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7 19:03최종 업데이트 22.02.0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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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열린 <방송 3사 합동 초청> 2022 대선후보 토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기념촬영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로 인해 대통령선거 텔레비전 토론이 진통을 겪고 있다. 일정이 번번이 지연되고 있다.

지난 3일 TV 토론 때 윤석열 후보는 'RE100(Renewable Energy 100%, 재생에너지 100%)'과 'EU 택소노미(EU Taxonomy, Green Taxonomy, 유럽연합 녹색분류체계)'를 알아듣지 못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서는 TV 토론에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TV 토론 도입이 논의되던 1992년 대선 당시,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도입에 적극 찬성했다. 그의 식견과 언변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그해 6월 2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에 따르면, 후보로 선출된 뒤인 6월 1일, 그는 "국정 현안들이 산재해 있고 국민들도 각 당 후보들의 견해와 포부에 대해 궁금해 하는 만큼 TV를 통한 후보 토론회를 제의한다"고 밝혔다.

92년 김영삼의 경우

민주자유당(민자당) 후보 김영삼은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전에 한 번도 한 적 없는 TV 토론을 하필이면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에 도입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그는 강력한 제동을 걸었다. 집권당 후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해 5월 19일 전당대회에서 후보가 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신속히 입장을 밝혔다. TV 토론은 사전 선거운동이라고 못을 박았다. 6월 6일자 <조선일보> 기사 '후보 간 TV 토론 선거운동 때 가능'은 이렇게 보도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은 5일 각 당 대통령후보의 TV 토론 문제와 관련, '선거운동기간 중의 TV 토론 실시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나, 아직은 대통령후보가 정해지지 않았고 사전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는 법 정신에 비추어 법적 선거운동기간 전의 TV 토론 실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TV 토론은 사전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법률 규정'에 위반된다고 하지 않고 '법 정신'에 비추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가 내세운 또 다른 논리는 '12월 대선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현재로서는 대선 후보를 명확히 특정할 수 없으므로 TV 토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이 'TV 토론 불가' 입장을 밝힌 6월 5일은 3대 정당 후보가 선출된 뒤였다. 5월 15일에는 국민당에서 정주영이 선출됐고, 26일에는 민주당에서 김대중이 선출됐다. 6월 5일로부터 나흘 뒤인 9일에는 그해 대선에서 6.37%로 4위를 기록할 박찬종이 신정당에서 선출됐다. '후보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토론을 피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92년 8월 12일 민자, 민주, 국민 여야 3당이 국회귀빈식당에서 대표회담을 갖고 정치문제특별위원회구성과 대통령선거법, 정치자금법개정 등 3개항에 합의한 후 악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대중 민주당 대표, 김영삼 민자당 대표, 정주영 국민당 대표. ⓒ 연합뉴스

 
김영삼은 법정 선거운동기간 중의 TV 토론에는 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 <조선일보> 기사에 언급됐듯이 그것은 '원칙적 찬성'이었다. 막상 선거운동기간이 도래되자, 그는 김대중·정주영 후보가 받아들이지 않을 제안을 내놓아 결국 무산시켰다.

선거일을 사흘 앞둔 12월 15일 발행된 <한겨레> 기사 'TV 토론 끝내 무산'은 "김영삼 민자당 후보 진영은 김대중 민주, 정주영 국민당 후보 진영과 달리 절충안을 한 번도 내지 않은 채 공평성을 이유로 후보자 전원 토론 방식만을 고집해 각 당 실무자 간 절충 협상의 진전을 막았다는 점에서 책임론 공방에서 불리"하다고 보도했다.

전체 후보들이 다 참가하는 TV 토론을 주장하는 김영삼 캠프와 절충할 목적으로 김대중·정주영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주요 후보가 참가하는 토론과 더불어 전체 후보가 참가하는 별개의 토론을 개최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김영삼 캠프는 공평성을 내세우며 수용하지 않았다.

97년 이회창의 경우

김대중과 이회창·이인제 등이 격돌한 5년 뒤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그토록 원하던 TV 토론이 성사됐다. 이 토론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는 확실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에게 도움이 된 토론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99년 4월 <한국방송학보>에 실린 이준웅 KBS 방송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의 논문 '텔레비전 토론의 정치적 영향력-제15대 대통령선거를 중심으로'에 인용된 한국갤럽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그해 12월 1일 제1회 토론회 직후에 이회창 지지율은 3% 포인트 떨어지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지지율은 0.2% 포인트 떨어졌다. 국민신당 이인제의 경우에는 3.1% 포인트 증가했다.

반감도에서는 이회창이 4.2% 포인트 증가했고 김대중이 2.1% 포인트 감소했다. 이인제의 경우에도 0.3% 포인트 감소했다. 지지도는 내려가고 반감도는 올라갔다는 점에서, TV 토론이 이회창에게는 불리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의 경우에는 지지율이 낮아지는 대신 반감도는 개선됐다. 그를 빨갱이로 인식했던 사람들 일부가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를 찍을 마음이 없는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호감도가 어느 정도 생겨났던 것이다.
  

지난 1997년 12월 1일 KBS 본관 공개홀에서 대선방송토론위원회 주최로 열린 TV합동토론회에 참석한 한나라당 이회창, 국민회의 김대중 ,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등 대선후보 3명이 토론회에 앞서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편, 당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서는 김대중이 2.7% 포인트 증가했고, 이회창과 이인제는 각각 3.0% 포인트, 0.8% 포인트 감소했다. 김대중을 찍든 안 찍든 간에, 토론을 시청하면서 '김대중이 제일 잘 한다',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TV 토론 전후로 지지율이 변했다고 해서 꼭 TV 토론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영향을 줬을 개연성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위 김영삼(41.96%)과 2위 김대중(33.82%)의 득표율 차이가 8.14%포인트였던 1992년 같으면 모르겠지만, 1위 김대중(40.27%)과 2위 이회창(38.74%)의 차이가 1.53% 포인트밖에 나지 않았던 1997년 같은 때는 TV 토론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

그해 12월에 KBS 정책연구실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났다. 위 논문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TV 토론을 많이 시청한 유권자일수록 지지 후보를 덜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 그것이다.

① TV 토론을 전혀 시청하지 않았거나 제1회 토론을 30분 이내로 시청한 경우, ② 제1회 및 제2회를 30분 이상씩 시청하거나 한 차례를 1시간 이상 시청한 경우, ③ 두 차례 모두 1시간 이상씩 시청한 경우, ④ 두 차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청한 경우로 나눠 조사했더니, 기존에 지지했던 후보를 더욱 더 지지하게 된 유권자는 1에서 4로 갈수록 많아졌다. 8.3%, 18.8%, 21.5%, 24.8%로 나타났다(가). 다른 학자들이 수행한 기존의 연구들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고 논문은 말한다.

지지 후보를 바꿨다는 응답도 1에서 4로 갈수록 많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가)의 경우보다는 절대 수치가 낮았다. 5.8%, 8.6%, 5.1%, 8.9%로 나타났다.

한편, 지지 후보를 바꾼 게 아니라 새로 정하게 됐다는 응답은 위 두 가지와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10.8%, 6.8%, 7.0%, 8.0%로 나타났다. 조금 시청했을 때는 '저 사람 찍어야지'라고 생각했다가 좀 더 시청한 뒤 그 생각을 거두는 유권자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인식이 이런 결과에 영향을 줬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1997년 대선과 그때 출마한 후보들에 국한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시사 하는 바도 있다고 볼 수 있다.

TV 토론이 지지 후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기존의 지지 후보를 더욱 더 지지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감안했다면, 1992년 대선 당시의 김영삼 후보가 그렇게까지 반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TV 토론을 기피한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은 승리했다. 여당 후보가 오늘날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던 시절에 여당 후보였다는 점이 그의 그런 선택을 가능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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