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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10일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무장단체 의열단이 창립한 날이다. 그러나 2015년에야 의열단 초기 단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을 통해 알려졌다. 정면을 응시하는 김원봉과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정이소, 김익상 등 7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그것이다. 이들은 어디에 잠들었을까? 의열단 창립 102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가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했다.[편집자말]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1920년 3월께로 추정되는 의열단 창립 초기 단원들의 모습. 사진 속 마지막 줄 오른쪽부터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중간에 앉은 이가 정이소. 오른쪽 하단에 따로 붙은 사람이 김익상이다. 사진에서 붉은색 표시한 인물이 김익상이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1920년 3월께로 추정되는 의열단 창립 초기 단원들의 모습. 사진 속 마지막 줄 오른쪽부터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중간에 앉은 이가 정이소. 오른쪽 하단에 따로 붙은 사람이 김익상이다. 사진에서 붉은색 표시한 인물이 김익상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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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도 찾지 못한 의열단원 김익상. 이름 석자 남긴 자신의 위패 머리맡에 친일파가 잠든 걸 알면 어떤 심경일지... 솔직히 가늠조차 안 된다."

지난 6일 기자와 함께 '현충원에 잠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국립서울현충원 답사를 함께한 대학생 청년 하나가 의열단원 김익상의 위패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 말이다. 그는 "과연 우리 정부가 김익상에 대해 온전히 기억하고 기록한다면 이렇게 대우했겠냐"며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익상은 2015년 공개된 의열단 초기 단원 7인 중 유일하게 별도 취급돼 추후에 추가된 인물이다. 그만큼 일제가 경계하고 조심했던 의열단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2009년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국가공인 친일파 이응준과 신태영 무덤 바로 아래쪽에 모셔진 상태다.

이응준과 신태영은 각각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군인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이들로, 해방 후 이응준은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의 묘비에 '군의 아버지'라고 새겨진 이유다. 신태영 역시 해방 후 대한민국 4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인물로 1943년 11월 <경성일보>에 "내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안장)"이라고 밝힌 인물이다.

실제로 이응준과 신태영이 잠든 서울현충원 장군2묘역에서 김익상의 위패가 모셔진 무후선열제단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50m에 불과하다.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이 잠든 서울현충원 장군2묘역에서 무후선열제단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50m에 불과하다.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이 잠든 서울현충원 장군2묘역에서 무후선열제단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50m에 불과하다.
ⓒ 네이버 지도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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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35년, 유일무이한 기록 세운 의열단원 김익상

김익상, 남들은 한 번도 하기 어려운 의거를 두 번이나 행한 인물이다. 그중 하나가 1921년 9월 12일에 행해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다. 결과적으로 일제가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기존 남산에서 광화문으로 옮기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그만큼 일제의 간담을 시리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다.

당시 김익상은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해 서울 남산자락에 자리한 총독부 건물을 찾아 폭탄 두 방을 던졌고, 의거에 성공한 뒤 일본어로 '위험하다'라고 소리치며 유유히 총독부를 빠져나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일제는 '일본어가 유창한 서른 살 정도의 전기수리공이 폭탄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을 이잡듯 뒤지며 수색에 열을 올렸지만 끝끝내 범인을 색출하지 못했다.

김익상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2년 3월 중국 상하이 부두인 황포탄에 일본 군부 실세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에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김익상은 재차 의열단원 오성륜, 이종암과 함께 거사를 실행한다. 재밌는 점은 당시 의열단원들이 소위 죽으러 가는 길인 거사를 서로 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독립운동가 김익상을 수배하기 위하여 일제가 작성한 카드이다.
 독립운동가 김익상을 수배하기 위하여 일제가 작성한 카드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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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태원이 1947년 남긴 <약산과 의열단>에 따르면 김익상은 단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의거를 행한다고 자청했다. 이에 당시 의열단원 최고 명사수로 불린 오성륜이 김익상을 향해 "자네는 큰일(조선총독부 폭탄 의거)을 한 번 해보지 않았나. 이번에는 내가 좀 해보세"라고 타박했다. 결국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은 다나카 기이치가 배에서 내릴 때 오성륜이 1선을 맡아 저격하고, 2선에서 김익상이 만약에 대비하며, 3선에서 이종암이 만약에 만약을 대비하는 것으로 거사 순서를 조정했다.

다나카 기이치는 일본 군부의 대표적인 전쟁론자로 1920년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해 간도를 침공, 간도에 살고 있는 무수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경신참변을 지휘한 인물이었다.

1922년 3월 29일 당일, 상하이 황포탄에 내린 다나카 기이치가 마중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눌 때 오성륜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상하이 황포탄은 중국 내에서도 바람이 많이 불기로 유명한 곳. 당시 현장에는 국제도시 상하이로 신혼여행을 온 영국여성도 있었다. 챙이 큰 모자를 썼던 그 여성은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모자가 날아갔고, 그 순간 오성륜의 총탄이 다나카 기이치 앞에 선 여성으로 향했다. 격발 이후 두 사람은 모두 쓰러졌고, 거사에 성공했다 생각한 오성륜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다나카는 고개를 숙인 채 달아나려 했던 상황. 이를 정확히 파악했던 김익상은 총을 꺼내 저격했다. 불행히도 김익상의 총탄은 다나카의 모자만 뚫어버렸다. 재빨리 폭탄을 꺼내 던졌지만 이마저도 불발. 3선에 있던 이종암이 폭탄을 던졌지만 다시 불발. 재차 던졌지만 현장에 있던 군경에 의해 황포탄 바다에 빠졌다.

이종암은 재빨리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고 군중 틈으로 몸을 숨겨 도망쳤다. 그러나 오성륜과 김익상은 거사 현장 인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조사 도중 김익상이 1921년 9월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주인공임이 뒤늦게 밝혀졌다. 

김익상, 20년 만에 출소했지만...

의거 실패 후 일제는 김익상을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해 재판에 회부했다. 1922년 9월 일본 재판부는 김익상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에 검사는 사형이 필요하다며 항소했고, 그해 11월 열린 2심에서 김익상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김익상은 이후 일본 왕가의 행사 등을 이유로 무기징역과 20년형으로 순차적으로 감형됐다.

정확히 20년을 채운 1942년, 김익상은 만기 출소한다. 1895년 생이었던 김익상의 나이는 어느새 만으로 47세가 됐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김익상은 곧 일본 형사에 의해 끌려가 행방불명 됐다.

김익상이 감옥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의거를 도왔던 동생 김준상은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다 1925년 세상을 등졌다. 김익상의 동갑내기 아내는 외롭게 딸아이를 홀로 키우다 1926년 당시 신문에 "(남편을) 생전에 만나볼 것 같지 않다"며 "이것(3세 딸)이나 알뜰히 키우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1962년 우리 정부는 김익상에 대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10년 6월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익상을 선정했다. 현재 김익상과 관련된 기록은 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마련된 위패 하나와 서울 중구 리라초등학교 인근 구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입구에 세워진 '김익상 의거지' 비석이 전부다.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진 김익상 지사의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진 김익상 지사의 위패.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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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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