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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좋은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평생 한국 미술사에 매달려온 미술사학자 최열 선생의 <옛 그림으로 본 서울>입니다. 부제가 '서울을 그린 거의 모든 그림'인데, 저자가 알고 있는 옛 서울 그림은 거의 다 담겼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습니다. 실제로 125점의 조선시대 그림이 최고의 해설과 함께 수록되어 있으니, 저자로서도, 출판사로서도 역작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 글은 문재인 대통령께서 미술사학자 최열 선생의 책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을 읽고 24일 자신의 SNS에 쓰신 것이다. 이날 이 사실을 한 시간쯤 지나 알게 된 나는 즉시 포털에 책 제목을 검색했다.
 
 <옛 그림으로 본 서울> 표지
 <옛 그림으로 본 서울> 표지
ⓒ 혜화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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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수많은 언론사에서 다룬 기사 목록이 줄을 잇고 있었다. 기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겠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마냥 좋아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되뇌이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처할 사람은 오직 나, 그러니까 1인 출판사 대표인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추천했다, 1인 출판사 책을

지난 봄,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의 마지막 교정지를 눈앞에 두고 있던 그때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렸다. 1인 출판사를 시작한 지 2년이 될 무렵이었다. 1인 출판사는 기획부터 편집은 물론 제작과 홍보, 마케팅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혼자 판단하고 결정한다. 책임은 오롯이 내 몫이다. 뜻밖의 전염병으로 모든 것이 예측불허였다. 알 수 없는 불안이 일상을 위협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출판사에서 신간 출간을 보류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때, 이 책을 내는 것이 맞는가. 전진이냐 멈춤이냐. 출간 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면? 불안이 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시도때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 확실한 불안과 불확실한 희망의 교차점에 나는 서 있었다. 마지막 교정지를 넘기며 여기까지 온 시간을 돌아봤다. 멈출 수 없었다. "괜찮겠느냐"는 최열 선생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이 책이 안 팔리면 그냥 제가 다 껴안고 살래요."

최열 선생과는 약 8년여 전에 만났다. 저자와 편집자로 책 한 권을 만든 인연. 더이상 이어지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인연. 그러나 책이 나온 뒤에도 인연은 이어졌다. 이제 막 출판사를 시작하는 내게 선뜻 원고를 내주신 덕분에 그 책을 만들며 이전보다 만날 일이 더 늘었다.

2002년부터 서울을 그린 조선 시대 그림에 관해 꾸준히 글을 써오신 걸, 그것이 세월이 흘러 집대성이 되어간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던 나는 그 책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선생님은 매우 집요한 저자다. 마지막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더 충실하게 책을 채우고 싶어하신다.
 선생님은 매우 집요한 저자다. 마지막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더 충실하게 책을 채우고 싶어하신다.
ⓒ 이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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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최열 선생은 지난 20년 가까이 서울을 그린 조선 시대 그림 속에 담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과 시대의 풍경, 인간과 역사의 흔적을 살펴 오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 속 풍경이 오늘날 어느 곳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그려진 것인지 화가의 시선을 좇아 산과 강을 다니며 하나하나 맞춰 그 내용을 그림마다 기록해두셨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그 점이 인상적이셨던 듯하다.

"저자는 위치가 확인되는 '거의 모든' 그림을 화가와 그림의 내력까지 충실한 해석과 함께 보여줍니다. 해설과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해보노라면 읽고 보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서울을 그린 진경 산수화와 화가에 대한 사전과 같은 자료로서도 가치가 크다고 느낍니다"라고 쓰신 걸 보면. 

이 문장을 읽고 진심으로 놀랐다. 책을 꼼꼼하게 읽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원고를 탐내지 않을 편집자는 없다. 하지만 내 차지가 될 거라는 기대는 선뜻 하기 어려웠다. 큰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게 여러모로 좋겠다고, 감히 욕심을 부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미 선생님은 나와 이 책을 만드는 걸 기정사실로 여기고 계셨다.

그렇게 책 한 권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2018년 가을 초입의 일이었다.

집요한, 매우 집요한

그리고 겨울과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다시 봄이 왔다. 선생님과 나는 신나게, 정성껏, 열심히, 공들여 함께 원고를 만지고 다듬었다.

선생님은 매우 집요한 저자다. 마지막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더 충실하게 책을 채우고 싶어하신다. 나의 역할은 그런 선생님의 의지를 책에 고스란히 담는 것이다. 마치 교정지 위에 씨앗을 뿌리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 같은 날이었다.

그렇게 완성한 마지막 교정지를 두고 출간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나는 책을 내기로 결정한 이후 더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책이 나왔다. 책을 본 사람들마다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사람은 이 시국에 이런 책을 낸 것에 놀라고,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책이 1인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출간 즉시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크게 다뤄줬고, 대형서점, 온라인서점 담당자와 동네책방 사장님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책을 읽은 분들로부터 '역시 최열!'이라는 후일담을 많이 들었다. 출간 후 판매 현황은 나쁘지 않았다. 독자들께 받은 칭찬이 무엇보다 값졌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안 할 수 없지만, 모두가 힘든 시절 이 정도만으로도 나는 더할 나위 없다고 여겼다.

이 책에 쏟아부은 최열 선생님의 노고에 독자들이 보내준 이 정도의 성원이면 되었다고 여겼다. 능력이 부족해 모자란 점은 있을지언정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자연스럽게 판매는 하향곡선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랬는데 대통령께서 '모처럼 읽은 좋은 책'으로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을 추천하는 사건이 벌어진 거다. 삶은 예측불허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무렵 나는 내년에 출간할 최열 선생의 또다른 책 <옛 그림으로 본 제주>의 원고를 막 받아든 참이었다.

제주를 다룬 거의 모든 그림을 담은 책.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내후년에는 관동팔경과 단양팔경 등을 아우른 <옛 그림으로 본 조선>을 이어서 내자는 계획을 선생님과 신나게 나누고 있던 차였다. 내년에 제주도의 그림을 담은 책이, 그 다음해 조선의 실경을 모은 책이 나오면 그때마다 <옛 그림으로 본 서울>이 덩달아 다시 주목을 받을 거라고 희망 섞인 전망을 나누고 있었다.

24일 이후 며칠 동안 나는 뜻밖의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어린애 같았다가, 해야 할 일을 챙겨야 하는 출판사 대표였다가, 홍보물 문구를 정리하는 편집부 직원이었다가, 급하다는 서점의 요청에 따라 책을 들고 뛴 퀵서비스였다가, 서점 한쪽에서 컬러출력해간 띠지를 직접 두른 영업부 직원이었다가, 가지고 간 홍보물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달라고 납작 엎드린 판촉사원이었다. 바빴다는 건 알겠고,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기쁨

1인출판사를 시작한 뒤 골방에서 책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텅 빈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의 외치는 소리는 우물 안에서만 울리고 마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을 만드는 행위가 존중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무릎이 꺾일 듯한 순간은 일상이다.

내년에 만들 책은 과연 독자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받을까 불안과 염려가 수족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2020년의 가을은 유난하다. 코로나19는 말할 것도 없다. 개정 도서정가제의 시행 지속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출판계와 서점업계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고단했다. 한편에서는 문을 닫는 책방들이 늘었고, 출판사들마다 곤두박질치는 판매부수에 괴롭다. 그렇지만 '우리'만 힘든 게 아니니 내색조차 어렵다.

그런 순간에 받은 뜻밖의 선물 앞에서 나는, 해야 할 일을 거의 마친 뒤인 이제야 마음껏 기쁨을 누린다. 덕분에 이 책을 찾는 독자들이 부쩍 더 늘어서 기쁘다. 나만의 기쁨이 아니어서 더 기쁘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나의 일도 그렇다. 모처럼 독자들이 많이 찾는다며 반가워하는 동네책방 사장님들의 목소리가 기쁘다.

대형서점, 온라인서점 직원들과 주고 받는 분주한 메일 사이에 전해지는 활기가 기쁘다. 제작 물량이 줄어 근심 가득한 인쇄소에 다시 제작을 의뢰할 수 있어 기쁘다. 이번 달 지급할 물류비 숫자가 기쁘다. 함께 일한 외주 동료에게 더 많은 작업비를 줄 수 있어 기쁘다. 다들 힘든 이 시절, 어딘가 힘이 빠져 보였는데 잠깐이라도 이런 행운과도 같은 순간을 더불어 즐길 수 있어 기쁘다.

무엇보다 기쁜 건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되었다는 독자들의 반응이다. 광야에서 홀로 외치는 나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탓에 가닿지 못한 독자들을 나는 새롭게 만나고 있다. 기쁘고 또 기쁘다. 물론 이 또한 곧 지나갈 것이다. 이 흥분도, 기쁨도.

2020년 10월 24일 토요일 5시경. 함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홉 살 이하윤 어린이(조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고모, 움직이지 않으려고 해도 몸이 자꾸 움직이고, 마음이 자꾸 떨리고, 이렇게 기쁠 수가 없고 정말 좋아요."

쉰을 넘긴 내 마음도 그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이 순간은 지나갈지언정 그 마음은 편집자로 일하는 내내 귀하게 남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혜화1117 출판사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이다.


옛 그림으로 본 서울 - 서울을 그린 거의 모든 그림

최열 (지은이), 혜화111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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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을 오래 했다. 지금은 혜화동 인근 낡고 오래된 한옥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책을 만들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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