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5 16:16최종 업데이트 21.10.1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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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에 검찰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2019.9.6 ⓒ 연합뉴스

 
"밖에 나오니까 맘이 편해. 선거 때마다 어느 쪽이 될지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고. 줄 안 서도 되고.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인사가 확 달라지니까."

검찰 고위직 출신 법조인이 농담조로 한 얘기다. 과장도 있겠지만, 그의 말은 되새길 만하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정치권력과 검찰권력이 얽힌 먹이사슬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극소수의 정치검사들이 권력을 설계하는 영화 <더 킹>은 현실이다.


바야흐로 검찰의 시간이다. 정권 말기 곳곳에서 검찰의 칼이 번뜩인다. 기시감이 든다. 왠지 낯익은 풍경이지 않은가? 역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종종 선보이던 '선택적 수사'의 그림자 말이다.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며 검찰을 자극하는 언론의 추임새와 야당의 '특검' 압박도 낯설지 않다.

문재인 정부 검찰의 위상 변화를 복기하면 참 흥미롭다. 개혁 대상 1호로 낙인찍혔다가, 적폐수사로 정권의 동반자가 됐다가, 범조국 사태 또는 윤석열 사태로 정권과 맞섰다가, 이제는 정권 재창출과 정권교체를 저울질하는 대형 수사로 정국의 전면에 부상했다. 검찰권력의 상징이던 윤석열 전 총장의 극적인 검사인생처럼 반전의 반전인 셈이다.

바야흐로 검찰의 시간

검찰은 최근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에 '이첩'을 요구했다. 경찰이 진행하는 곽상도 의원 아들의 '50억 퇴직금' 관련 수사를 검찰에 넘기라는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는 없어 보인다. 형사소송법 197조의4(수사의 경합) 1항에 따르면 '검사는 사법경찰관과 동일한 범죄사실을 수사하게 된 때에는 사법경찰관에게 사건을 송치할 것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경찰은 '지체 없이 검사에게 사건을 송치하여야' 한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검사가 영장을 청구하기 전에 동일한 범죄사실에 관하여 사법경찰관이 영장을 신청한 경우에는 해당 영장에 기재된 범죄사실을 계속 수사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197조의4 2항). 즉 넘기라고 해서 무조건 넘겨야 하는 건 아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검찰의 적극적인 태도다. 윤석열 전 총장이 사퇴한 이후 별 존재감이 없던 검찰이 여당 대선후보의 연루 의혹이 제기된 대장동 사건을 계기로 분위기 전환을 꾀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사건 이첩 요구는 수사 주도권을 쥐겠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시다. 검경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립으로 약해진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볼 수도 있다.
 

이정수 서울중앙지검장이 1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등검찰청, 수원고등검찰청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검찰의 이런 적극성은 국정감사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정수 서울중앙지검장은 1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감에서 "이재명 후보도 수사대상"이라고 밝히면서 성남시청 압수수색 등 대대적인 강제수사 가능성을 내비쳤다.

검찰은 야권 유력 대선주자인 윤 전 총장과 관련된 각종 고소/고발사건도 수사하고 있다. 공수처와 '쌍끌이 수사'를 벌이는 고발사주 의혹을 비롯해 김건희씨의 주가조작 연루 혐의, 코바나컨텐츠 기업협찬 의혹, 윤우진 전 용산세무서장 뇌물수수 의혹 등이 그 대상이다. 하나같이 폭발성이 강한 사안이다. 이중 일부만 사실로 드러나도 윤 전 총장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된다.

수사결과에 따라 대선 판도가 흔들릴 수 있다. 여야 유력 후보의 명줄을 쥔 수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검찰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철저한 수사'를 외치며 검찰을 압박한다. 겉보기에는 검찰이 위태로워 보인다. 어떻게 수사하든 어느 한쪽으로부터는 '정치검찰'이라는 비난을 들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검찰의 위기인가 호기인가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검찰에 호기일 수도 있다. 조직 명운이 걸린 검찰개혁이라는 관점에서 그렇다. 여당은 검찰개혁을 완성하겠다면서 수사/기소의 완전 분리를 추진 중이다. 이 안이 실현되면 검찰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변화를 맞게 된다.

6대 주요 범죄에 대한 직접수사 기능은 중대범죄수사청(가칭)과 같은 전문 수사기관으로 넘어가고, 경찰 수사를 점검하고 보완하는 간접수사 기능만 유지하게 된다. 수사하고 싶은 검사는 새 수사기관으로 이직해야 한다. 형사부와 공판부만 남고, 특수부 후신인 반부패강력부, 공공수사부 등 인지수사 부서는 폐지될 운명이다. 자연히 기소와 공소 유지가 주 임무가 된다. 영미식 기소 전문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조직과 인력의 조정이 불가피하다. 검찰판 정리해고인 셈이다.

친여권 검사든 친윤석열 검사든 조직논리는 다르지 않다. 검찰 힘의 원천인 수사권을 내놓는 걸 반길 검사는 많지 않다. 이를 막을 방법은 검찰의 존재감과 위상을 높이는 것뿐이다. 전례도 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 대선공약인 검찰개혁이 흐지부지된 데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 낸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큰 영향을 끼쳤다.
 

MBC < PD수첩 > '검찰 특수수사' 2부작 ⓒ MBC


문재인 정부는 중도 포기한 노무현 정부와 달리 검찰개혁을 꾸준히 단계적으로 추진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오점과 혼란도 있었다. 정권 초기 적폐수사로 공을 세운 검찰은 직접수사의 주력인 특수부의 조직과 인력을 한껏 키웠다. 특수부 인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윤석열 라인이 요직과 고위직을 장악했다. 검찰개혁에 역행하는 처사였지만, 윤 총장을 한 편으로 여긴 청와대는 이를 방치했다. 동상이몽이었다. 그런 모순된 상황에서 민정수석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올려 검찰개혁 고삐를 바싹 당기려다 사달이 난 것이다.

대선 국면에서 여야 양쪽을 건드리는 수사는 국민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검찰로서는 존재감을 드높일 절호의 기회다. 언론의 요란한 보도 경쟁도 한몫 할 터다. 여권에 유리하든 야권에 유리하든, 검찰로서는 나쁠 게 없다. 왜 그럴까?

'선택'의 명분

검찰 수사가 대선에 큰 영향을 끼칠 거라고 전제하면 그렇다. 물론 지지층은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결집하겠지만, 여론에 민감한 중도층 유권자의 표심은 출렁거릴 것이다.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 이번 대선은 박빙 승부다. 캐스팅 보트를 쥔 유권자들에게 검찰 수사 결과는 '선택'의 명분이 될 수 있다.

여권이 만족하는 수사 결과를 내놓으면, 정권 재창출에 이바지한 공으로 수사/기소 분리를 저지하거나 늦출 수 있다. 여당은 검찰을 배려해 속도조절을 하거나 강도를 완화할 개연성이 있다. 어쩌면 승리한 마당에 굳이 검찰을 건드려 여론을 시끄럽게 하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검찰을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져들 수도 있고.
 

이재명 대선 후보가 15일 오전 서울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수사 결과가 야권에 유리하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권교체에 공을 세운 검찰에 논공행상은 못 해줄망정 방 빼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검찰은 전통적으로 보수정권과 죽이 맞는다. 보수가 지키는 것이고 진보가 바꾸는 것이라면, 검찰과 보수정권의 교감은 넉넉히 헤아릴 수 있다. 정서적/정치적 우군인 셈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정권과 검찰이 어떻게 어우러졌는지 기억해 보라.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경선 후보가 14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국민의힘 경기도당에서 열린 '경기도당 주요당직자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1.10.14 ⓒ 국회사진취재단

 
만약 강력한 검찰주의자인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다면, 수사/기소 분리는 고사하고 그간의 검찰개혁 성과마저 퇴색하거나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 다수당인 민주당이 견제는 하겠지만, 대통령의 행정적 권한까지는 막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개혁 필요성에 공감하는 홍준표 후보가 당선된다면 다소 다른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민주당표 검찰개혁은 난관에 부닥칠 것이다. 홍 후보가 공수처 폐지를 주장하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다수당이라도 힘이 붙은 '친정권 검찰'을 공소청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검찰은 꽃놀이패를 쥔 셈이다. 눈에 띄는 편파 수사로 특검을 자초하지 않는 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석이조'를 누릴 수 있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면죄부를 안겨준 검찰의 BBK 수사와 윤석열 검사가 참여한 대선 직후의 BBK 특검이 본보기가 될 수도 있겠다.

검찰이 대선의 은밀한 승자가 될 거라고 보는 이유다. 그런데 이게 시대정신에 맞는 일일까? 많은 국민이 수사/기소 분리가 최종 목표인 검찰개혁을 지지한 것은 검찰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서 벗어난 '무소불위' 권력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대선을 통해 검찰에 다시 힘이 실리는 현상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검찰이 대선의 '은밀한 승자'?

검찰이 국민 신뢰를 되찾는 길은 공정하게 수사하는 것뿐이다.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 선택적 수사를 하다가는 자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축소도 안 되지만 과장도 금물이다. 명백한 범죄를 덮어주거나 축소했다가, 또는 여론에 떠밀려 무리하게 수사하거나 기소했다가 정치검찰이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인가?

국민도 언론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구속수사에 열광하지 말아야 한다. 검찰이 구속수사에 집착하는 건 법치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후진적 풍습이다. 구속하면 제대로 된 수사이고, 구속하지 않으면 '봐주기 수사'라는 법칙은 없다. 그거 다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 개발사업에서 특혜를 받은 의혹이 제기된 화천대유자산관리의 최대 주주 김만배씨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뇌물공여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횡령 등 혐의로 영장실질 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이희훈


치밀하게 수사해서 구속사유를 충족해야 한다. 그래야 수사 명분이 더 선다. 구속부터 해서 입을 열게 하려는 수사기법은 낙후된 것이다. 그 점에서 김만배 화천대유 대주주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대선후보와 관련된 수사라 과열될 개연성이 크다. 검찰을 '대선 공신'으로 만드는 과오를 피하려면 검사들에게 기대지 말아야 한다. 진영주의적 시각으로 검찰에 무리한 주문을 하거나 정치적 목적으로 검찰을 활용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검찰이 권력기관이 아닌, 수사기관이라는 본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적어도 수사/기소가 분리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게 도와주는 길이다. 검찰은 증거에 근거해 법대로 수사하면 된다.

<더 킹>에서 잘나가는 특수부 검사 한강식(정우성 분)은 검사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후배 검사 박태수(조인성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역사야. 이 나라고. ~그냥 권력 앞에 있어. 자존심 버리고."

돌이켜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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