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조선 후기의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단군.
 조선 후기의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단군.
ⓒ wiki commons

관련사진보기

 
1900년대를 전후하여 나라의 운명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황실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으로 갈리어 권력투쟁의 장(場)이 되고 지도층은 청국에 기댄 위정척사파와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국정은 세도정치로 부패타락하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천주교가 들어와 반상의 신분질서를 바꾸고자 하였지만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낸 채 지하에 숨어들었다. 동학농민군이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일본군이 들고온 신식 무기에 녹두꽃처럼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이었다. 백성들은 육체적으로 시달리고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럴즈음 이땅에서는 각종 민족종교가 창도되고 중광하여 신생(新生)의 횃불이 되거나 더러는 혹세무민에 나섰다.

대종교ㆍ천도교ㆍ시천교ㆍ청림교ㆍ상제교(上帝敎)ㆍ수운교ㆍ경천교ㆍ천도명리교(天道明理敎)ㆍ제우교(濟遇敎)ㆍ백백교ㆍ태을교(太乙敎)ㆍ보천교ㆍ단군교ㆍ원종교(元宗敎)ㆍ원불교ㆍ증산교 등이 개인의 치병에서 영혼구제, 국난극복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의 사명을 제시하면서 창도되었다. 

민족종교 중에는 본래의 목표대로 정진하는 교단이 있었는가 하면 상당수는 변질되어 친일 매국의 앞잡이가 되거나 국난기에 편승하여 혹세무민을 일삼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종교 중에서 대종교는 가장 격렬하고 줄기차게 일제침략자들과 싸웠다.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의 전통과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군교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명칭을 달리하면서 면면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부여에서는 대천교, 예맥에서는 무천, 마한에서는 천군,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천신교라 불리면서 개국주(開國主) 단군을 받들었다. 

단군숭배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단군교는 고대시대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단군(교)의 존제가 역사현장에 새롭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ㆍ민족적 일체감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안으로는 무인정권의 폭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내적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이 단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적인 위기를 국조를 중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몽골제국이 13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할 때 나타난 단군교가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국권이 위태로와지면서 국권회복의 구심체로서 부활하였다. 몽골침략 이후 7백여 년간 단절되었던 단군교가 1910년 8월 5일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면서 국난극복의 '구원투수'로 등장시켰다. 이런 면에서 나철 선생의 업적은 독립군부대의 편성이나, 임시정부의 조직에 못지 않은 것이다. 

단군교가 대종교로 명명한 날을 중광절이라 한 것은 단군신앙의 부활을 뜻한다. '중광'(重光:거듭 빛남)이란 국교(國敎)의 계승을 분명히 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태그:#나철, #나철평전, #홍암, #홍암나철평전, #중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