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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사전녹화 된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본 후 박수를 치고있다. 2021.8.15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사전녹화 된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본 후 박수를 치고있다. 2021.8.15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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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김원웅 광복회장은 광복절 경축식 영상 기념사에서 "우리 국민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친일 정권과 맞서 싸웠"다면서 "4.19혁명으로 이승만 친일정권을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누군가는 국부로 추앙하고 누군가는 절대로 그만큼은 초대 대통령이 되지 말아야 했던 인물이라 비판한다. 김원웅 광복회장처럼 친일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친일 인사를 대거 등용했다는 이유에서다.

나도 이승만 정권의 그런 점은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단지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친일 인사가 등용됐다는 이유만으로 이승만 정권을 친일정권이라 단언하는 것은 옳은가. 의문이다.

미국의 일본 협력 강요는 곧 아시아의 공산화라던 이승만이 친일? 

이승만은 1954년 미국에 '경고' 담화를 발표한다. 담화의 주된 내용은 국토의 재건이 친일미국 관리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담화에서 비료의 경우 미국이 일본에서 1년에 4000만 달러씩 비료를 구입해 한국에 원조함으로써 일본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럴 바에는 1년 동안 비료를 쓰지 않을 테니 그 구매 비용을 준다면 한국이 자체적으로 비료공장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미국의 아시아정책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시기를 전후해 일본 중심으로 완전히 전환됐다. 이승만은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대해 '친일적'이라며 비판을 가했다.

이승만은 1954년 7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합의의사록'의 초안을 보자 강하게 반발하며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논쟁을 벌였다. 이승만이 반발한 까닭은 일본에서 원조 물품을 구매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반발에 의해 합의의사록의 내용 속에서 조달지역으로 일본을 지칭하는 문구는 사라졌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1956년에는 미국이 일본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1957년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씨에게 미국이 일본과의 협조를 강요하여 일본의 주도 아래 놓인다고 믿게 되면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미국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주의자와 협력해 미국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생각해보자. 세상 어떤 친일정권의 수장이 일본과의 협력을 극구 거부하며 미국에게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등 돌리고 공산주의자와 손 잡을 수도 있다면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하겠는가? 심지어 아이젠하워가 직접 한일수교를 권유했음에도 "내가 대통령에 있는 동안은 일본과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단호히 반대입장을 낸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이승만이 친일적 인물이었다면 왜 그렇게까지 수교를 반대했겠는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일본을 대신해 미국의 경제·군사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이승만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1948. 7. 20.)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1948. 7. 20.)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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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의 양해 하에 일본은 1달러 당 360엔으로 환율을 고정했다. 이승만은 한국이 태평양전쟁의 전범국가인 일본을 대신해 미국의 경제적 파트너가 되길 원했다. 그러니 미국의 대일 환율 혜택은 당연히 한국에도 적용돼야 했다. 

이승만은 일본처럼 환율을 고정시키고자 했다. 이는 1952년과 1953년의 마이어 협정 및 백우드 협정을 통해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국 통화의 과대평가를 추구했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기계 설비 등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많은 비용이 드는 수입 비용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뉴룩(New Look) 정책 하에서 대외원조를 감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원조를 감축해야 할 대상국으로 주목됐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7년 이후 한국에 대한 원조 규모를 30% 삭감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한국이 경제적 파트너로서 일본을 대신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바람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일본을 대신하기 어렵다면 남은 것은 안보적 측면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아시아의 안보에 있어서 일본을 재무장하기보다는 한국과 타이완, 필리핀을 주축으로 하는 태평양 동맹의 조직을 주도하고 그에 의존할 것을 기대했다. 즉 아시아판 나토의 구축을 기대한 것이다. 이승만의 구상은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인 만큼 태평양 동맹에서 일본의 배제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태평양 동맹의 군사적 성격이 소련의 반발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고, 일본 배제 방침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도 당초의 입장을 번복하고 태평양 동맹을 반공군사동맹이 아니라 문화·경제·정치적 동맹이 될 것이라 천명했다. 경제적 파트너에 이어 군사적 파트너로서도 한국은 일본을 대신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비판의 핵심은 친일 아닌 반(反)민주

이승만 정권은 친일이라기보다는 반일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나 개인의 독자적 의견이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학계의 중론은 이승만 정권의 대일인식은 반일적이라 평하고 있다.

사실 우리 국민이 4.19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이승만 정권이 반민주적 정권이었기 때문이지 친일 정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헌법 전문의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쓰인 대목에서 "불의"는 3.15 부정선거와 경찰의 폭력적인 시민 탄압을 뜻하지, 친일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승만에 대한 비판도 대개 그가 반민주적인 독재자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광복회의 성격 상 친일 문제에 민감한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반민주적이어서 무너진 정권을 친일 문제때문에 무너졌다고 곡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승만 정권을 비판할 거리는 차고 넘친다. 앞으로는 김원웅 광복회장이 친일 프레임 대신 민주화를 내세우며 4.19 혁명 정신을 얘기하길 바란다.

태그:#김원웅 광복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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