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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 직후부터 문재인 정부와 대립각을 보이고 있다. 4.7 재보궐선거 다음날부터 직무를 개시한 그는 11일엔 재개발·재건축 규제의 완화를 시사하고, 12일엔 '서울형 거리두기 매뉴얼' 천명을 통해 독자적인 코로나 19 방역 가능성을 시사했다.

2021년 한국 사회에서 민감한 현안 두 가지에 대해 서울시가 독자 노선을 시도할 가능성이 포착된 것이다. 향후 1년 동안의 '서울특별시와 대한민국의 관계'에 우려를 품게 할 만한 현상이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에 뿔난 MB "안보 포기" 
 
2003년 4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이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2003년 4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이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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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에서 폴란드 및 미국을 상대로 1승 1무를 기록한 한국 대표팀이 포르투갈과의 3차전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 13일.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드는 축구 열기 와중에도 제3회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효순이·미선이 사건도 이날 발생했다.

이때 서울시장에 당선된 보수야당 후보가 이명박씨다. 서울시장이 된 그는 같은 해 12월 19일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을 상당히 치열하게 견제했다. 이명박의 움직임은 노무현이 당선되기 전부터 활발했다. 대선 전부터 그는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공약을 집중 공격했다.

대선 5일 전 발행된 2002년 12월 14일 치 <한겨레> 기사 "이명박 시장 '행정수도 이전 반대'"에 따르면, 이명박은 수도방위사령관이나 병무청장 같은 발언들을 하며 노무현의 공약을 비판했다. 그는 12월 13일 기자간담회에서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은 서울 지역의 안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행정수도를 옮기면 수도방위사령부가 사실상 서울과 대전 두 군데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노무현 후보의 공약처럼 군복무 기간을 단축할 것이 아니라 기간을 늘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행정수도 특별법)'이 그해 12월 국회를 통과하고 뒤이어 2004년 4월 특별법 시행에 들어간 뒤에도, 이명박 서울시장의 공세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2004년 10월 18일 서울시 국정감사 때는 행정수도 반대운동을 애국운동으로 미화하기까지 했다. 그날 발행된 <오마이뉴스> 기사 "이명박 시장 '행정수도 이전 반대는 애국운동'"에 따르면, 이명박은 "행정수도 이전 반대는 나라를 사랑하는 일종의 애국운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박상돈 열린우리당 의원이 "서울시가 독립국가냐?"고 묻자 그는 "충분히 국민투표를 부칠 만한 사안"이라며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지론을 재차 강조했다.

이명박이 중앙정부에 홀로 맞선 건 아니었다. 한나라당이 차지한 서울시의회도 서울시청과 함께 반대운동에 동원됐다. 이로 인해 '관제 데모' 논란까지 일어났다.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이명박이 관제데모를 위해 서울시 예산을 유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대한민국의 문제인 동시에 서울시의 문제였다. 그래서 행정수도를 서울에서 충청으로 이전하겠다는 노무현의 공약은 누구보다도 이명박 서울시장의 격렬한 반발을 낳았다.

노무현에 대한 이명박의 도전은 부동산 문제에서도 나타났다. 노무현은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자 종합부동산보유세(종부세)를 도입한 반면, 이명박은 '뉴타운 사업'으로 대표되는 재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대통령의 핵심 정책과 관련해 서울시장이 정반대 행보를 보였던 것이다.

질긴 인연 

이명박의 도전은 나름의 역사가 있는 도전이었다. 그 역사는 그가 전국구(비례대표) 초선 의원일 때인 1996년에 시작됐다. 이 해에 그는 제15대 총선에 출마해 초선 노무현과 맞붙었다. 이 시점부터 노무현이 서거한 2009년까지 이명박은 노무현과 깊고 깊은 연(緣)으로 얽혔다.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 및 통합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더불어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가 서울 종로구에서 격돌한 15대 총선은 이명박에게 특별히 강렬한 기억을 남긴 사건이다.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그가 이 일을 비중 있게 언급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야권 후보들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정계에서 잔뼈가 굵은 내로라하는 정치인들도 '정치 1번지' 종로 출마를 마다했다. 후보를 찾지 못한 당은 내게 종로 출마를 권했다. 정치 신인인 내가 종로에서 당선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이명박은 1992년 3월 총선에서 민주자유당(민자당) 전국구로 당선됐다. 그의 이름은 1991년부터 정치권에서 거론됐다. 그렇기 때문에 1996년 시점에는 딱히 정치 신인이라 말하기가 좀 애매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표현을 사용했다. 거물급 보수 정치인들도 종로구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정치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이 막강한 야당 후보들을 상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는 15대 총선에 관한 설명을 끝내는 대목에서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선거 결과는 예상 밖의 대승이었다. 나는 40.5%를 득표해 33%를 얻은 이종찬 후보, 17%를 얻은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무엇보다도 종로에서의 승리는 지역감정이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아니라 깨뜨릴 수 있는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었다."
 
1998년 7월 21일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도렴동 선거사무실에서의 부인 권양숙 여사 및 운동원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다.
 1998년 7월 21일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도렴동 선거사무실에서의 부인 권양숙 여사 및 운동원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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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1996년 당선을 '새로운 정치의 시작'으로 높이 자평했지만, 얼마 안 있어 선거법 위반으로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의원직을 사퇴했다. 1998년 2월 21일 사표가 수리된 그는 11월 15일 조지워싱턴대학 객원연구원이 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11월 출국 전에 그는 7월 21일 종로구 보궐선거를 지켜봐야 했다. 이때도 노무현이 출마했다.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한 노무현은 이명박의 1996년 득표율보다 13%p 높은 54.4% 득표율로 당선했다. 이것이 노무현의 역대 최고 득표율이 됐다.

1988년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이래 1992년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총선에서 연거푸 낙선했던 노무현은 종로구 보궐선거를 계기로 에너지를 새로 충전했다. 이 일은 그의 운명이 2002년 대선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이명박이 자신의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 됐다고 자평한 서울 종로구에서 노무현도 새로운 도약을 열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명박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이 당선되고,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이 당선됐다. 그 당선의 결과로 노무현과 이명박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들어갔다. 1996년 이래 두 사람의 '연'은 종로구를 매개로 전개됐다고 볼 수도 있다.

2021년 문재인-오세훈은?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16회 국무회의에서 오세훈 서울시장과 화상을 통해 인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16회 국무회의에서 오세훈 서울시장과 화상을 통해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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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를 매개로 질기다면 질기게 이어진 노무현과 이명박의 역사다. 그 역사가 전개되는 도중인 2003~2006년에 노무현과 이명박은 대통령과 서울시장으로서 갈등을 겪었다.

이 시기에는, 노무현이 하고자 하는 것들을 이명박이 견제하는 양상이 전개됐다. 이명박은 행정수도 이전 반대와 재개발 붐을 통해 노무현의 핵심 정책을 견제했다. 1996년 이래의 질기고 질긴 '연'이 있었기에 2003~2006년의 갈등이 좀 더 격한 양상을 보였을 수 있다.

2021년 지금은 대통령과 서울시장의 임기가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 간에는 노무현과 이명박 사이의 '연'과 같은 것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행정수도 이전처럼 대한민국정부와 서울시를 대립케 할 만한 이슈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앞으로 1년간 서울시와 중앙정부가 갈등을 겪는다고 해도 2003~2006년처럼 격화되진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가능하다. 이명박 시장 때처럼 보수 야당이 서울시의회를 차지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하지만 위험 요인이 있다. 이념 대결로 볼 수 있는 이슈들이 노무현 재임기에도 상당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하면 덜했지 덜하지 않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극우적 색깔이 정부-서울시 대결에 미칠 영향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코로나 19라는 세계적인 초대형 악재가 도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와 중앙정부가 과도하게 갈등을 빚는다면, 코로나19를 비롯한 주요 문제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통합을 위한 사회적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태그:#오세훈, #서울시장, #재개발 재건축, #서울형 거리두기 매뉴얼, #부동산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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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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