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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매 학년이 끝날 때 즈음이면 학교에서 새 책을 나눠주었다. 나는 새 책에서 나는 냄새가 무척 좋았다. 새 책을 받는 날이면 설레고, 뿌듯했다. 뭔가 새로운 것, 더 심오한 무엇을 향해 가는데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얻은 느낌이었던 듯하다. 책을 집에 들고 오면, 집에서 가장 깨끗한 종이 부대를 잘 오려내 누런색일지언정 새 책을 보호해주는 임무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성들여 책 덮개를 만들었다.

마치 요즘 세대가 새 스마트 폰을 사면, 보호필름이나 강화유리를 붙이고, 새 케이스를 마련하는 것과 비슷한 의식이라 하겠다. 어린 내 생각에 교과서는 내가 가장 깨끗하고 귀중하게 보관해야 할 그 무엇으로 다가왔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학력고사에서 최고점을 받은 전국 수석은 신문과 방송 인터뷰에 나와서 항상 "교과서와 학교 수업"에 충실했기 때문에 오늘 고득점의 영광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능시대인 지금도 만점 득점자의 인터뷰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나는 친구들과 어떤 역사 문제에 대해 논쟁이 붙었다. 갑론을박이 있었고, 각자가 자기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논쟁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수업을 마치고 와서 논쟁에 끼어들게 되었는데, 조금 있다가 논쟁의 요지를 파악한 그 친구의 한마디에 논쟁은 끝나버렸다.

 "야! 니들 교과서도 안 읽었냐? 그거 교과서에 000라고 되어 있어!"

교과서에 집착했던 시절 
 
우리나라는 왜 국가가 제정하는 촘촘한 국가교육과정과 그것을 책으로 구현한 국정, 검정, 인증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해야 할까
 우리나라는 왜 국가가 제정하는 촘촘한 국가교육과정과 그것을 책으로 구현한 국정, 검정, 인증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해야 할까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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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와 학생들은 왜 이렇게 교과서와 학교 수업에 집착할까? 당연한 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국가교육과정에서 제시한 교과별 지침에 따라 만들어진 교과서의 내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현재 우리학교에서 운영하는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왜 국가가 제정하는 촘촘한 국가교육과정과 그것을 책으로 구현한 국정, 검정, 인정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하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역사적, 시대적인 상황이 연계되어 있다. 근대 개항 시기에 조선의 우국지사들은 교육입국의 의지로 많은 신식학교, 근대식 학교를 설립했다.

이 시기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가 없었지만, 각 학교마다 필요한 교육과정과 교보재를 교사와 학부모, 지역 인사들이 함께 다양하게 만들어서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육내용의 체계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당시의 학교들이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의식을 강화하자,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반포하고, 제29조에서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의 교과목 및 그 과정, 직원, 교과서, 수업료에 관한 규정은 조선총독이 정한다"고 규정하여, 학교의 교육과정 운영, 교과서 등 수업 교보재 선정 권한을 학교와 지역사회로부터 강탈하였다. 이후 교육과정의 운영과 교과서의 국검정 체제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촘촘하게 강화된 사실은 세세히 부연할 필요가 없다.

'촘촘한'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 국검정체제를 유지한 이유 

그런데, 왜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자유 독립 대한민국'에서도 8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일제총독부가 강압적으로 심어 놓은 "촘촘한"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 국검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가? 굳이 변명을 찾자면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고 난 시기 매우 열악한 사회 환경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 건물도 지을 돈이 없던 시절, 지역 사회가 스스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풍부한 자료를 탐색하여 개별 학교마다 합의과정을 통해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교과마다 적절한 수업 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중앙집권적으로 국가가 학교교육과정을 구성하고, 필요한 교육 자료를 체계적으로 구성한 교과서를 제작하여 배포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대중적 지식 전파와 국민교육 수준 향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중앙집권적, 관료적 대중 교육체제를 통한 추격 전략은 후발산업국가였던 독일과 러시아가 시도한 전략이었고,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따른 전략이었다. 반면에, 선발 산업국가였던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나, 지역 주민 중심의 자치의식이 강한 미국이나 호주 같은 국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교육과정과 관료적 교과서 제도를 운영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영국의 공립학교 교육은 1980년대까지도 통일된 국가교육과정을 운영하지 않았고, 지금도 우리나라와 같은 "촘촘한" 국가교육과정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국가교육과정은 공립학교가 따라야하는 분야별 교육의 기본 방향과 일반 원칙만 제시할 뿐이고, 당연히 국가가 제작하거나 검정, 인정하는 교과서도 없다.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 프랑스, 핀란드 등은 비슷한 방식으로 학교교육을 운영하고 있다. 교과서 인정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 독일 등의 경우에도,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 수업을 수행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선택한 교과서는 대부분의 경우, 교사들이 수업에 활용하는 많은 교보재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미국의 초중고교에서 엄청나게 두꺼운 교과서를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걸 보고, "저걸 한 학년에 다 끝낼 것인가?"하고 놀랐고, 학교 수업에서 교과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관행을 보고 또 한 번 놀란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근대 산업화 시대에 독일과 일본 같은 후발 산업국가들은 갈 길은 멀고 마음은 급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한발 한발 확인하고 체험하면서 발견적 과정을 따르기에는 너무 뒤쳐져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빠르게 근대적 산업화를 이루고, 군대와 행정 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인력을 기르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된 근대적 지식과 정보를 속도전으로 국민들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추격국가의 전략으로, 가난한 국가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인쇄지식 시대의 후발 산업국가들의 추격 전략은 인쇄지식을 구조화하고 체계화한 도서관의 체계를 따라 중앙집권적 국가교육과정과 국가주도의 교과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과목은 도서관의 한 분야를 담는 방식으로 구분되고, 교과서는 그 섹션의 지식과 정보를 기초부터 심화까지 수준을 나누어 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과학적 발견과 경험적 확인에 기초한 교육과정보다는 개념과 이론 간의 연관 관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근대적 지식활동의 결과물만 암기하여 머리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대중교육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국가교육과정은 이러한 교과목과 교과서의 체계를 담는 커다란 프레임 워크로서, 도서관 구성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때는 해결책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문제가 되었다! 후발 산업국가, 인쇄지식 시대라는 상황을 벗어나면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제도로 전환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난 40년간 후진산업국가,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적절한 교육운영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후진 산업국가에서 가성비를 위주로 구사한 전략, 중앙집권적 독재국가에서 운영하는 제도, 조선총독부가 이식한 제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지역 주민 자치에 기반한 개개인화 교육과정 체제로!

처음에는 엄청난 저항을 일으키지만 강압에 의해 저항이 꺾이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습관은 관행이 되고, 관행은 전통으로 변하고, 전통은 정통이 되어버린다. 한국의 국가교육과정, 학교교육과정의 부재, 교과서의 국검정 및 인정제도 운영은 처음에는 엄청난 저항을 받았지만,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지속적, 반복적으로 강화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관행화된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제는 전통을 넘어 정통이 되어, 국가교육과정과 교과서가 없으면 학교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교별 교육과정, 교사별 교육과정은 국가교육과정을 어기는 불순한 의도로 여겨지거나 학력 저하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교과서를 반대하면 급진 과격분자이거나 반사회적 위험 인물처럼 취급된다.

선진국인 한국 사회에 맞게, 이제 추격을 넘어 추월의 시대를 맞이한 한국 경제력과 기술 단계에 맞게, 국민의 높아진 의식과 역량 수준에 맞게 주민 자치에 기반한 학교별 교육과정, 학생별 개개인화된 교육과정으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 전에 지역과 학교가 스스로 결정하고 자체적으로 준비하여 교육을 가장 중요한 주민 자치활동으로 운영한 역사가 있다. 서당과 서원이 바로 그 '오래된 미래'다. 이제 중앙에서 몇몇 전문가가 결정하는 교육과정과 교과서 체제를 벗어나, 지역별로, 학교별로, 교사와 학부모가 머리를 맞대고 학생의 상황에 맞게 학습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개개인화 교육과정과 그에 맞는 학습 자료를 활용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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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시교육청에서 근무 중. 플로리다주립대 정책학 박사: 「차터스쿨이 공립학교의 학업성취도 및 인종분리에 미치는 영향 분석」 (2012) 강의: 순천대 객원교수(2015), 숙명여대 및 광주교대 등 강의 저서: 《교육을 교육답게》(2018), 《포노사피엔스 학교의 탄생》(2020), 공역서 《교육은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는가》(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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