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4 16:53최종 업데이트 21.02.0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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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은 1일 성명을 내고 "'선거 사기'(election fraud)에 대응하여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등) 정부 인사들을 구금을 했다"며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최고사령관인 민 아웅 흘라잉에게 권력을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 ⓒ 연합뉴스/EPA

 
지난 1일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민족연맹(NLD)이 기록적인 압승을 거둔 데 대해 군부가 불복한 것이다. 이번 쿠데타는 미얀마의 국내정치 상황은 물론, 지정학적 국제관계, 그리고 정치 일반에 걸쳐 많은 시사점을 보여준다.

미얀마의 현대 정치사에서 군부의 힘은 유사한 시기에 정부를 수립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예외적이다. 미얀마 군부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합법적 정치 참여를 보장받는 것은 물론, 선거를 초월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절대 권력은 급기야 선거에서 83%의 선출직 의석을 확보한 집권당까지 무력으로 몰아내기에 이른다.


미얀마는 19세기 말 영국이 지배하는 인도에 병합돼 한 주(州)로 전락했다가 이후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간다. 일본이 2차 대전에 패망하면서 미얀마는 다시 영국령이 되는데 이 때 영국과 일본에 저항하는 미얀마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아웅 산 장군이다.

아웅 산 장군  

아웅 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에 결정적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다수인 버마족을 비롯해 다양한 소수민족들에게도 자치권을 약속하는 등 모두가 공평하게 공존하는 연방주의 미얀마의 미래를 꿈꿔왔던 인물이다.

결국 영국으로부터 미얀마의 독립을 이끌어낸 아웅 산 장군은 국가 재건 준비에 한창이던 어느 날 군부 반대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그날이 1947년 7월 19일. 같은 날 한반도에서는 역시 일본 패망 후 좌우,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 국가의 재건을 꿈꾸던 몽양 여운형이 암살을 당한다. 같은 시간 같은 꿈을 가진 두 지도자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생을 달리 한 셈이다.

연방주의자이자 국부 아웅 산 장군이 사라진 미얀마는 이후 민족 간의 갈등,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렁으로 빠져든다. 사회통합에 이어 경제정책마저 실패하면서 미얀마의 민주 정부는 결국 군부 쿠데타에 무너졌다. 1961년의 일이다.

18년 가까이 이어지던 군사정권은 1988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나면서 퇴진하고 다시 공화국 체제가 들어서지만 군부의 영향력은 끝날 줄을 모른다. 옛 군부가 신군부로 대체될 뿐. 1988년 또 한 번의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정당을 조직해 공화국 체제 안에서 지속적 영향력을 도모하게 된다.

원래 '버마'였던 국명이 '미얀마'로 바뀐 것은 바로 이 때다. 그 이후 지금까지 국제사회는 한쪽에서는 '버마'로, 다른 한쪽에서는 '미얀마'로 부른다. 영국과 미국의 정부와 언론에서는 '버마'로 부르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듣는다. 반면 프랑스, 일본 등은 '미얀마'로 부른다. 왜일까?
 

쿠데타가 발생한 미얀마 수도 네피도의 정부청사 단지에서 2일(현지시간) 의원들이 구금된 것으로 알려진 영빈관 입구를 무장 경찰이 지키고 있다. ⓒ 연합뉴스

 
'버마'냐 '미얀마'냐

같은 어원인 '미얀마', '버마'로 혼재돼 사용되던 중 19세기 이 지역을 강점한 영국이 이름을 '버마'로 공식화한다. 그러다 1989년 신군부는 다시 국명을 '미얀마'로 변경한다. 이때 사용한 명분이 '영국식민잔재 청산'과 '국민통합'이다. 앞서 언급했듯 미얀마에는 버마족 외에도 소수민족들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버마'냐, '미얀마'냐는 이 나라의 정통성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다. 영국 식민잔재 청산에 두느냐 군부독재 청산에 두느냐에 따라 각각 다르게 부르는 것이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 시절 이 지역에서 영국과 경쟁하던 프랑스와 일본은 '미얀마'라는 국명을 사용하는 반면 이 지역을 과거 식민통치했던 영국은 지금도 '버마'로 부른다. 보통은 해당 국가의 요구대로 부르는 것이 국제사회의 관례다. 그래서 한국 정부도 1991년부터 '미얀마'로 고쳐 부른다.

미국의 경우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시 '미얀마'로 부르지 않고 '버마'로 흔히 부른다. (모든 미국 언론이 '버마'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 경영 역사를 반영하는 영국, 프랑스, 일본에 비해 미국의 명분은 좀 더 그럴 듯하다. 물론 그 명분 뒤에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관련한 지정학적 노림수가 있음은 물론이다. 미얀마는 미국이 인도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할 주요 거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미얀마의 군부세력은 중국 정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 구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효과적 전략이 미얀마 민주화 세력에 대한 지원이다. 

미얀마의 국명을 무엇으로 부르느냐는 이처럼 '알쓸신잡' 차원의 지식을 넘어 중요한 문제를 담고 있다. 정치는 절반이 명분싸움이다. 누가 먼저 강력한 명분을 차지하느냐에서 승패의 반이 이미 결정된다. 미얀마 신군부가 국명을 '미얀마'로 정하면서 이들이 확보한 명분은 제국주의 청산과 국민통합.

그렇다면 신군부를 무너뜨리려면 그들의 정적들은 그 이상의 명분을 확보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몇 배의 힘든 싸움을 감수해야 하며, 혹여 이 프레임의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 또 몇 배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장군의 딸, 아웅 산 수치

아웅 산 장군의 딸 아웅 산 수치는 영국에 유학하던 중 잠시 귀국한 1988년 당시 미얀마 국민들의 대대적 봉기를 목격한 후 자신의 삶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한다. 정치 명문가 집안의 유복한 유학생 신분에서 한 순간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는 민주 투사로 변신한 것. 그렇게 아웅 산 수치는 20년의 가택연금과 핍박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지치지 않는 긴 여정의 비폭력 투쟁은 결국 미얀마 민주화의 길을 열었고, 자신은 노벨평화상 수상을 비롯해 세계 인권의 꽃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해 11월 총선,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상하원 각각 전체 의석의 25%를 군부가 차지한다는 유례없는 악법에도 불구하고 상원 224석 가운데 138석, 하원 440석 가운데 258석을 얻어 모두 과반을 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이제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민족동맹은 군부에 할당된 25%라는 악법도 수정하고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퇴출시킬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두 달여 후, 절벽 앞에 내몰린 군부는 또 한 번의 쿠데타를 일으켜 수백 명의 집권당 의원과 정부 인사들을 감금했다. 쿠데타 발생 이틀 후 대부분의 감금되었던 정치인들은 석방됐지만 아웅 산 수치는 15일까지 구금될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의해 기소까지 됐다. 죄명은 수출입법 위반. 수입 금지된 워키토키를 소지했다는 이유다. 선택적 기소는 고삐 풀린 사정기관의 전형적 무기다.
 

아웅 산 수치 ⓒ 연합뉴스

 
신군부 쿠데타의 노림수

쿠데타 세력을 향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력이 계속되고 국민들은 불복종 저항을 할 태세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 미얀마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지정학적 전략지이기도 하다. 국내정치가 국내정치로만 남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미얀마 군부는 왜 이 시점에 이토록 대담한 쿠데타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있다. 미얀마 군부는 수십 년 동안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반면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세력은 미국을 등에 업고 있는 상황. 지난 11월 선거에서 아웅 산 수치는 압승을 거뒀고, 미국에서는 바이든 정권이 출범했다. 미얀마 군부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현재까지 미얀마 사태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섣불리 개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난감한 입장에 놓인 것은 미국이다. 바이든 정부는 아웅 산 수치의 압승으로 미얀마를 확실한 친미 진영으로 만들 수 있는 목전에서 미얀마 군부에 허를 찔린 상황이다. 미얀마 군부는 국내문제를 미중 대결구도로 끌고 가는 대담한 배팅을 한 셈이다.

미얀마 군부는 또 하나의 승부처를 국내적 요인에서 찾았다. 앞서 살펴본 대로 미얀마 군부는 과거 국명을 '미얀마'로 바꾸기까지 하면서 영국의 잔재 청산과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번 선거를 통해 분명한 민심을 확인한 군부는 아웅 산 수치와 민주세력을 상대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는데 그것이 바로 명분 싸움이다. 

잘 알려진 대로 아웅 산 수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런던 대학에서 수학했다. 1999년 사망한 남편도 영국 유학시절에 만난 영국인이고 슬하의 두 아들도 영국 국적자다. 아웅 산 수치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군부는 직계가족이 외국인인 경우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는 황당한 법 조항을 통해 그의 출마를 막았던 것처럼 아웅 산 수치와 영국과의 관계를 꾸준히 정치적으로 악용해왔다.

영국과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이 졸렬한 군부의 탄압이라면 국민통합 차원에서 아웅 산 수치의 약점은 전적으로 그 스스로 야기한 것이다. 다민족 국가인 미얀마는 다수의 불교도 버마족을 제외한 타종교 타종족에 대한 탄압이 오래전부터 자행돼 왔다.

아웅 산 수치의 약점

군사독재시절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특히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세계의 눈은 이 지역의 소수민족 문제 특히 로힝야족에 대한 처우를 둘러싼 아웅 산 수치의 입장에 집중됐다. 하지만 아웅 산 수치는 놀랄 만큼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과 학살에 침묵했고, 심지어 능동적으로 관여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특히 2018년에는 광주인권상을 비롯해 그가 수상한 전 세계의 많은 상들이 철회됐고 명예 시민권도 박탈 당하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그를 중심으로 불거져오던 버마 민족주의에 대한 의구심과 군부를 상대하는 특수성으로 이해되던 그의 독재적 정치성향들이 모두 함께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를 감행한 미얀마 군부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민주 대 독재의 구도를 상당 부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실제 쿠데타 이후 국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일부 나온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아웅 산 수치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선과 악의 섣부른 대립은 왜곡된 해석과 판단의 오류를 초래한다. 미얀마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문제는 어쩌면 단순히 선과 악으로 분류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선과 차선 또는 악과 차악의 관계로 볼 때 본질에 더 가까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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