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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에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펀딩 모집 광고를 봤다. 망설임 없이 참가했다. 지난해, 현행 낙태죄가 헌재에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현재 일부 조항을 개정하는 수준의 논의만 진행되고 있고, 이는 사실상 낙태죄가 존치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에 대한 항의 표시였다.

지난주 펀딩에 참가한 책을 받았다. 저자 오드 메르미오가 직접 경험한 임신 중지에 대한 이야기와 마르탱 뱅클레르가 의사로서 경험한 이야기를 만화로 표현한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는 생명과 윤리, 헌법과 같은 추상적 개념의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경험담이 녹아 있었다.

단 몇 분 만에 끝난 시술, 그러나 
 
그래픽 노블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 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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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드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오드는 루프를 삽입하고 있었다. 여성의 포궁에 삽입하는 피임기구인 루프는 임신 확률이 0.6%였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린 나이고 경제적으로 기반이 없었던 오드는 임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오드의 결정을 존중해 줄 거라고 말했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고, 낳을 수 없는 환경이지만 오드는 괴로웠다. 호두만 한 태아지만 생명을 지우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오드는 시시때때로 눈물이 차오르고 8주된 태아 초음파 사진을 보며 괴로워 한다. 웹서핑을 하며 임신 주차마다 태아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검색해 보지만 임신 중지에 대한 결정은 확고하다. 

"응, 약간 겁나. 뭐? 아냐. 괜찮을 거야."

친구에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오드는 눈물을 흘린다. 수술을 기다리면서 태아에게 이름도 지어보고 자신을 위로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리도 쳐 본다(물론 마음속으로).

임신중절수술은 단 몇 분 만에 시술이 끝난다. 흡입기가 '위이잉' 돌아가고 간호사는 오드가 아직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는데 흡입해서 빼낸 피를 개수대에 흘려보낸다. 이 모든 소리가 오드에겐 공포와 두려움, 죄책감으로 남는다.

2주간의 휴가를 보내고 카페 아르바이트에 복귀한 오드는 멕시코에 다녀온 동료를 만난다. 그녀는 멕시코에서 배운 약초로 치유하는 법과 마사지로 오드를 위로한다. 동료가 다시 멕시코로 떠나기 전 5개월 동안 매주 1회 오드는 마사지를 받는다. 그리고 동료가 마사지를 시작하기 위해 어깨에 손을 얹을 때마다 매번 눈물을 흘린다.

결국,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건 당사자다
 
그래픽 노블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 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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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먹먹했다. '낙태죄는 여성의 신체를 국가가 관리하며 여성을 재생산 도구로만 한정하는 가부장이데올로기...' 이런 말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임신중지는 당사자가 원해서 하더라도 힘들고 아픈 일이라는 게 느껴졌다. 

친구 B는 임신중지를 했다. 친구는 자신에게 온 생명을 키울 수 없었다. 당시에는 친구에게 그 마음을 묻지 못 했다. 우리 사이에 금지된 이야기였다.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를 읽고 친구가 어떠했을지, 그때 이야기를 물어보고 들어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걸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힘들었지. 지금도 살면서 힘든 순간이 오면 불쑥불쑥 튀어나와. 죄책감이 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도 힘들다는 친구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다. 임신중지가 불법이든 합법이든 그 과정은 평생을 거쳐 당사자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에 있어 최고로 고심하고 선택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는 결국 당사자다. 이것은 임신중지가 합법이든 불법이든 변하지 않는다. 임신중지를 기꺼이, 즐겁게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임신유지와 중지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일은 짜장면과 짬뽕을 선택하는 일과 다르다. 임신은 여성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남성의 책임은 배제한 채 여성에게만 죄를 묻는 건 여성의 신체를 우리 사회 인적 자원 재생산의 도구로 보는 것이다. 이 일에 남성이 자유롭다면 여성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 자유로운 선택에 여성의 신체가 건강할 수 있도록 의료적 혜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불법시술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은 낙태죄가 만든 희생자들이다.

만약, 내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낙태를 하려 한다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어디서 정보를 얻어 어느 병원에서 시술을 받아야할지, 어디까지가 합법이고 어디까지가 불법인지 아는 게 없다. 성교육을 받을 때 월경 주기와 임신, 피임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임신중지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 했다. 임신중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것 자체가 임신에 대한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그러나 2020년 10월 보건복지부는 형법상 낙태죄를 존치하되 '모자보건법'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특정 사유에 해당하는 여성에게 낙태를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헌법에 합치되지 않으면 폐지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존치하고 예외 규정을 두는 것부터 논리에 맞지 않다.

낙태에 반대하는 근거로 생명이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만 소중하고 우리 앞에 존재하는 한 생명의 인권은 소중하지 않은가?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여성 누구도 가볍고 즐겁게 낙태를 선택하지 않는다. 생명을 경시해서 그런 선택을 하는 여성은 없다. 임신중지 이후에도 존엄한 인격을 가진 한 생명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낙태죄는 전면 폐지돼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에도 개제합니다.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오드 메르미오 (지은이), 이민경 (옮긴이), 롤러코스터(2020)


태그:#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낙태, #헌법불일치, #모자보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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