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한국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는 미여자골프협회 LPGA 투어는 야구의 메이저리그, 농구의 NBA처럼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골프투어로 꼽힌다. 물론 한국에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KLPGA 투어가 있고 일본에도 JLPGA에서 주최하는 여자골프투어가 있지만 규모나 상금, 출선 선수들의 수준 등에서 미국의 LPGA에는 미치지 못한다. 

LPGA에는 가장 권위 있고 상금 액수가 높은 5개의 메이저대회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1946년에 창설된 US여자오픈 대회는 LPGA가 설립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가장 깊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회다. 당연히 상금총액이나 우승상금의 규모도 가장 높고 US여자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곧바로 세계 골프팬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으며 LPGA의 정상급 선수로 인정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대회 이름부터 미국의 색깔이 짙은 US여자오픈 대회는 유난히 한국 선수들과 인연이 깊다. 1998년 박세리를 시작으로 무려 10명의 선수가 11번의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올해도 첫 출전한 김아림이 코로나19로 인한 출전자격 확대로 운 좋게 대회에 출전해 극적인 역전우승을 차지했다. 역시 US여자오픈 대회는 한국 선수들을 위한 무대라는 사실이 또 한 번 증명된 것이다.

박세리 '맨발투혼'으로 시작된 한국의 US여자오픈 선전
 
'노는 언니' 박세리, 놀아보자! 박세리 전 골프선수가 3일 오후 진행된 티캐스트 E채널 <노는 언니> 온라인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노는 언니>는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것들에 도전하며 '놀아보는' 세컨드 라이프 프로그램이다. 4일 저녁 8시 30분 첫 방송.

박세리 전 골프선수 ⓒ 티캐스트 E채널


미국의 골프대회 중 하나에 불과했던 US여자오픈이 한국의 스포츠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역시 '골프여제' 박세리의 등장이 그 시작이었다. 박세리는 LPGA 투어 참가 첫 시즌이었던 1998년 US 여자오픈에서 그 유명한 '맨발투혼'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IMF 금융위기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아무리 골프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양희은의 <상록수>를 배경음악으로 박세리가 물 속에서 스윙을 하는 장면은 한 번쯤 봤을 것이다.

박세리가 아주 멋지게 스타트를 끊었지만 US 여자오픈 한국인 다음 우승자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방콕아시안게임 단체전 은메달리스트 김주연은 LPGA 투어 2번째 시즌이었던 2005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하지만 김주연의 우승기록 3오버파는 21세기 US여자오픈에서의 유일한 오버파 우승기록으로 남아 있다.

2008년에는 박세리 이후 세계 여자 골프계를 흔들어 놓은 또 한 명의 여왕이 등장했다. 바로 세계 유일의 '커리어 골든 그랜드슬래머(커리어 그랜드슬램+올림픽 금메달)' 박인비가 그 주인공이다. 박인비는 LPGA 3년 차였던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9언더파283타로 우승을 차지하며 '박인비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박인비의 나이는 만19세 11개월 17일로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US 여자오픈 역대 최연소 우승기록으로 남아있다.

2009년에는 지은희가 US여자오픈 우승을 차지하면서 2008년의 박인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한국선수가 US여자오픈 우승을 독식했다. 당시 한국은 25위 안에 무려 10명의 선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LPGA 무대에서 한국의 '독주체제'를 더욱 굳건히 했다. 1998년 박세리의 활약을 보고 골프를 시작한 소위 '박세리 키즈'들이 본격적으로 LPGA 무대에 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선수들은 어린 시절부터 국내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다가 LPGA 무대로 넘어온 후에도 선의의 경쟁을 이어가기 때문에 수준이 계속 상향 평준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미국 언론에서는 한국 선수들의 'LPGA 잠식'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한국 선수들의 출전 자격을 박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박인비와 지은희의 US 여자오픈 연속우승은 2010년대 한국 여자골퍼들의 무서운 독주를 위한 '워밍업'이었다.

2011년부터 11년 동안 8회 우승 '싹쓸이'

한국은 2011년 KLPGA 소속이었던 유소연이 초청자격으로 참여한 US 여자오픈에서 플레이오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당시 준우승을 차지한 선수 역시 KLPGA의 간판스타 서희경이었다). 2012년에는 최나연이 US여자오픈 우승 전통을 이어갔다. 2010년 LPGA 상금랭킹 1위를 차지했던 최나연은 2012년에도 US 여자오픈을 비롯해 3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상금랭킹 3위에 올랐다.

2013년 '여제' 박인비는 생애 두 번째 US 여자오픈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선수들은 3년 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2014년에는 재미교포 미셸 위가 우승을 차지했고 2015년에는 KLPGA 무대 6관왕을 기록한 전인지가 초청선수로 출전한 US 여자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전인지는 애니카 소렌스탐과 줄리 잉스터가 가지고 있던 역대 최저타수 타이기록(272타)을 세우는 기염을 토했다.

2016년 브리타니 랭에게 우승을 양보(?)한 한국은 2017년 박성현이라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스타가 등장하면서 US여자오픈 우승행진을 이어갔다. 박성현은 2017년 US여자오픈에서 3~4라운드에만 10언더파를 몰아치는 역전극을 펼치며 LPGA 첫 승을 메이저대회 우승으로 장식했다. 작년에는 검증된 신인이었던 '핫식스' 이정은이 US 여자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선수 10번째 우승의 주인공이 됐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7월에서 12월로 연기된 올해 US여자오픈에서도 한국 선수의 기세는 이어졌다. 세계랭킹 70위로 예년 같았으면 대회에 초청 받지 못했을 김아림은 4라운드 마지막 3개홀에서 연속 버디를 기록하며 공동 2위 고진영과 에이미 올슨을 1타 차로 제치고 한국 선수의 역대 11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김아림은 우승상금 100만 달러와 함께 향후 5년 동안 LPGA 투어에서 뛸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사실 한국 여자골프는 세계랭킹 10위 안에 무려 5명(고진영, 김세영, 박인비, 김효주, 박성현)의 선수가 포함돼 있을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리고 이번 US 여자오픈처럼 상대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KLPGA 출신의 김아림이 첫 출전에서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깜짝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선수층도 매우 두텁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LPGA 무대에서 한국 여자골퍼들의 위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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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US 여자오픈대회 박세리 전인지 김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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