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7 06:09최종 업데이트 22.01.27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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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주말마다 나가는 산악회 이름은 '인슐린 산악회'다. 작년 연초, 비만과 고혈압에 이은 당뇨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친구들이 "애는 일단 살려야 한다"면서 산에 데려가기 시작했다. 마침 주변의 또 다른 비만, 당뇨, 고혈압 환자들도 인슐린 산악회의 멤버가 됐다.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되는 몸을 만들어 보자며 산을 걷는 '인슐린 산악회'의 탄생.

인슐린 산악회의 가입 조건은 간단하다. '기저질환자'면 된다. 처음엔 농담 삼아 하던 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함께 산을 걷는 사람들 모두 기저질환자였다. 일단 나는 고혈압과 당뇨, 비만과 탈모, 척추측만증 보유자다.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종 심혈관계 질환부터 가벼운 우울증이나 알코올 의존증 같은 마음의 병, 아킬레스건염이나 터널 증후군 같은 정형외과적 질환까지 다양한 질환을 보유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인슐린 산악회가 기저질환자들만의 특별한 모임이라기보다는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병을 몇 개쯤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정확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국내 당뇨병 환자는 494만 명에 달한다. 당뇨병 전 단계인 공복혈당장애를 포함하면 100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당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당뇨뿐일까. 전체 인구의 32.5%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비만 환자고, 전체 인구의 6.01%는 고도비만 환자다. 고혈압, 알코올 중독, 디스크, 탈모, 알레르기, 아토피, 비염, 무좀, 치질, 근시, 난시.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질병들, 그 환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때때로 어떤 질병들은 희화와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배제나 소외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대체로 '별 것 아닌 병'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더러운 병'으로 취급되면 놀림의 대상이 되고, '옮는 병' 혹은 '중하고 무서운 병'으로 여겨지면 배제와 차별, 소외의 대상이 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 비만이나 탈모, 무좀, 치질 같은 병일 것이고 후자는 암이나 아토피, 알코올 중독이나 우울증 같은 병일 테다.

경중은 없지만 선후는 있다

병에는 경중이 없다. 모두 자기가 가진 병으로 고통받고 그 고통엔 무게의 차이가 없다. 또 병은 '잘못'이 아니다. 병 때문에 어떤 차별과 배제도 당해선 안된다. 병은 치료해야 할 것이지 책임지거나 감내해야 할 것이 아니다. 때문에 병은 놀림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고 또 배제나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병에 선후(先後)는 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거나 삶의 질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병이 있는가 하면 오래도록 안고 살아가면서 치료해야 하는 병도 있다. "에잇 모르겠다" 하면서 그냥 살아가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병도 있다. 그래서 병의 치료는 더 급하고 더 심각한 질환을 우선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서 치료란 사회가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러니까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될 응급한 병의 치료를 우선 지원하고 비교적 시급성이 떨어지는 병에 대해선 지원과 치료의 순서를 늦춰야 한다. 사회의 자원은 한정적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병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얼마 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내놓은 '탈모 치료 건강보험 적용' 때문이다. 탈모는 대표적으로 '놀림받는 질병'이다(내가 탈모 환자여서 잘 안다). 탈모로 인해 고통받는 인구는 시간을 거듭해 늘고 있다. 더구나 사회 전반이 외모의 가치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그로 인한 사회적 차별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에서 탈모는 당장 생리적인 불편을 주는 것은 아니어도 사회적 고통, 또 그에 수반한 정신적 고통을 주는 질병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탈모 치료가 건강보험 재정 지원의 혜택을 받는다면 여러 사람이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탈모 치료가 건강보험의 재정 지원을 받을 만큼 우선순위에 놓여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말했다시피 탈모는 암이나 치매처럼 막대한 생리학적 고통을 주는 질병은 아니다. 더욱이 이번 논의 대상은 질병에 의한 탈모가 아니다(질병에 의한 탈모는 이미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다). 시급성면에서 건강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 다른 중증질환보다 우선순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미 말한 것처럼 건강보험이라는 자원이 국한돼 있기 때문에 그 우선순위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질병 외 일반 탈모를 치료하기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중증환자의 치료에 드는 비용이 줄어드는 것은 안될 일이 아닌가.

한국의 건강보험은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건강보험 보장률, 즉 전체 의료비 중 건강보험이 담당하는 비율을 70%까지 높이겠다고 약속했지만 65.3%에 그쳤다. 65.3%가 적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건강보험 보장률이 80%를 상회한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률이 여전히 낮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당장 '병원비가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우리는 늘 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젊은 탈모 환자가 늘고, 대선 후보가 '탈모 공약'을 내놓으면서 유통업계가 국내 탈모 케어시장 성장세를 예상하고 있다. 사진은 7일 한 대형마트의 두피·탈모 케어존. 2022.1.7 ⓒ 연합뉴스

 
국민건강보험법은 건강보험 예상수익(보험료 납부분)의 14%에 달하는 금액을 국고를 통해 공단에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또 국민건강증진법은 (흔히 담배부담금으로 이해되는) 건강진흥기금으로 건강보험 예상수익의 6%에 달하는 금액을 지원하도록 한다.

국민이 내는 보험료 외에도 보험료의 20%에 달하는 금액을 국고를 통해 추가로 지원하는 것은 건보 재정의 안정성을 확보하여 국민 개개인이 적어도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태는 막겠다는 취지다. 좋은 취지의 법이지만 부족하다. 일단 해외와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액수다. 일본은 예상수익의 28.7%, 프랑스는 63.3%에 달하는 금액을 지원한다. 더 큰 문제는 그 적은 지원마저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는 2020년에만 3조 2천억 원, 국고지원을 명시하는 법이 만들어진 2007년부터는 28조 원을 미지급했다. 건강보험이 유지 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고지원을 더욱 명확하게 지시하기 위한 법개정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고, 관련부처는 미지급금 지원을 (공공연히) 곤란해하고 있다. 정부지원금이 축소되면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보장성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급격한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 더구나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까지 건강보험 지출이 급증할 것이 명확히 예상되는데도 건강보험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탈모 치료에 건강보험 지원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소외된 것은 무엇인가

'소외된 질병'은 있다. 말했다시피 등한시되거나 멸시당하는 질병들, 그 고통마저 희화화하는 질병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재명 후보의 탈모 건강보험 지원 정책이 그 같은 소외에 눈길을 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라면 한 명의 탈모인으로서 환영할 일이겠다만, 그렇게 보기에 이 정책은 너무 많은 소외를 (어쩌면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당장 '간병 비용'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간병을 가족에게 의탁하고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는 법이다. 간병은 그 자체로 대단히 힘든 노동이고 고역이다(간병인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야 하는지를 떠올려 보라). 그래서 간호·간병 통합제도라는 것이 도입됐는데, 이건 또 이대로 간호 인력에게 (가뜩이나 부족한, 터무니없이 부족한!) 간병의 고역까지 떠넘기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이재명 후보는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방치한 청년에게 편지를 보내 "가족 한 명이 아프면 가정이 무너지는 간병의 구조를 살피겠다"라고 말했다. 가난해서 누군가 죽어야 하는 구조를 살피는 일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탈모 치료에 건강보험 재정을 사용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재명 후보뿐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더 건강한 삶'과 '가난해서 죽지 않는 사회'를 입에 올리는 정치인이라면 가장 먼저 의료의 공공성과 건강보험 재정의 확대를 통한 사회안전망 강화를 말해야 한다. 건강보험 재정 확대에 대한 어떤 비전 제시도 없이(하다못해 표 떨어질까 봐 건강보험 재정을 위해 건강보험료를 더 내자는 말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탈모 치료에 건강 보험 재정을 사용하겠다는 것이 어떻게 의료의 공공성을 높일 것인지 알 수 없다.

선거 시기에 '표가 되는' 공약을 내놓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하기에 그 공약 때문에 악화될 것들, 또 잊힐 것들이 너무 많다. 당장 간병비 급여화에 대한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다. 간병의 구조를 살피겠다면서.

심어야 할 것은 그게 아니다

말했다시피 난 탈모 환자다. 아니다, 실은 환자라고 하기엔 그냥 그렇게 생겼다. 남들보다 탈모가 조금 더 일찍 왔을 뿐이다(양가 어르신들의 모발 상태를 떠올려 보자면 도망갈 구석이 없다. 예로부터 씨도둑은 못한다고 했지). 그래도 탈모로 받는 고통이 적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도 휑뎅그렁한 머리털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놀림받는 것도 싫다.

또 말했다시피 난 고혈압과 당뇨 환자고 심혈관계통 이상으로 꾸준히 검진을 받아야 한다. 그때마다 비급여 검사항목으로 꽤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가끔 입원이라도 할라치면 수백만 원의 비용이 든다. 둘 중에 어떤 치료가 먼저냐고, 어떤 치료에 비용 지원을 받고 싶냐고 묻는다면 답은 뻔하다.

처음에 말했듯 모든 병에 경중은 없다. 그저 선후가 있을 뿐이다. 모든 병의 치료를 지원하고 모든 국민이 충분한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말했듯 한정적인 건강보험 재원 안에선 불가능한 일이고, 이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건강보험 재정을 확대하는 일, 공공의료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렇다, 심을 것은 머리털이나 이재명이 아니라 공공의료, 그를 위한 건강보험 재정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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