 남자들도 와서 관람하고 응원을 했다. 날이 추워져서 지켜보기 힘들었을 텐데도 끝까지 응원하고 지켜봐 주는 그들이 있었다. 조용하지만 저력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아닌가? 

"여성의 연대가 세상을 바꾼다!" 5월의 친선경기를 기대하며 여성축구 화이팅!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녹색당원입니다.


태그:#여성축구, #여성의날, #녹색당, #정당활동, #풋살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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