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을 선보인다.[편집자말]
17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04년 5월 31일. 국회 본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왼쪽부터 최순영, 노회찬, 단병호, 권영길, 천영세, 심상정 의원).
 17대 국회 개원 첫날인 2004년 5월 31일. 국회 본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왼쪽부터 최순영, 노회찬, 단병호, 권영길, 천영세, 심상정 의원).
ⓒ 이종호

관련사진보기

 
민주화 이후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역사에서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7대 총선의 압권은 열린우리당의 152석 획득과 함께, 1960년 7.29총선 이래 44년 만에 최초로 진보정당의 원내진출과 제3당으로의 부상, 김종필의 10선 실패·정계은퇴와 노회찬의 정치 전면 등장 등이다.

2004년 4월 15일, 전자개표기가 처음으로 도입된 이날 선거에서 대부분의 당선자는 이른 시간에 윤곽이 드러났지만 당선자 한 명을 놓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비례대표 한 석을 놓고 벌어진 예측 불허의 상황이었다. 결국 4월 16일 새벽 2시를 넘어서면서 노회찬이 299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299번째로 당선이 확정되는 극적인 드라마가 연출됐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최초로 10선을 노리던 김종필은 낙선과 함께 정계은퇴를 하게 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집계한 최종 정당득표율은 민주노동당 13.03%(277만4061표), 자민련 2.82%(60만462표).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그리고 특히 노회찬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조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 한 편의 드라마가 아니라, 그동안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노회찬이 비례대표 후보 8번을 받기까지의 과정이다.

TV 토론 등 여러 토론과 강연, 그리고 '선대본 일기' 등으로 대중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노회찬, 그런데 당내에서는 비례대표 후보 앞 순위가 아니라 뒤 순위인 8번에 불과한 결과가 나왔을까? 내가 주목하는 첫 번째 물음이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성공의 최대 공신"(<신동아>, 2004.5월호)인 노회찬은 17대 국회에 들어와서도 눈부신 의정활동을 통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대중적 스타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의 후보 경선과정에서 대중적 지지와는 달리 당원 투표에서 3위를 차지해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내가 주목하는 두 번째 물음이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하나씩 함께 추적해보자.

첫 번째 물음: 노회찬은 어떻게 비례대표 후보 8번을 받게 됐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1인1표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 지역구에서 획득한 득표비율에 따라 전국구의석을 배분토록 한 것은 위헌이다."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김효종 재판관)는 현행의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공선법) 선거방법·비례대표의석 배분방식·기탁금 관련 조항들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의 의견으로 이같이 결정했다.

이로써 현행 공선법의 비례대표의석 배분방식과 관련한 조항들은 효력을 상실했으며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기 위해서는 지역구 및 전국구 의원에 대한 1인2표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개정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2002년 3월 7일 선거법 개정이 이뤄져 1인2표 정당명부 선거제도가 도입, 지방선거의 경우 2002년부터,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2004년 총선부터 실행됐다.

개정 선거법에 따라 17대 총선 비례대표 의원 정수는 299석 가운데 56석, 정당투표에서 3% 이상 얻거나 지역투표에서 5석 이상 차지한 정당에 대해 정당투표 득표비율에 따라 의석 배분이 된다(참고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석은 273석 가운데 46석. 46석 비례의석 배분 관련 봉쇄조항의 경우 지역구 5석 또는 전국 득표 5% 이상이며, 3% 이상 5% 미만 정당에게는 1석을 배분하는 걸로 돼 있었다).

민주노동당 후보 선출, 1인4표제로 결정되다
 
2004년 2월 20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2004년 2월 20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 민주노동당

관련사진보기

 
17대 총선을 앞둔 2004년 2월 20일 민주노동당 제6차 중앙위원회가 개최됐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를 어떤 방식으로 뽑을 것인가에 대한 큰 원칙은 이미 2003년 3월 대의원대회에서 결정돼 있었다. 대의원대회가 "비례대표 당원직선 선출과 여성 50% 이상"을 이미 당헌으로 정한 만큼, 이날 중앙위는 투표방식과 관련된 당규를 정하는 자리였다. 투표 방식을 결정하는 핵심은 당권자 1인당 몇 표를 줄 것인가와 다수의 표를 줄 경우 가중치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날 중앙위는 비례대표 후보 투표방식을, 당원 한 사람이 여성명부와 일반명부(남녀 모두 입후보할 수 있는 명부)에 각각 2표씩 기표할 수 있도록 하고(1인4표제), 단순 득표수에 따라 후보 순위가 매겨지는 '단순 연기명 종다수' 방식으로 확정했다. 또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50% 이상 여성할당을 명시한 당헌에 따라 당원투표에 따라 선출된 여성명부 후보를 정당명부 홀수 순번에 배정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6차 중앙위에서 1인4표제와 단순 연기명 종다수 방식이 채택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실시되는 상황을 전제할 때,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이다. 4~6%대의 정당지지율을 받고 있던 이 무렵 민주노동당의 최초 원내 진출을 낙관하는 언론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2월 13일 현재 4~6% 대를 유지하고 있다. 한길러서치에 의하면,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지난해 10월 2.3%로 최저치를 보이다가 12월에는 3.8%, 2월 4.9%로 상승했다. 2월 13일 TNS 조사에선 7.9%의 지지율을 나타낸 바 있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3~4%P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당 지지도는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문선영 기자, '"되겠나?"에서 "안되겠나?"로', <진보정치>, 168호(2004.3.1.~3.7.)
 
2004년 1월부터 4월까지의 정당지지도 추이.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제3차 중앙위원회 자료집>, 2004.5.6.
 2004년 1월부터 4월까지의 정당지지도 추이.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제3차 중앙위원회 자료집>, 2004.5.6.
ⓒ 민주노동당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경남 창원을구와 울산북구, 이 두 곳의 지역구를 제외하면 민주노동당의 기대 의석은 당시로서는 비례대표 네 석 정도였다. 이런 전망은 '정파연합당'으로 출범한 민주노동당의 당내 여러 정파그룹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회행' 티켓을 얻지 못하면 해당 정파의 당내 입지는 물론 정치적 영향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앙위원회 개최 당시 당 지지율이 '10%대'였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의원의 정수가 '56석 이상'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게 확실했다면, 민주노동당이 확보할 수 있는 비례대표 의원수는 7석 안팎이 된다. 그랬다면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예상가능한 의석이 많을수록 지원자는 늘게 마련이고, 지원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당내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정파들에게 복잡한 합종연횡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3~4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내 선거를 통과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당 안팎으로 진보정당의 상징성을 어떤 식으로든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비례대표 후보 출마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출마 예상자 또는 출마 가능자는 정파의 조직적 지원을 받을 수 있되, 확실한 상징성을 가진 인사로 한정됐다.

의석이 3~4석이라면 어떤 정파도 자신만의 힘으로 자파의 후보를 당선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각각의 정파그룹들은 비슷한 성향끼리 일종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후보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계산'은 복잡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산할 것이 많지 않았던 만큼 토론할 것도 많지 않았다.

결국 이날 중앙위는 표에 가중치를 주는 방안은 부결됐고, 단순 연기명 종다수 투표방식을 택했다. 당권자 1인에게 부여하는 표수는 명부별(일반/여성)로 2표씩, 합쳐서 1인4표로 결정됐다(정용상, '"누구도 그렇게 많이 당선될 줄 몰랐다", 2004년 2월 중앙위는 무엇을 결정했나', <매일노동뉴스>, 2005.8.16.).

참고로 17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의 정당지지도 추이는 아래 표와 같다(허진재, '17대 총선에서 여론의 흐름', <코소마-조사연구학회 공동세미나 발표자료>, 2004.5.10.).
 
'17대 총선에서 여론의 흐름', <코소마-조사연구학회 공동세미나 발표자료>, 2004.5.10.
 "17대 총선에서 여론의 흐름", <코소마-조사연구학회 공동세미나 발표자료>, 2004.5.10.
ⓒ 코소마-조사연구학회

관련사진보기

  
선출방식과 함께 선출일정도 확정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박창완)의 선거공고에 따르면 후보자 등록은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나흘간 진행되며 후보자는 등록과 함께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당원들의 총투표는 3월 9일부터 14일까지 6일간 인터넷투표, 직접투표, 우편투표 등 세 가지 방식으로 실시되고 3월 15일 개표를 통해 17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의 순위가 확정된다.

나흘간의 비례대표 후보 등록 마감 결과 일반명부 11명, 여성명부 10명 등 총 21명이 등록을 했다(1명의 경우 조기 사퇴). 등록 후보를 보면, 일반명부는 천영세(62, 당 부대표), 노회찬(49, 당 사무총장), 정태흥(33, 반미넷 대표), 김석진(44, 현대미포조선 해고자), 김병일(48, 민주노총 경북본부장), 남만진(47,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사무처장 겸 정치위원장), 이문옥(66, 당 고문 겸 부패추방운동본부장), 이선근(51, 당 민생보호단장), 장봉주(45, 전노련 부의장), 강기갑(52, 전농 부의장), 단병호(56, 전 민주노총 위원장)(기호순) 등이다.

여성명부는 현애자(42,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 전 회장), 김미경(33, 학습지노조 대교지부 충청지회 교육선전부장), 심상정(46, 당 중앙위원, 전 금속노조 사무처장), 이영순(43, 울산시지부 여성위원장), 송경아(35, 소설가), 이주희(26,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 4학년), 최순영(52, 당 부대표), 석윤수경(37, 당 중앙위원), 이정미(39, 당 소파개정운동본부장)(기호순) 등이다.
 
당의 상징색인 주황색 점퍼를 입고 있는 2004년 4.15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출마자들.
 당의 상징색인 주황색 점퍼를 입고 있는 2004년 4.15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출마자들.
ⓒ 민주노동당

관련사진보기

 
노회찬, '비례대표 8번'

2003년 12월, 총선을 넉 달 앞두고 노회찬의 고민은 간단치 않았다. '지역구 출마냐 비례대표 출마냐.' 노회찬은 오래 전부터 서울(강서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울산이나 창원을 제외하면 지역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한다는 것은 당선보다는 '희생'을 의미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후보들은 몇 차례의 선거에서 당선보다는 당을 알리고 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승산 없는 전투에 나섰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당 지도부가 지역구 출마를 꺼린다는 비난 여론마저 있던 상황이었다. 또한 권영길(민주노동당 대표)이 지역구에 출마하는 상황에서 사실상의 '2인자'인 사무총장의 지역구 출마를 압박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004년 1월 출범할 당 선거대책위원회의 중앙선대본부장을 맡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지역선거를 뛰면서 총선 전체를 진두지휘 한다는 것은 당의 역량을 감안할 때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출마를 앞두고 노회찬의 결심은 이랬다.

"일단 지역구 출마는 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세웠다. 2월초, 강서을 지구당에 내가 지역구로 출마할 수 없음을 알렸다. 중앙당이 비례대표 선거를 이끌고 가야 했고, 선대본부장을 맡아 잘할 자신도 있었다. 지역선거를 하면서 선대본부장을 맡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단 경선에 출마를 하되, 내가 높은 순위를 받는 것에는 욕심을 버렸다.

나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바람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승리로 이끌 자신이 있었다. 좀 더 많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탄생하도록 최선을 다할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다." (정용상, '비례대표 후보 출마, 어떻게 이루어졌나①', <매일노동뉴스>, 2005.8.18.)


결국 노회찬은 "진보정치 대표선수 국회를 흔들어라"는 제목의 비례대표 후보 자료집을 내고, "다시 광야에 서서"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각 비례대표 후보자들은 여의도 당사를 방문, 당원에게 선보일 3분 동영상을 찍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선거를 국민들에게 적극 선전하면서 '축제의 장'으로 가져간다는 계획 아래, 로드쇼 방식을 활용해 호남권·광주(6일), 충청‧대전권(7일), 대구(8일), 부산(9일), 울산(10일), 인천(11일), 서울(14일) 등 전국을 순회하며 토론회, 정책기행, 지역별 유세 등을 진행했다.

3월 9일~14일까지 실시된 비례대표 후보 명부 작성을 위한 당원총투표 결과 여성명부에서는 심상정 후보가, 일반명부에서는 단병호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총 당권자 2만2525명 가운데 1만3639명이 참여(투표율 60.6%)한 총투표 결과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후보 순위는, 여성명부 후보를 홀수 순번에, 남성명부 후보를 짝수 순번에 배정하도록 한 당규에 따라 심상정, 단병호, 이영순, 천영세, 최순영, 강기갑, 현애자, 노회찬 등의 순으로 확정됐다.

3048표(11.8%)를 획득한 노회찬은 비례대표 8번. 사실 그의 앞 순번 가운데 그동안 당 중심의 활동을 한 사람은 천영세, 최순영 정도였다. 당 활동 여부가 당 비례대표 후보를 결정하는 당원들이 1차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례대표 경선 결과와 관련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2004년 3월 15일 여의도 민주노동당사에서 비례대표 투표결과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을 당시 노회찬 후보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
 2004년 3월 15일 여의도 민주노동당사에서 비례대표 투표결과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을 당시 노회찬 후보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경선이 끝나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관계자들이 항의차 민주노동당을 찾았다. 전농은 바로 그 얼마 전 민주노동당 가입을 결정했다. 전농은 비례대표 후보에 농민운동가인 현애자, 강기갑 씨를 내세웠는데 각각 6번과 7번을 받는 데 그쳤다. 민주노총 출신인 심상정, 단병호씨가 1, 2번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당선권 밖의 순번을 받았다는 생각에 전농 관계자들은 흥분했다.

성토 대상은 노회찬 당시 사무총장. 노 총장이 전농을 민주노동당에 들이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당에 들어와 줬는데, 이럴 수 있소?" 그러자 옆에 있던 천영세 부대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8번이오. 차라리 나한테 그러시오." 노 총장은 초창기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일꾼이었지만 당내 조직 기반이 약해 비례대표에서 8번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천영세 부대표는 '4번'이었다. (김수민, '"6, 7번이라니?" "여기는 8번"', <뉴스풀>, 2015.3.16.).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윤재설 기자는 "창당 후 처음으로 치른 이번 비례대표 선거는 당내 민주주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성과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고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이렇게 정리한다(<진보정치> 171호, 2004.3.22. 발행).

"여성명부에 2표, 남성명부에 2표씩 행사하는 투표방식에도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의 6차 중앙위원회에서는 선거법 개정에 따라 정해지는 비례대표 의원 정수만큼 후보를 출마시킬 것을 결정해놓고는 상위 순번에 표가 집중될 수밖에 없는 1인4표제(각 명부당 2표)를 선택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결정을 한 셈이다.

당시 순위를 기표하는 방식도 제시됐고, 당원 한 사람에게 부여할 수 있는 표의 수를 명부당 3~5표로 늘이자는 안도 제시됐지만 1인4표제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에 대해 한 당원은 '자기네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비례대표 당선이 확실시되는 순번 내에 앉힐 수 있다는 당내 각 정파들의 그릇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당원들의 의사를 보다 정확히 반영할 새로운 투표방식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②-2]로 이어집니다(바로 읽기 클릭)

태그:#노회찬, #노회찬재단, #비례대표, #민주노동당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 하루 몸튼튼 마음튼튼 할 수 있기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