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포스터

영화 <미나리> 포스터 ⓒ 판씨네마

  
<미나리>는 미국영화다. 미국 제작사 플랜B가 제작했다. 한국계지만 미국인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이 연출했다. 아역을 포함해 '팀 미나리'라고 부르는 주연 배우 5인 중 스티븐 연을 포함해 3명이 미국인이다. 당연히 미국에서 촬영했다. 맞다. <미나리>는 누가 봐도, 어떻게 봐도 미국영화다.

5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주관하는 할리우드 외신 기자 협회(Hollywood Foreign Press Association, HFPA)가 지난 3일(현지시간) <미나리>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지명했다. "바보 같은 결정"이라는 질타가 쏟아졌다. 자국영화는 본편의 영어 대사가 51% 이상이라는 HFPA의 규정 때문에 일어난 촌극이다. 외국어영화상에 올랐으니, 작품상과 같은 주요 부문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미나리>는 1980년대 한국 이민 가족의 정착기를 그렸다. 가족 간의 관계가 주요 이야기인 만큼, 주요 대사 또한 당연히 한국어다. '미드' <워킹데드>로 전 세계인에게 얼굴을 알리고 봉준호 감독의 <옥자>,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 출연했던 한국계 미국인 스티브 연은 한국계 이민자를 연기하며 일부러 어눌한 영어 연기를 선보였을 정도다.

앞서 <미나리>는 36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미국 내에서 화제를 모았다. '오스카 레이스'에 돌입했던 <기생충>이 오스카 상을 휩쓸기 전이었다. 물론, 두 부문 다 '월드 시네마'가 아닌 미국 드라마 부문 수상이었다. 그러니까 할리우드 '외신' 기자 협회의 시대착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우스꽝스런 규정이 미국영화를 단숨에 외국영화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망신살 뻗은 할리우드 외신기자 협회

떠올려 보라. 한국인들이 다수 등장하고 대사의 절반이 한국어인 영화를 브래드 피트가 제작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할리우드 외신 협회는 이 영화를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이름을 올렸을까.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미나리>와 같은 범주였지만 골든글로브가 환대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타즈: 거친녀석들>의 편집 감독 스스로가 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지적하고 나섰을까. <미나리>의 골든글로브 주요 부문 후보 탈락이 할리우드에서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해 오스카는 봉준호 감독의 '한국어 영화' <기생충>에 주요 부문을 몰아주지 않았던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영화인들도 비판 대열에 동참할 만했다. 역시 한국계 피가 섞인 아콰피나가 주연한 <페어웰>의 중국계 룰루 왕 감독은 <미나리>를 "올해 본 가장 미국적인 영화"라 평하며 "미국인은 영어만 쓴다고 규정하는 낡은 규칙을 바꿔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 바 있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한 <페어웰>은 역시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중국어 대사가 다수 쓰였다는 이유로 아콰피나에게 아시아계 최초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기는데 그쳤다. <미나리>의 배급사 역시 이런 불합리한 규정을 모르지 않았을 터.

최근 미국 매체 베네티페어와 인터뷰한 리 아이작 정 감독은 <미나리> 역시 자연스럽게 <페어웰>의 선례를 따른 배급사 측의 결정이라고 털어놨다. 공교롭게도, 골든글로브 후보가 발표된 3일 공개된 해당 인터뷰에서 정 감독은 '백인 보수 꼰대'로 낙인찍힌 할리우드 외신 기자들과 달리 다인종 국가 미국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이번 논란으로 상처를 받은 관객들, 그 중 비백인 관객들의 분노를 헤아리고 있었고. 애꿎게도, 해당 '베네티페어'의 기사 제목은 <'미나리' 외국어 영화 논란의 진짜 뒷얘기>였다.

<미나리>의 감독이 한국계 미국인이라 느꼈던 감정들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 판씨네마


"이번 논란에 대해 심사숙고했고, 사람들이 느끼는 고충도 이해해요. 저도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백인이 아닌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종종이 미국에서 외국인인 것처럼 느끼고, 꼭 그렇진 않아도 외국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요. 내부적으로야 완전히 미국인이란 느낌을 갖고 있지만."

어쩌면 비백인이자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겪은 슬픈 진실이리라. 그러면서 정 감독은 "여기가 집인 거죠"(This is Home)라고 덧붙였다. 뉘앙스로 보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현실이 이 정도죠'라는 공감 반 체념 반의 정서가 묻어난다고 할까.

정 감독은 앞서 소개한 <페어웰>을 "드라마나 코미디로서나 최고의 작품이지만 (골든글러브)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 뒤 "<미나리>도 그 선례를 따라야 했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일종의 '울며 겨자 먹기'와 같은 상황이었던 셈이다.

정 감독과 배급사 측은 논란이 되자 이 같은 내용을 성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후보 발표 이전, 할리우드 외신 기자협회 측 취재원을 통해 <미나리> 측이 자발적으로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부문 출품했다는 억측이 전해졌고,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성명까지 발표해야 했던 셈이다. 정 감독은 이런 논란에 대해 보수적인 할리우드 외신 기자 협회보다 훨씬 더 성숙한 태도를 보였다. 도리어 관객들의 분노를 오히려 진정시키는 모습이었다.

"할리우드 외신 협회를 악마화하고 싶지 않아요. 그들도 시상을 통해 영화들을 격려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그들이 하려는 일은 긍정적은 일이고, 그들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제 생각엔 이번 논란이 긴 세월동안 미국에서 영화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스페인어든 한국어든, 또 다른 언어든 '외국어 영화들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그 영화들이 대개 미국 영화는 아니었던 거죠. 보통이 미국 외 영화였던 거고."

한국계 미국인 감독으로서 느끼는 미국 영화계의 실상이라 보면 틀리지 않을 터. 이쯤 되면, 지난해 <기생충>의 '오스카 레이스' 당시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시상식을 '로컬'이라 일컫고, 미국 관객들이나 비평들가들에게 "1인치 자막을 뛰어 넘으라"는 충고를 했던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신선한 자극이었을지 더 크게 다가오지 않는가.

뒤이어 정 감독이 들려주는 미국 문화의 현실은 미국 이민자들을 통해 반추하는 미국, 아메리탄 드림이란 <미나리>주제와도, 윤여정이 연기한 '한국 할머니'가 전하는 독특한 정서와도 분명 맞닿아 있었다.

"실제로 미국에서 영어 외의 언어로 제작되는 영화는 많지 않아요. 외국어영화상이란 어떤 범주가 형성돼 버린 것도 그래서인 거 같고요. 할리우드 외신 협회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죠. 미국이란 문화 전체가 그래요. 영화감독들도, 거대 배급사들도 마찬가지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선택이 또 그들이 보는 영화의 종류를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그런 범주가 우리네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꼭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계속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골든글로브의 홀대와 지난해 <기생충>이 열어 놓은 가능성
 
 23일 오후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화 <미나리> 관련 기자 간담회. 리 아이작 정 감독과 스티븐 연은 미국 LA 현지에서 배우 윤여정, 한예리는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 각각 자리했다.

배우 윤여정 ⓒ 부산국제영화제

 
정 감독은 이렇게 비백인 아시아계 미국인 감독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미나리>란 영화를 둘러싼 환경과 현실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자전적인 요소를 녹여낸 두 번째 작품을 통해 그러한 이민자들의 보편적 현실과 그 이민자들로 이뤄진 미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냈고. 

'트럼프 시대'를 종언한 미국에선 그럼에도 여전히 비백인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가 뜨거운 감자라 할 수 있다. 양극화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통해 미국 내 관객들과 할리우드를 매료시킨 <기생충>과는 같은 듯 다른 양상으로 비평가들을 매료시키고 있다는 평가다.  

그리고 할리우드 외신 기자협회의 규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골든글로브 후보 발표 다음날인 4일 제27회 미국배우조합상(SAG)은 <미나리>가 앙상블상, 여우조연상, 남우주연상 총 3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맞다. SAG는 지난해 <기생충>이 '앙상블상'을 수상했던 바로 그 시상식이다. 당시 한국 배우들의 SAG 수상으로 '오스카 레이스' 중이었던 <기생충>이 오스카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는 것 아니냐는 미국 내 관측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외국어영화상에만 올라도 영광이라던 애초 국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였고.

SAG의 후보 발표와 함께 결국 골든글로브의 헛발질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골든글로브의 경우 할리우드 외신기자 협회 회원들의 투표로 이뤄지며 TV 부문까지 폭넓게 수상한다. 특히 영화 부문의 경우, 뮤지컬 코미디 부문과 드라마 부문으로 세분화해 종종 의외의 선택으로 할리우드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동시에 오스카 시상식에 앞서 치러지기에 오스카상에 투표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들이 골든글로브와는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고.

그 와중에 '미리 보는 오스카'라 일컬어지는 두 시상식 중 51% 조항에 발이 묶인 골든글로브와 달리 SAG가 <미나리>에 대한 '다른' 선택으로 차별화를 자랑한 셈이 됐다. 지난해 오스카도 <기생충>의 주요 부문 수상이란 다르고도 특별한 선택을 통해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란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골든글로브가 기존 '영어 대사 51% 이상'이란 시대착오적인 조항으로 인해 '보수적'이란 이미지를 가져가게 됐다.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로서는 <미나리>를 주목함으로써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인종차별적이란 기존 이미지를 씻을 수 있는 계기로 만들고 싶지 않을까. 

오스카의 연기상 후보는 주로 작품상 등 주요 부문 후보작들의 주조연 배우들이 지명되기 마련이다. 미국 내 영화 시상식의 여우조연상을 휩쓸고 있는 윤여정의 오스카 후보 지명 역시 <미나리>가 선전해야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미나리>의 미국 배급사인 A24가 지난해 <기생충> 배급사인 네온처럼 '오스카 레이스'에 몰두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골든글로브의 홀대가 도리어 <미나리>를 더 주목받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윤여정이 오스카 시상식장 객석에 앉아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작지 않다는 얘기다. 골든글로브의 우스꽝스런 규정과 그로 인한 <미나리>에 대한 결과적인 홀대가 오히려 전화위복인 이유 되겠다. 
미나리 정이삭 기생충 골든글러브 오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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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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