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1 19:53최종 업데이트 22.02.11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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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 있는 인간 사이에 실시간으로 소식을 주고받게 된 것은 긴 인류 역사에서 불과 최근 17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 이전까지 인류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걷고, 뛰고, 말을 달리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

1812년 6월에 시작된 미국의 제2차 독립전쟁, 즉 영미전쟁은 1814년 12월 24일 벨기에에서 체결된 켄트조약으로 종료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지 못한 미국의 뉴올리언스에서는 1815년 1월 8일 앤드류 잭슨 장군이 이끈 미군과 영국군 간에 전투가 벌어져 영국군 2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15일 전에 이루어진 종전 합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물론 이 비극적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앤드류 잭슨 장군은 영웅이 되었고, 그 명성을 이어 후일 미국의 제7대 대통령(1829-37)이 되었다. 애팔래치아산맥 서쪽 출신 중 첫 대통령의 명예도 갖게 되었다. 누구의 불행이 또 다른 누군가의 행운이 된 사건이었다.

1851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 해협을 시작으로 1866년에는 대서양 횡단 해저 통신 케이블이 설치되었다. 지구 한 편의 뉴스가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당시로서는 우리가 요즘 경험하고 있는 초연결사회의 출현보다 더 큰 변화였다. 1년 전인 1865년에 링컨이 암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런던 사람들이 전해 듣는 데 15일이 걸렸지만, 이제는 모든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당시로서는 '초연결시대'가 열린 것이다.

20세기 진입 직전 몇 년간 세계적으로 커피 산업은 호황을 누렸다. 공급 측면에서 보면 1880년대에 번진 커피 녹병으로 자바와 실론 커피가 사라진 자리를 새로운 '공룡' 브라질이 순식간에 차지해 버렸다(관련기사: 벽돌가루, 개과자, 연탄재가 들어간 커피의 유행 http://omn.kr/1wwc8).

커피값 폭락

소비도 폭발하였다. 유럽과 미국의 산업화 성공에 따른 경제적 여유의 확대가 기호품인 커피의 소비 확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소비의 확대로 1895년 즈음에는 뉴욕 커피거래소에서 커피 도매가가 잠시 파운드당 14~18센트에 형성되었다.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실시간'으로 이런 정보를 접한 브라질 사람들이 너도나도 커피나무를 심었다. 이때 심은 커피나무들이 4~5년을 지나 20세기 시작 무렵부터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파운드당 18센트까지 올랐던 커피 가격으로 고통을 받던 미국인들에게 20세기 초반의 커피 생산 호황은 축복이었다. 1901년에 세계의 커피 생산량은 2000만 자루에 이르렀다. 이 중 70퍼센트 이상이 브라질산이었고 나머지는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한 자바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카리브해 그리고 이제 막 생산을 시작한 몇몇 중남미 국가들이었다. 전 세계의 커피 재고량도 1130만 자루에 이르렀다. 신규 생산량과 재고량을 합하면 3130만 자루였고 이는 전 세계 연간 커피 소비량 1500만 자루의 두 배에 달하였다.
  

브라질 커피 ⓒ pixabay

 
20세기 시작과 함께 전파된 브라질 커피 생산량의 폭증 소식은 세계 모든 거래 시장에서 커피값의 폭락을 가져왔다. 1901년에는 뉴욕 커피거래소에서 파운드당 6센트까지 하락하였다. 낮은 가격 덕분에 이제 커피는 누구나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되었다. 가격 하락으로 생산국들은 수입이 줄어 고통스러웠지만 소비국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이후 약 10년을 주기로 커피값이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는 이른바 붐 앤 버스트 사이클(Boom and Burst Cycle)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런 불안한 사이클을 막으려는 대책을 세우려고 커피 생산국과 소비국 대표들이 참가하는 최초의 국제 커피 회의가 1902년에 뉴욕에서 열렸지만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낮은 소비자 가격을 원하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 생산비 이상의 적정 가격을 원하는 생산국 사이에 합의는 어려웠다.

1902년 브라질 커피 농장을 덮친 서리 피해도 커피값 하락을 막지는 못했다. 이미 세계 커피 시장에 독점 체제가 형성되었고, 이들에 의해 커피 시장 가격이 좌지우지되는 형국이었다. 당시 20개의 세계적 규모의 커피 회사들이 세계 커피 거래량의 90% 이상을, 상위 5개 회사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독과점이 극심한 상태였다. 커피 생산과 가격 정보를 독점한 결과였다. 

최대 생산국인 브라질 정부는 1903년에 커피 농장을 새로 세우면 에이커(약 1224평) 당 180달러의 세금을 부과하는 조치로 생산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런 조치로도 가격 하락을 막지 못하던 차에 등장한 인물이 헤르만 질켄(Hermann Sielcken)이었다.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질켄은 1868년 열여덟 어린 나이에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무역 회사에서 커피 바이어 일을 하다가 코스타리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후 미국 시민이 되었다. 커피 무역으로 크게 성공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커피왕(coffee king)이라고 불렀다.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가 그리 불리기 100년 전에 세계 최초로 커피왕이라 불린 전설적인 인물이다.

커피 생두 가격의 폭락이 이어지고 브라질 생산자들의 고통이 깊어지자 커피업계의 큰손 질켄은 독일과 영국의 은행 그리고 브라질의 커피 상인들로 신디케이트(syndicate, 공동판매 카르텔)를 구성하였다. 질켄은 미국 시민권을 가진 독과점 기업의 총수였지만 독일로 이주한 상태였고, 특히 미국 공룡 기업들에 의한 커피 가격 하락에 분개해서 친 브라질, 친 생산자 성향의 신디케이트를 결성하여 싸웠다.

이 컨소시엄 형식의 신디케이트는 브라질 정부와 협력하여 일정한 가격에 커피를 대량으로 구매하였고, 이를 가격 안정용 커피로 비축했다. 세계 주요 항구에 브라질 정부와 신디케이트가 공동으로 구매한 커피가 쌓이기 시작하였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커피 정보를 바탕으로 한 재고량 조절로 세계 커피 시장을 장악하려는 시도였고, 결국 1910년부터 커피 가격은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 맞선 미국 시민

이번에는 전 세계 커피 소비량의 절반 가량 그리고 브라질 커피 수확량의 80퍼센트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소비하던 미국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시민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미국 정부가 질켄을 기소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청문회에 세웠다. 청문회에서 질켄은 이렇게 미국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나는 미국이 다른 나라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비판을 하고 간섭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남미에서 면직물 판매를 하고 있는데, 브라질 정부가 '우리가 조사를 좀 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어떤 외국 정부나 정당이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 미국은 이 나라에서 그들을 내쫓아 버렸을 것입니다."

미국 시민 질켄은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은 최고의 값으로 팔면서 남의 나라 물건은 최저 가격으로 사는 것을 당연시하고, 만일 어느 외국이 이런 불합리한 거래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면 그것이 마치 어떤 음모라도 되는 것처럼 공격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커피 문제로 미국이 브라질에 대해 보였던 오만한 태도, 질켄을 분노하게 했던 그 자세는 20세기 내내 세계의 수많은 약소국을 대하는 미국의 일관적 태도였다.

질켄은 미국 법무장관에 의해 기소되었다. 커피를 둘러싼 청문회였고, 기소였으며, 대통령도 긴장하게 만드는 큰 관심거리였다. 이 소송이 진행되던 1912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였다. 우리나라 역사책에 나오는 이른바 태프트-가츠라 밀약의 당사자로 1905년 7월 일본 총리 가츠라 타로와 회담을 하던 당시에는 전쟁성 장관이었고,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가 완성되던 1910년에는 친구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이어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질켄에게 공격적이었던 조지 위커샴(George Wickersham)이 사임하고 새로운 법무부 장관에 제임스 맥레놀즈(James McReynolds)가 임명된 1913년 4월이 되어서야 소송은 취하되었다.
 

워싱턴DC 내셔널몰 잔디밭에 대형 성조기가 펼쳐져 있다. 내셔널몰은 의회의사당과 워싱턴기념탑, 링컨기념관을 잇는 워싱턴DC의 명소다. ⓒ 연합뉴스

 
질켄이 앞장서서 시도하였던 가격 안정책은 이후에도 브라질 정부에 의해 몇 차례 시도되어 커피 가격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커피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잠시 중단되었던 브라질의 커피 재배가 1910년대 중반에 확대되었다. 브라질만이 아니라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커피 재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재배된 커피나무에서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된 1920년대 초반에 다시 커피 가격은 하락하였고, 브라질의 커피 독과점도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20세기 첫 전쟁은 바로 이 커피 전쟁이었고, 그 상대는 커피 생산자 브라질이었으며, 배경은 연결 사회의 등장이었다. 새로운 정보 하나하나에 커피 시장이 요동을 치는 민감한 시대가 만든 전쟁이었다. 정보를 가진 사람이 시장을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이미 1세기 전에 시작된 것이다.

21세기인 지금도 다르지 않다. 1년 전에 시작된 브라질과 베트남 커피 생산의 급감과 세계의 커피 원두 재고량 변동에 관한 정보에 접근하는 속도가 그 나라 커피 소비 시장의 안정을 좌우하고 있다. 국제커피기구(ICO)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고, 커피 생산지의 정보를 개별 커피업자가 직접 수집해야 하는, 커피 수입량 세계 5위 국가 대한민국의 커피 시장이 물류난에 유난히 흔들리는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Mark Pendergrast. Uncommon Grounds: The History of Coffee and How it Transformed our World. New York: Basic Book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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