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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각역 인근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
 서울 종각역 인근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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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에 대한) 보훈처 심사가 현재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늦어도 많이 늦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받을 것이라고 본다. 아니 반드시 받아야 한다."

5일 '늦었다. 그러나 이제래도 동학 순국선열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기를 바란다'는 제목으로 동료 학자 7인과 함께 성명을 발표한 고석규 전 목포대학교 총장은 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고 전 총장은 "보훈처 서훈심사에서 역사적 진실에 맞는 올바른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면서 "일제에 맞서 싸워 희생당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참여자(동학농민군)가 지금까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한 이유를 밝혔다.

이날 고 전 총장을 비롯해 김봉곤(원광대), 김양식(청주대), 성주현(청암대), 신순철(원광대), 신영우(충북대), 이상식(전남대), 홍성덕(전주대) 등 8명의 역사학자들은 성명서를 통해 "동학농민명예회복법과 독립유공자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 전공 역사학자들의 불찰과 게으름도 없지 않았다"면서 "이제 우리 역사학자들은 관련 제도와 법령, 연구 성과에 의거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한다"라고 발표했다.

이들 말대로 국회는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2018년 우리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선정위원회' 논의를 통해 황토현전투 전승일인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제정해 2019년부터 기념하고 있다.

이렇듯 특별법이 통과되고 국가기념일도 제정됐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인 전봉준 장군은 여전히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전 장군뿐 아니라 1894년 당시 일제에 맞서 항거했던 동학농민혁명의 농민군 역시 사건 발생 127년이 지나도록 독립유공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훈처는 <오마이뉴스>에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전봉준 등 참여)를 독립운동의 범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학계의 의견이 달라 그동안 포상되지 않았다"면서 "향후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 심의·의결을 통해 그 인정 여부가 최종 결정될 예정"이라고 답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왜 서훈 받아야 하나?
 
호송되는 전봉준의 모습(좌측에서 세 번째)
 호송되는 전봉준의 모습(좌측에서 세 번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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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 총장은 전봉준 장군을 비롯해 동학농민군이 서훈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1894년 7월 일제가 경복궁을 침범해 점령한 사건에서 출발해 이에 대한 항거로 이어진 싸움"이라면서 "이로 인해 무수한 희생도 있었다. 일제에 맞서 싸운 것이 독립운동이 아니라면 무엇이 독립운동이냐"라고 지적했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순국선열)'가 독립유공자가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항거까지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 이렇게 따지면 임진왜란도 독립운동 아니냐"라는 지적이 있다. 이에 대해 고 전 총장은 "임진왜란은 일본과 전쟁을 한 것이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킬 때부터 조선을 '보호국'화하고 궁극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세운 거다. 일본의 조선침략을 1894년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우리는 이 흐름 속에 나라를 잃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항거는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일어난,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일항거의 시작점이다."

실제로 학생들이 사용하는 한국사 검정교과서에도 2차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한 제2차 농민운동"이라면서 "농민군은 반침략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다"라고 서술돼 있다. 역사학계는 1894년 초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1차 봉기로, 일제의 경복궁 침탈 이후 일어난 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로 보고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 동학농민혁명 이용... 서훈은 왜 빠졌나?"
 
1973년 박정희 정권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 비문에는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탑을 세우노니"라고 되어 있다.
 1973년 박정희 정권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 비문에는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탑을 세우노니"라고 되어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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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박정희 정권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 비문에는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탑을 세우노니"라고 되어 있다.
 1973년 박정희 정권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 비문에는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탑을 세우노니"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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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 총장은 통화에서 "보훈처 서훈심사 과정에선 관행적으로 1895년 을미의병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왔다"면서 "동학농민군과 을미의병의 차이는 신분상 농민과 양반뿐"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주 우금치를 비롯해 황토현 전적지, 동학혁명유적지기념관, 위령탑, 전봉준고택 등 동학관련 유적지가 얼마나 많나. 그런데 서훈자 하나 없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우금치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을 만든 건 박정희다. 전북 정읍 황토현 전적지를 조성한 것은 전두환이다. 말 그대로 우파 민족주의를 활용하려고 동학농민군을 이용한 거다.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진정으로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서훈자 한 명 없다는 것이 말이 될 일인가 싶다."

고 전 총장 말대로 충남 공주 우금치 언덕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은 1973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세워졌다. 비문에는 "님들이 가신 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탑을 세우노니"라고 되어 있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은 전북 황토현 전적지 일대에 '황토현 기념관'을 건립하고 입구에 '황토현 전적지 정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뒷면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유시로 비가 세워졌다"라고 적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6일 <오마이뉴스>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올 4월 말 기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로 공식 등록된 인원은 총 3687명이다.

태그:#동학, #전봉준, #동학농민운동, #보훈처,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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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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